<물에서 나온 새>,<오세암>등의 동화로 알려진 고 정채봉 작가가 투병을 하며,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겪은 마음의 풍경을 법정 스님께 솔직하게 적어 보낸 글입니다.
말없는 바위섬이 되고 싶다는 작가의 말과 아흔의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말이 기억에 오래 남더군요. "천사의 눈으로 내 마음을 본다면 누더기 마음일 것입니다"라는 말....
파도가 남긴 상흔을 묵묵히 견디는 바위돌처럼 세상의 풍파에 굳어져 버린 영혼으로 맞서기보다 '여린 속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아프면서 산다는 것...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제 자신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스님
하늘빛과 물빛이 시릴 만큼 푸른 가을날의 아침입니다. 이 맑음 속에서 안녕하옵신지요
지난 여름은 저한테 빈 계절이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냥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들하고나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면서 서늘바람이 겨드랑이 밑을 파고들자 불현듯 바다가 보고 싶어졌습니다.그래서 지금 남녘에 내려와 있습니다. 가을 해변의 길손이 되어 한 며칠 떠돌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해수욕객들이 떠나버린 쓸쓸한 해수욕장에 들러 있습니다.한번쯤 빨래를 했으면 싶은 비치 파라솔 아래에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자니 먼데 우두커니 서 있는 바위섬 하나가 눈에 들어 옵니다.
만일 어떤 산사께서 날더러 이 바닷가에 온 뜻을 말해보라면 저는 저 우두커니 서 있는 바위섬을 가리키고 싶습니다. 저 바위섬에 파도결이 내놓은 수많은 상흔처럼 저 또한 세파에 부딪치면서 그리고 더러는 자해에 의해 빗금져 있는 마음의 상처를 소금물에 적시고 싶어 왔노라고요.
스님 정말이지 저는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바위섬을 닮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도 찾아 주셨던 병상에 있었을 때 저는 참 많이도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었지요.
때때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만 저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었던 것이라고 이제야 솔직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병실에 그것도 중환자실에 있어본 사람들은 압니다. 얼마나 생각 자체가 괴로운 것인지를...
사람들은 생각으로 지옥을 짓고 생각으로 극락을 짓기도 합니다. 생각에 의해 이별을 하며 눈물 짓고 생각에 의해 다시 사는 기쁨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생각의 집인 마음을 잃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겠지요.
스님 언젠가 저는 아흔 살이신 피천득 선생님을 찾아 뵙고 이런 속내를 펴보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제 마음은 상처가 아물 날이 없습니다." 그러자 평생 그만큼 순수하게 살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던 선생님께서 "정 선생, 내가 내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 가 없어서 그렇지, 천사의 눈으로 내 마음을 본다면 누더기 마음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바위섬에 파도 자국이 없을 수 없듯이,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에 빗금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바라기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바위처럼 아린 상처나 덧나지 않게 소금물에 씻으며 살 수밖에요. 오늘은 넋두리가 길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