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목요일 묵상글>
<마태18,21-22>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ewww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해석하자만
‘가득 참을 경계하는 술잔’이란 뜻이지요.
다시 말하면 욕망을 조심하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고대 중국에서 국가 행사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잔은 제작 방법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고 합니다. 계영배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70퍼센트 가량 차면 그 이상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 채우고 싶어도 술이 술잔 밑으로 흘러 버리기 때문이지요.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0)/
우리의 위도 마찬가지 입니다. 딱 70%만 채워야 건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운동을 해서 음식물을 섞어야 하는데 100% 꽉 차게되면 운동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 실학자 하백원과 도공 유명옥이 처음으로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 잔을 거상巨商 임상옥이 소유하게 됐고,
그는 늘 계영배를 옆에 두고 자신의 욕망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소설 <<상도商道>>는 최인호가 쓴 장편 역사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임상옥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財上平如水(재상평여수)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人中直似衡(인중직사형)
물과 같은 재물을 혼자 가지려는 재산가는
반드시 그 재물로 비극을 맞게 되고,
저울처럼 바르고 정지하지 못한 재산가는
반드시 그 재물로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교훈이 담긴 말이지요.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1)/
재산이라는 것이 자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자원과 기술과 인력이 다 재산인 것이지요.
요즈음 남북관계가 미묘합니다.
하지만 결국 북에서는 먹을 것좀 달라는 이야기이겠지요.
우리가 통일을 앞세운다면 갑갑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매번 북에 끌려다니는 꼴이 될테니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통일이 문제가 아니라 남북이 먼저 살 길을 찾는게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협력없는 남과 북의 독자적인 발전에는 한계에 다달았기 때문입니다.
북은 북대로 자본과 기술이 없어 여전히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직도 문제입니다.
남은 남대로 자원과 인력이 문제입니다. 더 이상 발전하는데 제동이 걸린 것이지요.
남의 자본과 북의 자원이 만나고, 남의 기술과 북의 인력이 만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요.
견리사의見利思義란 말을 들어보신적이 있나요?
눈앞에 이익(利益)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義理)에 합당(合當)한 지를 생각하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제 남과 북은 더이상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경제적인 협조자로서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때가 온 것이지요.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모두 뜻 있는 교육과 사회사업에 쓰도록 하라!”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씨의 유언입니다.
말 그대로 견리사의를 실천한 분이시지요.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유일한은
해방이 되자 고국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귀국한 유일한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함께 나라를 세우는 일을 같이 하자고 제의합니다.
그러나 유일한은 이런 제의를 뿌리칩니다.
나라를 일으켜 동포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좋은 상품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제공하고,
정직하게 번 돈으로 세금을 내어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기업가의 길, 바로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해방에 이은 분단으로 중국과 만주와 북한에 있는 회사를 잃었지만 유일한은 낙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섭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20)/
자신이 평생 일군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 유일한!
모두가 다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나누고,
일흔일곱번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조금만 더 양보하고, 서로 예의를 지키고 존중하며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Matthew18,21-22>
21 Then Peter approaching asked him,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22 Jesus answered,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
<책 소개>
6.견리사의 見利思義의
이치를 실천한 유일한.
견리사의見利思義란?
눈앞에 이익(利益)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義理)에 합당(合當)한 지를 생각하라는 말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모두 뜻 있는 교육과 사회사업에 쓰도록 하라!”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이 있다.
말 그대로 해석하자만
‘가득 참을 경계하는 술잔’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욕망을 조심하라는 의미다.
고대 중국에서 국가 행사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잔은 제작 방법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고 한다. 계영배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70퍼센트 가량 차면 그 이상은 채워지지 않는다. 더 채우고 싶어도 술이 술잔 밑으로 흘러 버리기 때문이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0)/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 실학자 하백원과 도공 유명옥이 처음으로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이 잔을 거상巨商 임상옥이 소유하게 됐고,
그는 늘 계영배를 옆에 두고 자신의 욕망을 다스렸다고 한다.
소설 <<상도商道>>는 최인호가 쓴 장편 역사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임상옥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財上平如水(재상평여수)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人中直似衡(인중직사형)
물과 같은 재물을 혼자 가지려는 재산가는
반드시 그 재물로 비극을 맞게 되고,
저울처럼 바르고 정지하지 못한 재산가는
반드시 그 재물로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교훈이 담긴 말이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1)/
“내가 번 돈 내가 쓰겠다는데 누가 뭐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로 하여금 돈을 벌게 해 준 사람들,
“그들을 위해 내가 번 돈이 쓰여야 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익을 보게 된다면 먼저 의리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의 뜻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긴 기업가도 있다. 조선의 거상 임상옥이나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1904년 4월, 대한 제국의 순회 공사 박장현이 멕시코로 부임해 갈 때 미국에 들른다는 소식을 듣고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은 그의 장남 일한을 미국에 유학 보낸다. 유일한의 나이 아홉 살 때의 일이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2)/
미국에 건너간 유일한은 네브래스카 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다. 그는 선교사의 주선으로 커니라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던 이사벨과 엘리자베스 자매의 집에 거처를 정한다. 독실한 침례교도였던 두 자매는 결혼을 하지 않고, 유일한을 아들처럼 돌봐 준다.
유일한은 성적도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운동도 잘했다. 고등학교에서는 가장 주목받는 미식축구 선수였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유일한의 이름은 ‘유일형’이었다.
그러나 ‘형’을 잘 발음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은
그를 ‘일한’이라고 잘못 부르곤 했다.
유일한은 이를 계기로 조국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의미를 부여해 자신의 이름을 ‘유일한’으로 바꾸게 된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3)/
어린 유일한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사람은 박용만이었다. 그는 유일한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 없었다. 박용만은 1909년 네브래스카 주 헤스팅스에 항일 무장 독립투쟁을 위한 군사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한다.
13명이 모여들었다.
그 13명 중에 쉰 살을 넘긴 사람이 한 명 있었고,
열다섯 살이 채 못 된 소년이 한 명 있었다.
어린 소년이 바로 유일한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총기를 구입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했고
자급자족을 위해 직접 농사도 지었다.
유일한은 이곳에서 3년간 생활했다.
민족과 사회를 위해 살겠다는 유일한의 의식이 싹튼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4)/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유일한은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부모님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편지는 즉시 고국으로 돌아와 집안을 보살피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유일한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상담 선생님을 찾아간다.
이때 상담 선생님은 은행에서 100달러를 빌려주면서
이 돈을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일한은 남아서 학업을 계속하라고 한다.
유일한은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 변전소’에 취직하여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고 대학에 들어갈 학비를 스스로 번다.
1916년 가을 유일한은 미시간 주립 대학교 상과에 입학한다. 그는 한국과 중국 학생들을 모아 ‘한중 학생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회장으로 뽑히게 되고, 여기에서 코넬 대학교 의대 출신인 소아과 의사 호미리胡美利를 만나 결혼한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5)/
유일한이 미시간 대학 졸업반이던 1919년 4월 14일, 유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한인 자유 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을 때,
그는 이 대회에서
‘한국 국민이 독립 운동을 일으킨 목적과 바람을 알리는 글’을 직접 쓰기도 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6)/
유일한은 대학 졸업 후
제너럴 일렉트릭이라는 큰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러나 월급을 받으며 자기 한 몸 편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큰 뜻을 품고 사업을 시작했다. 1922년 식품 회사의 설립이 그 시작이었다. 유일한은 숙주나물을 유리병에 넣어 보관하고 배달하던 기존의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착수한다.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순간 고온 열처리를 통한 통조림 보관법’을 개발한다.
기술은 있었지만 돈이 없었던 유일한은 미시간 대학의 동기이며, 디트로이트에서 식료품 도매업을 하고 있던 윌리스 스미스의 자본을 끌어들여, 1922년에 ‘라초이 식품 회사(La Choy Co)’를 창업하기에 이르렀다.
사업은 성공이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7)/
1926년,
유일한은 미국에서의 사업을 접고 귀국을 결심한다.
그는 제약회사를 차려 질병 퇴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회사 이름도 자신의 이름에서 ‘유한’을 따고, 세계로 통하는 회사라는 의미로 ‘유한양행’이라고 정한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8)/
유한양행의 상징인 버드나무에는 하나의 사연이 있다.
유일한이 귀국을 결심하고 서재필 박사를 찾아갔을 때,
서재필 박사가 정치나 힘으로 독립 운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에게 필요한 사업을 해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하면서 버드나무를 새긴 목각화를 선물로 준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가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되어 달라는 의미였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던 1936년에 사원은 77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유일한은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바로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바꾼 것이다.
이제 유한양행은 유일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주식을 가진 사람이 주인이 되는 회사가 된 것이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19)/
유일한은 매우 헌신적인 독립 운동가이기도 하였다. 1941년에는 해외 독립 운동 단체들이 연합하여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해외 한족 대회’에서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2년에는 미군 전략 첩보대(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1945년에는 냅코 작전(Napko Project)에 비밀 요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냅코 작전은 한인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직접 침투한다는 작전이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을 때, 유일한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일본의 패망은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한 것이기도 했다.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유일한은
해방이 되자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귀국한 유일한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함께 나라를 세우는 일을 같이 하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유일한은 이런 제의를 뿌리친다.
나라를 일으켜 동포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좋은 상품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제공하고,
정직하게 번 돈으로 세금을 내어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가의 길, 바로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해방에 이은 분단으로 중국과 만주와 북한에 있는 회사를 잃었지만 유일한은 낙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20)/
유일한이 상공 회의소 회장직을 맡게 되었을 때, 모두들 그의 동생에게 회사의 사장직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형제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어린 시절 해스팅스 훈련병 학교에서 같이 훈련을 받았던 구영숙이라는 사람에게 회사를 맡긴다.
1948년 상공부 장관을 맡아 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제의를 뿌리치고 유일한은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귀국하여 교육 사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고려 공과 기술 학원을 세웠으며, 한국 직업 학원, 유한 공업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유한양행 주식 40퍼센트를 각종 공익 재단에 기증하며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천했다.
1971년 3월 11일,
유일한은 한 통의 유언장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다.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 1만 달러를 준다. 딸 재라에게는 유한 학교 안에 있는 땅 5,000평을 물려준다. 이 땅을 유한 동산으로 꾸며 주기 바란다. 단, 유한 동산은 학생들이 마음껏 뛰놀며 쉴 수 있도록 울타리를 치지 마라. 아들 일선은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앞으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라. 나머지 재산은 모두 한국 사회 및 교육 신탁 기금에 보내, 뜻있는 교육과 사회사업에 쓰도록 하라!”(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21)/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22)/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
그리고.....
손때 묻은 가방, 안경, 만년필, 지팡이가
전부였다.
유일한은 또 종업원을 최고로 대우하는 사업가였다. 가족과 형제만의 이익을 챙기는 속 좁은 사업가가 아니었다. 나를 생각하되 남도 생각할 줄 아는 큰 사람이었다. 내 가족뿐만 아니라 내 이웃, 더 나아가서 내 국가까지도 챙길 줄 아는 일꾼이 유일한이었다. 그는 성실한 납세자이기도 하였다. 내가 번 돈으로 내 국가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기업가 정신은 그대로 딸에게도 이어졌다. 그의 딸 유재라 씨도 1991년 미국에서 숨을 거둘 때 200억 원에 상당하는 자신의 전 재산을 공인 법인인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유일한, 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꼽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업들이라면 마땅히 이익 앞에서 유일한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익 앞에서 그를 생각하는 것은 곧 의리義理를 생각하는 것이리라.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23)/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초기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초기 로마 사회에서는 사회 고위층의 공공 봉사와 기부, 헌납등의 정통이 강하였고, 이러한 행위는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면서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귀족등의 고위층이 전쟁에 참여하는 전통은 더욱 확고했는데, 한 예로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일으킨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최고 지도자인 콘설(집정관)의 전사자 수만 해도 13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할 수 있었으나, 제정帝政 이후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면서 발전의 역동성이 급속히 쇠퇴한 것으로 역사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의식은 계층 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전쟁과 같은 총체적 난국을 맞이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득권층의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제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 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 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가 전투 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한국 전쟁 때에도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24)/
*유일한
1895년 1월 1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
1904년 대한 제국의 순회 공사인 박장현을 따라 도미.
1919년 미국 미시간 대학교 상과 졸업.
1922년 라초이 식품 회사 설립.
1925년 소아과 의사 호미리胡美利 여사와 결혼.
1926년 12월 10일 귀국하여 유한양행 창설.
1942년 미국에서 항일 무장 독립군 맹호군 창설 주역으로 활동.
1945년 미국 OSS 지하항일 계획인 냅코 작전 특수 공작원으로 활동.
1946년 귀국하여 초대 상공 회의소 회장에 취임.
1948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국제법 수학(박사과정)
1964년 학교 법인 유한 학원 설립.
1968년 모범 납세자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 수훈
1970년 재단 법인 유한 재단 설립.
1970년 사회 공익에 기여한 공으로 국민 훈장 모란장 수훈.
1971년 3월 11일 향년 76세로 영면
4월 8일 유언장 공개, 전 재산 사회 환원.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