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 정선례
이른 아침, 햇볕이 잘 드는 마당 한 켠에 손 다리미질해서 빨래를 널었다. 빨래줄 가운데에 바지랑대를 높이 세웠다. 장날이다. 해산물에서 물이 흘러 차에 비린내가 스미는 걸 방지하려고 세숫대야 만한 플라스틱 통을 트렁크에 싣는다. 여름 가뭄과 가을 폭우를 견딘 들녘이 온통 황금색이다. 볼빨간사춘기의 '여행을 떠나요' 노래가 나온다. 볼륨을 올렸더니 어디 먼 여행지라도 가는 듯 엉덩이가 들썩여진다.
우리 동네는 매월 4일과 9일에 장이 선다. 산과 바다, 들이 있어서 사철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봄에는 주꾸미와 바지락, 여름에는 갯장어, 돔 가을에는 전어와 꽃게가 잡힌다. 버섯이나 약초 등의 산나물도 풍부하다. 장에 오면 어떤 게 제철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혹여 마음에 감기라도 앓게 되면 새벽 시장에 나가보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 팔고 사는 사람이 반반 섞여 붐비는 전통 오일장 둘러보기를 권한다.
예전에는 일부러 파장 무렵에 가기도 했다. 미처 팔지 못한 물건을 떨이로 팔기에 헐값에 살 수 있어서다. 요즘에는 이른 시간에 주로 간다. 원하는 품목을 빠짐없이 구입하는 게 현명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마다 콩나물과 두부는 빠뜨리지 않는다. 두부는 예전에 다이어트할 때 밥 대용으로 자주 먹었다. 콩나물은 2천 원어치만 사도 30년 단골 사장님이 봉지가 넘치도록 담아준다. 그만 됐다고 말려도 소용없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서인지 인근 해역에서 잡아 올린 꽃게가 좌판 여기저기에 살아서 집게발을 치켜든다. 실한 놈으로 넉넉히 샀다. 그중 작은 거는 양념게장하고 큰놈들은 먹기 좋게 잘라서 무, 대파, 풋고추, 생강 넣어 팔팔 끓이다가 된장 풀어 한소끔 더 끓이면 맛있는 꽃게탕이 된다. 살은 발라 먹고 국물은 그릇째 들이켜야 제맛이다. 마트에서 냉동 꽃게도 사봤지만, 살아있는 꽃게로 끓인 이 맛에는 어림없다. 우리 고장에는 칠게는 많이 나오는데 농게는 없다. 무안이나 신안에 많이 나온다. 드넓은 개펄이 많아서일 것이다. 농게는 등이 높고 붉은색 다리가 기다랗다. 집게가 커서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 몸은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알록달록하다. 어렸을 때 간장게장에 밥을 비벼서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그 시절이 그립다.
말린 조기와 민어도 사고 씨알이 굵은 목포 갈치도 토막 내서 살짝 소금을 뿌려달라고 했다. 풋호박, 대파 두툼하게 썰어 바닥에 깔아 그 위에 갈치를 올린다. 불그스름한 생고추 몇 개를 작은 절구에 찧고, 양파도 채썰어 넣어서 단맛을 낸다. 간은 집간장으로 맞춰야 게미지다. 그이가 상에 앉으면 가운데 토막을 떠서 상에 올린다. 돌아서면 빈 밥그릇을 또 내밀겠지? 제철인 전어도 몇 마리 썰어달라 하고 굵은 것도 샀다. 살짝 냉동했다가 초장에 찍어 먹고 굵은 것은 토란대 살으려면 장작불 지펴야하는 데 그 불씨로 구워야겠다. 갓, 시금치, 유채, 봄동, 상추씨도 샀다. 월동에 강해서 겨울과 이른 봄 채소가 귀할 때 상에 올리면 든든한 한 끼가 된다.
도서관에 가려고 주차장을 막 빠져나오는 데 전화가 온다. 이웃 마을에 사는 명숙 언니다. "어야, 장에 왔능가?" "네, 장 다 보고 이제 가려고요." "밥 안 먹었제? 얼른 죽집으로 오소." 차를 다시 주차하고 잰걸음으로, 그곳으로 갔다.
건물은 허술하지만, 읍내에서 가장 맛있기로 소문난 팥칼국수 집이다. 오직 이 메뉴 한 가지다. 팔팔 끓는 국수를 양푼에 가득 내온다. 이 집은 햇팥만 고집하고 면발이 쫄깃하다. 무엇보다 반찬이 맛있다. 새로 버무린 겉절이와 물김치가 맛있기로 소문나서 비 오는 날이나 장날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언니는 밥을 몇 술 떠야 속이 편하다며 방 한켠에 있는 밥통에서 밥을 담아와 겉절이와 비빈다. 남은 죽이 아까워 비빔밥을 먹고도 더 먹었더니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 지경이다.
철물점에 들러 들깨 털 때 쓰는 망과 작업 방석을 사고 축협마트에서 치즈, 우유, 야쿠르트까지 장바구니에 담았다, 오늘 예산을 초과해 버렸다. 이유는 허기다. 배가 든든하면 먹거리나 다른 물건을 덜 산다는 말이 있다. 집에 가면 한마디 들을 것 같아 슬슬 걱정이 인다. "장바닥에 있는 거 다 사 와봐라, 우리 집에 필요 없는 물건 하나라도 있는지." 남편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아, 그러면 뭐라고 대꾸하지?
집에 오자마자 장 본 걸 나누어서 정리했다. 축사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는 그이의 손을 잡아끌어 소나무와 단풍나무 그늘 사이 평상에 앉혔다. 순대와 꽈배기, 도넛을 내놓았다. 시장했나 보다. 짙은 눈썹에 소눈보다 더 큰 눈이 말갛다. 시원한 캔 맥주를 꺼내와 슬쩍 건넨다.
첫댓글 그림처럼 사는 군요.
그 팥칼국수집 저도 가 봤어요. 맞는지 모르겠지만 유명하다고.
맛깔나게 쓰신 글을 보니, 오일장의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그 속에서 이것저것 살뜰하게 장을 보고 팥칼국수 드시는 모습까지.
그 유명한 팥칼국수 집이 어디일까요?
지난번에 글쓰기 반 선생님께 <순심이네 보리밥집>을 소개받았는데 여즉 못 가봤습니다.
팥칼국수집까지 기억해 두렵니다.
장 보따리가 크셨겠어요. 그 보따리 풀어 가족들의 웃음을 사겠지요? 지혜로운 선생님이시군요.
맛깔스런 글 때문인지 배가 몹시 고프네요. 글 참 좋아요. 선생님.
아, 강진!
저는 올해 말린 민어를 처음 먹어 봤어요.
진짜진짜 맛있더라고요.
선생님, 글이 정말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