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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을 때에 저보(邸報)가 강릉에 내려왔는데, 교생(校生) 함승술(咸承述)이 강릉부(江陵府)에 들어왔다가, 그 이름자가 제 이름 술(述)자와 같은 줄로 잘못 알았다. 집에 돌아오니, 친구들이 물었다.
"누가 부사로 되었던가?"
하니,
"정술이 되었다."
하여, 사람들이 웃었다.
그 후 한강이 도임하여 교안(校案)을 열람하다가 승술의 이름을 보자, 또 자기 이름과 같은 글자로 잘못 알고,
"함승구의 자(字)는 무엇이라 하는가?"
하니, 듣는 자가 모두 크게 웃었다.
감사 권윤(權綸)은 외왕부(外王父)의 외증조(外曾祖)이다. 성묘(成廟_성종을 가리킴) 때에 주감(冑監)의 장으로 있은 지 20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중묘(中廟) 때에 문학한 선비는 모두 그가 지도한 자였다.
그의 손자 연(璉)은 기묘년(중종 14, 1519) 봄 과거에 대악부(大樂賦)와 어룡무동정시(魚龍舞洞庭詩)를 지었는데, 모두 좋았다. 이름을 뜯어보니 바로 공의 손자였다. 지정(止亭_남곤(南袞)의 호)이 주시관(主試官)이었는데, 바삐 뽑아서 장원을 시켰고, 식년강(式年講)에는 두 번 응시하였다. 집에 두 장이 떨어져 나간 《맹자(孟子)》 책이 있었는데, 시험이 반드시 떨어져 나간 부분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것은 읽지 않고 응시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 시험에 맹자 문제는 모두 그 부분에서 나왔으므로 운명이라 하여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후 조정에서 세마(洗馬)와 왕자사부(王子師傅)로서 두 번이나 불렀으나 모두 가지 않았다.
정원과 연못을 잘 꾸미고 풍류로서 자신을 봉양함이 그 고을에서 첫째였고, 조촐한 복을 40여년이나 누렸다.
권장원(權狀元)의 딸은 곧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아내이다. 그 시어머니가 병으로 위태롭게 되자 권씨는 향을 피우며, 한데에서 밤낮 7일 간을 하늘에 기도하였다. 권씨에게 어린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하늘에서 새알만한 빨간색의 환약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주워다가 갈아서 먹게 하였는데, 향취가 방안에 가득하고 시어머니의 병도 곧 나았다.
이것은 정성어린 효도가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지금도 그 고을 노인들이 일컫는다. 조정에서 듣고 정려(旌閭)하였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는 바로 권씨의 외손녀이다. 그런 까닭으로 선생은 북평(北坪) 권장원의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날 때에 서광(瑞光)이 하늘에 비쳤는데 장원이 이 아기를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모부인은 성품이 고요하고 굳세었으며 문장에 능하고 그림도 그렸다. 규범(閨範)이 매우 엄해서 여칙(女則)으로써 자신을 단속했는데, 선생의 학문은 태교(胎敎)에서부터 얻은 것이 많았다.
강릉은 풍속이 순박하여 예부터 효도와 정절을 지킨 사람이 많았고, 정표(旌表)가 마을 사이에 잇달아 보였다. 송강(松江)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집마다 봉작(封爵)할만하다.'란 것이 별로 헛말이 아니었다.
한강(寒岡)이 부사로 되어 와서 효자와 순손(順孫)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참석한 자가 52명이나 되었다. 이런 장한 일은 고금에 드문 것이었다.
첨지(僉知) 김담(金澹)은 강릉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이 극진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몸소 만들었고, 조석으로 곁에 모시기를 40여 년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연달아 죽자, 곡하는 소리가 끊임없었고,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일어났다. 잔에다 술을 부어 놓고 침장(寢帳) 앞에 엎드려서 종일토록 통곡했는데, 잔이 문득 말라서 사람들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일찍이 산에 올라 돌을 떠서 묘표(墓表)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침 한창 얼어붙은 겨울이어서 쪼아내지 못하게 되자 공이 돌을 붙들고 통곡하니 돌이 갑자기 벌어졌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았다. 효성이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조정에서 세 번이나 관직에 임명했으나 모두 가지 않았고, 정문(旌門)을 세워 그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였다. 그 후 나이가 70이라는 것으로써 방백이 계문(啓聞)하여 특별히 당상관(堂上官)인 첨지(僉知)에 제수되었고, 90세까지 살았다.
남사고(南師古)는 울진(蔚珍) 사람인데 힘껏 공부해서 역리(易理)에 능통하였다. 천문[象緯]ㆍ지리[堪輿]ㆍ점술(占術)에 밝아 말한 일이 모두 기이하게 맞았다.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했으나 끝내 급제하지는 못했다. 벗들이,
"자네는 남의 명수(命數)는 잘 알면서도 자신의 운명은 헤아리지 못하고 해마다 헛걸음을 하니 왜 그런가?“
하자, 남(南)이 웃으면서,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면 점술도 어둡게 된다. 내가 합격하지 못할 줄을 분명하게 알면 과거장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나 욕심으로 생각이 벌써 어두웠던 까닭으로 항상 합격될까 하고 이렇게 들떠서 왕래한 것이다.“
하였다. 만년에 천문학 교수(天文學敎授)로서 서울에 있을 때에 태사성(太史星)에 무리가 지자 관상감 정(觀象監正) 이번신(李蕃臣)의 나이가 늙었으므로 자신이 이에 해당될 것이라 하니, 남사고가 웃으면서 '따로 해당될 자가 있다.' 하였다. 두어 달 후에 남사고가 과연 병들어서 죽었다. 이것은 오중(吳中)의 은사(隱士)가 죽기를 구했으나 되지 못한 것과 어떻게 다른가.
종실(宗室) 서천령(西川令)은 장기를 잘 두었다. 하루는 금강산 백전암(金剛山柏田庵)에 유람하다가 지엄화상(知嚴和尙)을 만났다. 텅 빈 방에 아무것도 없고, 장기 주머니가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영(令)이 묻기를,
"화상은 장기를 잘 두시오?“
하니,
"30년 전에 두어보았소“
하였다. 영이 곧 가져다가 대국(對局)했는데 한쪽 포(包)가 없었다. 괴이해서 물으니,
"노승(老僧)은 평생에 포를 하나만 썼소.“
하였다. 영이,
"나는 전국에서 첫째가는 솜씨요. 남들은 대국하지도 못하는데 그대가 하나를 떼고자 하오?"
하자,
"시험 삼아 해봅시다.“
하였다. 세 판을 상대했으나 번번이 지자 화상이 웃으며 장기를 치우고 다시 두지 않았다. 영은 탄복하면서 갔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자는 예 문희(倪文僖_문희는 예겸(倪謙)의 시호)로부터, 진즙희(陳緝熙)ㆍ동규봉(董圭峯_규봉은 동월(董越)의 호)ㆍ당자양(唐紫陽) 등으로서 모두 한 시대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입각(入閣)하지 못한 까닭으로 한림(翰林)으로서 사신으로 내정되면 문득 회피하려 하였다.
정묘년(명종 22, 1567)에 목종(穆宗)이 등극하고 우리나라에 조서(詔書)를 반포하게 되었다. 당초에 시강(侍講) 정사미(丁士美)를 사신으로 삼았으나 병으로 체대(遞代)되고, 병록(屛麓) 범응기(范應期)를 대신 임명했으나 역시 회피하였다. 그때에 각로(閣老) 허국(許國)이 마침 검토(檢討)로 있었는데 자진해서 가기를 청했고, 사신의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돌아갔다.
그 후에 정(丁)은 시랑이 되었다가 일찍 죽었고, 범(范)은 탄핵을 당해 성서(省署)에 어물거리다가 늦게야 겨우 남좨주(南祭酒)가 되었지만, 또 권신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을 떠났다. 그런데 허공(許公)은 을유년(선조 18, 1585)에 입각(入閣)해서 벼슬이 소부(少傅)와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고, 70세까지 살았다. 이것은 하늘이 정ㆍ범 두 사람이 일부러 피한 것을 미워해서가 아닌지?
왕감주(王弇州)가 한 태사(韓太史)의 세기(世紀)에 발문(跋文)을 썼는데, '조선(朝鮮) 사람이 문장에 능하다.' 한 다음, 우리나라의 시(詩)를 중국의 선덕(宣德)ㆍ성화(成化) 시대와 비교하고, 우리나라의 글씨는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와 비교하였다. 감주의 문집(文集)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 유명한 분들이 보고, 우리나라를 깔보았다 하여 매우 치욕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와서 자세히 보니 왕공(王公)이 평론(評論)한 것은 바로 기린 것이고, 깎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원미(元美)가 일찍이 선덕시대에 있었던 양동리(楊東里)와 성화시대에 있었던 이서애(李西厓)ㆍ정황돈(程篁墩) 등 여러 사람의 작품을 당나라 경룡(景龍)시대와 비교하였다. 그런데 양씨(楊氏)ㆍ이씨를 이태백(李太白)ㆍ두자미(杜子美)와 비교하면서 우리나라 시를 경룡시대와 비교했으니, 이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원미가 또 글씨를 평하면서 두 왕씨[二王氏_왕희지와 왕헌지를 가리킴] 이후에는 다만 조송설(趙松雪)이 있을 뿐이고, 구양순(歐陽詢)ㆍ저수량(褚遂良)ㆍ우세남(虞世南)ㆍ안진경(顔眞卿)ㆍ채양(蔡襄)ㆍ미불(米芾)은 모두 그 다음이라 하였다. 그런데 석봉(石峯)의 글씨를 자앙(子昂_조맹부의 자)과 비교했으니 또한 족하다. 잠깐 보고서 분하게 여겼으니 참으로 한바탕 웃어도 부족하다.
급사(給事) 서관란(徐觀灡)이 가장 글씨에 능하였다. 동국에 온 장관(將官)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로 된 족자를 입수하고는, 그것을 자앙(子昂)의 친필이라 하면서 급사에게 바쳤다. 급사는 나를 불러서 이것이 어떤 사람의 글씨인가를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장헌왕(莊憲王_세종의 시호)의 아들 안평대군 용(瑢)의 글씨요.“
하니, 급사는,
"나는 참으로 자앙의 글씨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세상에 어찌 이렇게도 신묘(神妙)한 글씨가 있는가.“
하였다. 하루는 석봉에게 글씨를 요구하므로 석봉이 옛사람의 글씨를 본떠 열 폭을 만들어서 바쳤다. 급사가 분간하면서,
"이것은 장지(張芝), 이것은 우군 대령(右軍大令_왕희지(王羲之), 이것은 저하남(褚河南_저수량), 이것은 구솔경(歐率更_구양순)과 지영(智永), 이것은 안노공(顔魯公_노공은 안진경의 봉호), 이것은 미남궁(米南宮_미불)ㆍ조송설(趙松雪_조맹부)의 체이다.“
하였다. 마지막 한 폭은 김생(金生)의 글씨를 본뜬 것이었는데, 급사가 이르기를,
"이것은 옛 법은 아니나, 또한 굳세고 아름다워서 사랑스럽다.“
하였다. 석봉이 깊이 탄복하였다.
서 급사가 일찍이 먹 한 장을 나에게 주면서,
"이것은 금국(金國) 장종(章宗)이 만든 것이오,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가져다가 갈아보니 빛깔은 정흑색(正黑色)이면서 조금 엉기었고, 향기가 아직도 대단하다. 무술년(선조 31, 1598) 겨울부터 쓰기 시작해서 지금 13년이 되었으나 다만 한 글자만큼 갈렸을 뿐이니 참으로 기이한 물품이다.
감주(弇州)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성(宣城) 제갈씨(諸葛氏)가 만든 붓은 아주 정밀해서 종일 써도 닳지 않는다."
하였다. 주 태사(朱太史)가 나에게 다섯 자루를 주었는데, 토끼털은 강하여 쉽게 마르고, 양털은 부드러워 쉽게 꺾이어서 모두 우리나라 황모(黃毛) 붓만은 못하였다.
주 태사(朱太史_주지번을 가리킴)가 나의 붓을 써보고는,
"5일 동안을 썼는데도 닳지 않으니 이것이 천하에 제일가는 붓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붓을 수천 자루나 구하여 갔다. 또한 우리나라 종이를 좋아해서 아주 엷은 것을 많이 가려 가지며,
"이것은 탑본(搨本)이나 모본(摹本)하기 좋다.“
하였다.
중형(仲兄)이 일찍이 말하기를,
"황ㆍ왕(黃王) 두 조사(詔使)는 몸가짐이 아주 엄정하였다. 주상이 지필묵(紙筆墨)을 주었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하루는 대내(大內)에 보관중인 왜국(倭國) 닥종이로 박은 《이백집(李白集)》과 《두시(杜詩)》 한 질씩을 나누어 주었는데, 채양(蔡陽)은 펴보고는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사람을 보내서 부사(副使)도 받아 들였는가를 물어보고는 되돌려 주었다고 하자 자기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 이런 사람을 어디서 다시 보겠는가.”
하였다.
근세(近世)에 나온 조사(詔使) 중에 유독 웅대행(熊大行)을 일컫지만 그 사람도 서책(書冊)이나 종이ㆍ붓은 받아갔다 한다.
이오봉(李五峯_오봉은 이호민(李好閔)의 호)은 고(顧)ㆍ최(崔) 두 조사를 접대하면서, 물품을 요구해 오는 데에 고통을 겪었고, 유서경(柳西坰_서경은 유근(柳根)의 호)은 주(朱)ㆍ양(梁)을 접대하면서 시부(詩賦)를 창수(唱酬)하느라 고통을 겪었다. 여장(汝章_권필(權韠)의 자)이 말하기를,
"오봉은 몸이 고달팠고, 서경은 마음이 고달팠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 하였다.
역관(譯官) 이화종(李和宗)이 소싯적에 지정(止亭)ㆍ음애(陰厓_이자(李耔)의 호)를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 그런데 마침 무종(武宗)이 남방(南方)을 순행 중이므로 화종은 역말을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갔다가 남경(南京)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우(高郵) 물가에 이르러 말이 지쳤으므로 앉아 쉬고 있었는데 모래 속에 삐죽이 나온 뼈가 있었다. 그래서 파내보니, 여섯 마디인데 꾸불꾸불하고 눈같이 희었다. 실없이 짐 속에 챙겨가지고 북경에 도착하니 장사꾼이 물건들을 벌여 놓고 값을 논란하고 있었다. 화종은 그 뼈를 꺼내어 자랑하며 속였다. 한 장사꾼이 보더니 절하면서,
"이것은 뿔없는 용의 등뼈인데 큰 구슬 여섯 개가 들어 있으니 참으로 값을 정할 수 없는 보배입니다.“
하였다. 급히 톱질해 보니 과연 복숭아씨만큼 큰 구슬 여섯 개가 나오는 것이었다. 곧 천 냥 값에 해당하는 비단을 주고 바꿔갔다. 화종은 '이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니 어찌 내가 독차지할 수 있느냐.' 하고, 그 비단을 죄다 나누었는데 상통사(上通事)에서 노복(奴僕)까지 고루 주었다. 양공(兩公)도 아름답게 여기고 시를 지어서 칭찬하였다.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의 조부는 우리나라 이산(理山) 지역 독로강(禿魯江)가에 살다가 살인사건으로 해서 부부가 철령위(鐵嶺衛)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부친은 변경을 수어(守禦)한 공이 있어, 유격(遊擊)이 되었고, 성량은 음직(蔭職)으로 지휘(指揮)가 되었다. 소싯적에 오랑캐를 공격해서 포획한 것이 많았으므로 험산보 참장(險山堡參將)으로 기용되었다.
허영양(許穎陽)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압록강 가에까지 전송하면서 법으로 정해 놓은 호위 군사의 수효를 줄이고, 그럼으로써 남게 되는 말을 사유(私有)로 하였다. 허공(許公)이 탄핵할 참인데, 성량이 역관(譯官) 곽지원(郭之元)에게 주선[居間]하도록 청해서 면하게 되었다.
그 후 두어 해가 못 되어서 공을 세우고, 총병(摠兵)이 되어 지역을 천 리나 개척해서 다섯 곳에 보(堡)를 세웠다. 백(伯)으로 봉함을 받았고, 아들과 사위 중에 고관으로 된 자가 수십 명이었다. 이들의 위세가 동쪽 지역을 덮어 거의 사십 년이나 부귀와 영화를 누려 근래에는 겨룰 데가 없었다.
지원이 일찍이 북경(北京)에 왕래할 때마다 성량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고, 이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한다.
우리집 성씨(姓氏)는 가락국 왕비(駕洛國王妃)로부터 얻었으니 거의 칠백 년이나 되었다.
고려 초에 들어와서 시조(始祖)의 채읍(采邑)이 양천(陽川)이었으므로 드디어 여기에다 호적을 붙였던 것이었다. 고려조 오백 년을 마칠 때까지 과거에 연달아 올라서 높은 벼슬을 하였다. 정승이 된 사람이 열한 분이고, 추부(樞府)에 들어간 사람이 여섯이다. 학사(學士)가 아홉이고, 공주(公主)와 결혼한 사람이 다섯이다.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벼슬한 사람이 둘이고 봉군(封君)된 사람이 열 넷인데, 대(代)마다 문장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조금 쇠퇴해져서, 정승이 세 사람, 찬성(贊成)이 두 사람이고, 육조의 경(卿)이 넷이다. 공신(功臣)이 세 사람, 학사가 열둘이다. 그런데 충정공(忠貞公) 형제와 지사(知事) 집(輯)과 찬성(贊成) 자(磁)ㆍ선인(先人) 초당 선생(草堂先生)을 최고로 일컫는다. 근래에 유수(留守) 허잠(許潛)이 청백리(淸白吏)로 되었는데, 역시 선조[前烈]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유격(遊擊) 허국위(許國威)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나를 보고 기뻐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허태악(許太嶽)의 윤군(胤君)을 나와 같은 성씨이다 하니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여긴다. 그러나 가락국 왕비가 다른 나라에서 배를 타고 나왔다는 것인즉, 그분은 중국 사악(四嶽)의 후손으로서, 왕국의 딸이라 핑계하고 혼인을 이루었던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는데, 유격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우리 선대(先代)는 야당(野堂) 선생 뒤로는 두 대를 연달아서 과거에 오른 분이 없다. 그러다가 우리 고조(高祖) 때에 와서 형제분이 과거에 뽑혔으나 계씨(季氏)분은 겨우 사간(司諫)이었고, 고조께서는 벼슬하지 못하고 일찍 작고(作故)하였다. 사간의 아들 집(輯)은 벼슬이 지사(知事)였고 문장으로 명망이 있었다.
우리 증조(曾祖)는 과거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으며, 위(渭)는 지평(持平)이고, 온(溫)은 승지였다. 조부는 문장에 능했으나 일찍 작고했고, 선대부 때에 와서 비로소 드러났다. 나의 삼형제가 함께 문과(文科)에 올랐는데, 백형(伯兄)은 육경이고, 중형(仲兄)은 학사이며, 나도 당상관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백형의 아들 실(實)이 문과에 올라, 정언(正言)이 되었고, 여러 조카도 모두 청일(淸逸)하며 문명(文名)이 있다.
이것은 모두 선조(先祖)께서 공덕을 쌓으신 효과인데, 대개 오랠수록 더욱 나타난 것이었다.
우리 선대부의 문장과 학문과 절행(節行)은 사림(士林)에서 추중(推重)되었다. 큰 형이 경전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작은 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고고(高孤)해서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욱 맑으면서 씩씩하고. 높으면서 아름다워 개원(開元_당(唐) 현종(玄宗)의 연호)ㆍ대력(大曆_당(唐) 대종(代宗)의 연호)시대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는 명망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서 천신사부(薦紳士夫)가 모두 칭찬한다. 재종형(再從兄) 체씨(䙗氏)는 고문(古文)을 공부해서 시격(詩格)이 매우 높고 굳세며 부(賦)는 더욱 뛰어나서 국조 이래로 그 짝이 드물다. 나도 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문예(文藝)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참여되고, 중국 사람에게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4부자(四父子)가 함께 제고(製誥)를 맡았다. 선대부께서 작고하자, 형이 또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되었으며, 3형제가 모두 사필(史筆)을 잡기도 했다. 작은형과 나는 같이 과거에 장원했고, 나는 또 세 번이나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시에 문헌(文獻)하는 집으로서는 반드시 우리 가문(家門)을 첫째로 꼽았다.
옛적에 유효작(劉孝綽) 일가에 부자와 자매가 함께 문장에 능했는데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기를,
"허ㆍ사(許史)의 부귀와 왕ㆍ사(王謝)의 영화로움도 모두 우리 집 문헌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였는데, 나도 그렇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