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8일 일요일
차녀힙합
내 형제는 여섯 명이다. 여자 셋, 남자 셋. 순서도 여자 남자, 여자 남자, 여자 남자로 세 살 두살 터울이다. 나와 내 바로 밑 남동생은 딸로서 둘째고, 아들로서 둘째다. 언니와 오빠는 첫째라고 주목받고 마지막 여자동생과 남동생은 막내라고 예쁨 받았다. 차녀와 차남으로서 알게 모르게 고난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언니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언니의 말이라면 다들 꼼짝않고 따랐다. 다만 장남인 오빠만 언니에게 대들고 싸우곤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동네 애들에게 폭행을 당할 때 언니가 나서서 애들을 진압했다. 나는 고무줄을 잡고 울기에 바빴다. 그리고 딱지 때문에 언니에게 대들었던 차남은 언니와 싸우고 언니에게 대들었다고 아버지께 엄청 맞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와 차남은 조용하고 일 잘하는 효녀 효자가 되었다. 청소년 때 내가 언니에게 "언니 너 주제를 알아라" 고 퍼부었던 적이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때 이후 나는 언니께 어떠한 말도 먼저 꺼내지 않고 눈치부터 살핀다. 먼저 나를 내세우지 않던 내가 반란을 일으키는 나쁜 기억이다. 옷이건 신발이건 물려만 받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말없이 해야했던 차녀의 슬픈 현실이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서, 솔직히 언니를 상대로 넋두리를 한 것일 것이다.
장녀와 장남은 자기들이 계획한 미래 일들을 하면서 자질구레한 집안일은 차녀와 차남에게 떠넘겼다. 일을 잘하는 언니는 지금도 집안 일을 진두지휘하고 차남은 말없이 시킨대로 돕는다. 클 때부터도 집안 일에는 손을 놓았던 장남은 탱자탱자 일이 되어가는 걸 구경만 하였다.
나는 몸이 약하여 냅다 공부만 했다. 그게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차남인 남동생은 떡대같은 덩치로 아버지를 도와 밭일, 뱃일을 도왔다. 우리 둘이 부모님과 함께 오래 살았다. 나는 대학 때도 통학을 하고 스물 여덟까지 (결혼전까지) 부모님 곁을 지켰다. 차남 남동생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혼자 된 아버지를 모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펴 드렸다.
지금도 언니의 카리스마는 여전하지만 그 강도가 약해졌다. 장남인 오빠도 친정 일에 발벗고 도와주고 있다.
나는 원래 말이 없고 형제들이 힘주어 말하면 "그래~?" 그런가 보다 받아들인다. 특히 막내들은 나를 어린 동생 대하듯 살펴주고 내게 힘을 주려고 애를 쓴다. 고맙고 감사한 일~ 어려서부터 몸이 건강하지 못하여 동생들한테 보살핌을 받았는데 지금까지 계속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용돈을 아껴 돈으로 보답한다. 차남인 남동생은 남편과 아들이 없을 때 나의 보호자였다. 내가 저혈당에 빠졌을 때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고, 췌장염에 걸렸을 때 새벽에 차에 실어 응급실에 입원 시켰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바로 그래
이것이 차녀, 차남의 의식이구나!"
하고 공감하였다. 기억에는 별로 없었던 내 추억도 차녀라서 발생했구나 하고 공감하였다.
작가 이진송의 솔직한 마음을 자세히 그리고 차녀로서 삶을 받아들이기까지 열심히 살아왔던 인생 제 1막을 정리한다.
* 20 쪽 ㅡ 차녀는 집 안팎에서 무수한 신호를 수신한다. 너는 이집에서 '두번째고, 아들이 아니라서 네 의지와 무관하게 여러 영역에 걸쳐 '잉여' 로 해석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말석을배당받을 가라는 메시지, 순서로도 성별로도 두번째인 차녀는 덜 취급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작은 차이에도 민감하다. 당연하게 제 몫이 보장되는 첫째와 달리, 끊이없이 남의 그릇을 힐끗거린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러한 감정은 첫째의 부담감이나 책임감과는 또다른 형태로 발현된다.
* 아들이 둘인 집에서 둘째가 하는 '딸"
노릇이란, 부모에게 다정다감하고 연락을 자주 하며 구성원 사이의 갈등이 생겼을 때 현명하게 조율하는 일을 도맡는다는 뜻이다. 아들이 두명 이상일 때 최초의 한 명 빼고는 잉여로 취급하면서 어른들의 편의를 위해 적당히 남성성을 덜어내고 상냥하게 굴길 바라는 인식은 영 찜찡하다. 결국 첫째 딸에게는 여성성 샤워를 시키고 장남에게는 남자답기를 강요하고, 차남에게는 딸처럼 굴기를 바라는 모델이 비슷비슷한 맥락 속에 있다.
* 181 쪽 ㅡ언니가 이기적이라거나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내 눈에는 언니가 대단해 보였다. 나였다면 말하지 않고 참았을 테니까. 빵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을 손가롹으로 가리키는 언니의 태도에는 당위성과 근본적인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언니의 태도에는 당위성과 근본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왜 청승을 떠냐고, 누군가는 쉽게 타박할 수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 청승이 맞다. 그깟 식사 한 번 원하는 대로 한 게 뭐가 장녀의 특권이냐고 언니가 불을 뽑으면 조용히 내 머리채를 상납하여 활활 타오를 준비도 되어 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다. 언제나 한발 떨어져서 내가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는지, 얼마나 가져도 되는지 가늠하고, 나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번거롭거나 귀찮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성격, 눈치보거나 기죽지 않고 타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느끼는 선망과 질투, 그게 바로 빈 언니와 나의 고통점이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걸 '차녀병' 이라고 불렀다.
* 우리집은 장남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이 심했다. 오빠가 광주에서 대학 다닐 때 자취를 했는데, 엄마가 고추장에 소고기를 갈아 볶아 싸 주었다. 나는 육고기를 안 먹어 한 숟가락도 먹을 수 없었지만, 그게 엄청 부러웠다. 고구마를 캘 때 이웃에게 조금씩 나눠줄 때도 오빠는 친구들과 뛰어놀았다. 힘이 부족한 내가 고구마를 이고 날랐다. 그때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 휴휴 내가 겪어야 했던 나쁜 것만 기억이 뚜렸하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내가 그럴 듯 하게 살게 된 것도 엄마 아버지의 큰 차별없는 육아 방식이었던 것 같다. '우리딸' 이라고 등을 두드려주시고, 꼭 시집을 내게 될 거라고 먼 친척들에게 호언장담 하신 아버지!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대학 등록금을 챙겨주신 어머니의 통큰 의식이 나를 만들었다. 지금은 두분 다 천국에서 편하게 영성생활 하고 계시지만, 지금도 생생히 내 곁에 살아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