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澳門) (영)Macao
중국 광동성 중산현(廣東省 中山縣) 남동부 주강(珠江) 삼각주에 자리잡고 있는 포르투칼의 자치령. 중국 본토의 광동성으로부터 돌출한 작고 좁은 반도로 형성되어 있으며 타이피(Taipa)·콜로아네(Coloane) 섬을 포함한 총 면적은 16.42㎢이고, 인구는 39만 명(1993)이다.
이 중 대부분이 중국인이며, 언어는 중국어·포르투칼어·영어 등이 혼용되고 있다.
1513년 포르투칼 범선이 주강 어귀에 처음으로 닻을 내린 이래 마카오를 왕래하던 포르투칼인들은 1553년 대(對) 중국 무역권을 획득하고 1557년에 중국·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마카오를 잇는 동양 무역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1841년 아편 전쟁으로 영국이 홍콩의 식민지를 개설하자, 포르투칼은 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1849년 마카오의 중국 세관을 폐지하고 마카오를 자유항으로 선포하였다.
그 후 1887년 마카오 반도 전역과 타이파·콜로아네 두 섬을 점령하고, 중국과 조약을 맺어 이 지역의 식민지 건설을 합법화하였으며, 1951년에는 포르투칼 헌법을 개정하여 식민지가 아닌 해외주(海外州)로서 마카오를 본국의 일부로 편입하였다.
1976년 해외주에서 자치령으로 바뀐 마카오는, 1987년 포르투칼과 중국이 맺은 협정에 따라 1999년 12월 중국으로 반환될 예정이다.
[극동 선교와 마카오] 포르투칼 보호권(padroado) 아래 가톨릭의 극동 지역 선교 전초 기지로 이용된 마카오에 선교 단체 중 가장 먼저 진출한 예수회는, 1565년 이곳에 본부를 두고 성 바오로 신학교와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자를 양성하였다.
이와 함께 예수회 순찰사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이곳을 중심으로 극동 각지를 순회하며 선교 업무를 관장함으로써 마카오는 예수회의 일본 및 중국 선교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지역 선교를 담당하던 대표부가 1732년 광동에서 이곳으로 이전됨에 따라 마카오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졌다.
포르투칼 보호권 아래에 있던 마카오 교구는 1576년 1월 23일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말라카(Malacca) 교구로부터 분리 독립되었는데, 1588년 일본, 그리고 1690년에 남경 및 북경 교구가 생기고, 1698년에 중국 및 몇몇 대목구가 설립될 때까지 중국·일본·몰루카 제도 등 광대한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러나 포르투칼은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간섭으로 자주 교황청과 마찰을 일으켰고, 1762년에는 포르투칼의 수상 폼발(Pombal)이 예수회를마카오에서 추방함에 따라 예수회는 중국 선교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특히 포르투칼은 그 세력이 쇠퇴함에 따라 중국과 조선 등지에서 보호권을 이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포교성성과 파리 외방전교회가 중국과 조선에 관여하는 것을 보호권의 침해라는 구실로 방해하기도 하였다.
보호권을 둘러싼 이러한 갈등은 185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결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는 포르투칼의 간섭을 피하고 중국 및 그 이웃나라들과의 연락도 좀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1847년 홍콩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마카오 교구의 관할권은 1857년 티모르(Timor), 말라카, 싱가포르까지 확대된 반면, 중국 본토에서는 광동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1903년에는 해남(海南) 섬에 대한 마카오 교구의 관할권이 광주(廣州)교구로 옮겨졌고, 1940년에는 교황청과 포르투칼 사이의 선교 협약에 따라 티모르도 분리되었다. 마카오 교구는 1923년 이래 중국 사절 관구(管區)에 속해 있었다.
1995년 현재 가톨릭 신자 수는 2만 2,000명이며, 교구 1, 본당 9개에, 주교 1, 사제 69(교구 31, 수도회 38), 수사 9, 수녀 176명이 있다. 주요 유적지로는 1602년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 성 바오로 신학교 근처에 세워진 성 바오로 성당과 18세기에 세워진 성 요셉 수도원이 있다.
성 바오로 성당은 1835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건물 정면의 벽화와 계단 벽의 일부만 남아 있으며, 성 요셉 수도원은 20세기에 와서 복원된 것이다.
[한국과의 관계] 마카오와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 교회의 관할권과 수자 사라비아(Souza Saraiva) 주교이다.
1792년 북경 주교에게 위임된 조선 교회의 관할권은 1808년 구베아(Gouvea) 주교가 사망한 이후에 후임자에게 이어졌는데, 계승자가 바로 수자 사라비아 주교였다.
그러나 그는 1818년 사망할 때까지 북경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카오에서 거주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조선 교우들이 1811년에 쓴 2통의 편지를 받고 이 편지를 포르투칼어로 번역하여 교황청으로 보냈다.
또 1871년에는 2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병으로 인해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함께1825년경에 쓰여진 조선 교우들의 청원서도 북경을 거쳐 마카오에 전달되었다.
당시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대표부 부대표 옴피에레스(Umpierres) 신부는 1826년에 이것을 라틴어로 번역해 교황청으로 보냈으며, 이 청원서는 조선교구 설정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한편 마카오는 조선으로 입국하려는 선교사들의 경유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31년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蘇) 주교를 비롯하여 이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거의 모든 성직자들이 마카오를 경유하여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특히 1835년 이곳을 거쳐 조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 羅) 신부는 이듬해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등을 박해로 인해 조선에서 교육시킬 수 없었으므로 마카오로 보냈는데 1837년 6월에 도착한 이들은 1842년까지 6년 간 이곳의 임시 조선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 중 최방제는 1837년 11월에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이외에 조선교구 3대 교구장 페레올(高) 주교는, 1840년 1월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는 1840년 9월 마카오에 도착하여 임지를 기다리는 동안 조선 신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1844년 9월에 마카오에 도착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도 페레올 주교를 만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마카오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및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1847년 홍콩으로 이전되면서 소원해졌다.
현재 마카오 시내의 카모에스 공원 안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에서 1985년 10월 4일에 건립한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에 세워져 있다.
출처:[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