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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94회. '천재시인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 이었다' (2000.11.25.)
94회 : 천재시인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 이었다
천재시인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 이었다
방송일: 20001125 조회수 : 1745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 스페셜 제 94회] 윤한용 PD , 권기경 작가
"천재시인 최치원은 조기유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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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풀샷 줌인 6 (2-3초 후 ) 지난 10월 16일,
마중가 2 중국 남경시 율수현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동상에 씌운 붉은 천 2
지켜보는 사람들 5 먼 옛날 이곳 율수에서 벼슬을 지낸 한 외국인
천 걷고 7 의 동상 제막식이었다.
동상의 주인공은 신라인 최치원.
최치원상 글씨 2 (보고)
얼굴 8 1100년이 지난 오늘, 중국은 왜 최치원을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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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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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오프닝]
(기본 세트에서 최치원의 각종 초상화 쭉 걸려 있다)
지금 여기에는 전국각지의 사당에서 수집한 20여종의 영정이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모두 다른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영정의 주인공은 한 사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신라인, 최치원입니다.
(특징적인 세 개의 초상화 보여주고)
이 영정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요.
이 영정의 최치원은 유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름 낀 산을 배경으로 한 이 모습은 마치 신선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이모습은 무척 엄격한 관리로 보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인물 중 영정이 가장 많은 이가 바로 최치원입니다.
후대인들은 이렇게 최치원을 유학자나 관리, 심지어 신선으로까지 생각하며 그를 추앙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東方學者 皆以爲宗)
고려시대의 문장가 이규보는
'우리 나라 학자들은 모두 최치원을 조종으로 생각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유학자들은 최치원울 유학의 시조로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 나라에서 최치원은 그야말로 대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최치원이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성공한 유학생으로 꼽히는 있다는 점입
니다.
최치원은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을 간 조기유학생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의 유학생활은 어떠했을까요?
또 유학생 최치원은 중국에서 어떻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전설 속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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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율수 부감 팬 12 (4-5초 후)
중국 남경시 율수현은
인구 40만의 작은 도시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
거리 사람들 5 한 유서 깊은 곳이다
율수라는 간판 2 (보고)
당탑 틸업 10 율수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영수탑.
당나라 시대 원형을 복원한 거대한 7층탑이다.
영수탑 2 (보고)
탑 내부로 올라가고 6 탑 내부는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개되
피디일행 팬 영정 12 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탑의 2층에서 낯익은
초상화를 만날 수 있었다. (2-3 초 후)
최치원이었다.
일행 틸업 족자 5 초상화와 함께 최치원의 시가 전시되어 있는 이족자 타이트 5 곳은 일명 최치원실이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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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탑 풀 4 현재 영수탑 주변엔 박물관 건설공사가 한창 진
공사목재 2 행되고 있다.
공사장 팬 당탑 11 율수현은 이 박물관에 소중한 역사유물과 몇 몇 인물에 관련된 유물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INT)-----------------------------------
모록근 인터뷰 이 박물관은 건축면적 2천여 평방미터고 복도에는 대략 150여 개의 시비를 세울 예정이다.
그 중에서 50개는 최치원의 시비로 꾸밀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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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줌인 10 (3-4 초 후)
율수현의 한 기념품기게에서도 최치원을 만날 수
여행사 외경 4 있었다
점원 계원필경 꺼내고 10 (2-3 초 후)
점원이 율수현의 기념품으로 내놓은 것은 최치원의 저서 계원필경이었다.
동상 가져오고 6 (3- 4 초후)
최치원과 관련된 기념품은 책과 동상등을 포함해
동상타이트 팬 영정 6 대 여섯 가지가 넘는다.
(INT)-----------------------------------
점원 인터뷰 최치원은 이곳의 현위를 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 물건을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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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동상보고 있고 3 (보고)
동상 얼굴 3 최근 통제가 거리에 세워진 최치원 동상은 그가 율수현위 신라인 글씨 8 신라인으로서 율수현위를
지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INT)-----------------------------------
모록근 인터뷰 고증에 따르면 이곳이 옛 율수 관아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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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가 교수 말하고 9 율수현위는 종9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주로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다고 한다.
동상 줌인 14 (3-4 초 후)
최치원이 율수현위가 된 것은 스무살,약관의 신라 젊은이가 중국의 관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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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7 (3-4 초 후)
율수현위 시절 최치원의 행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집 팬 골목 6 인근에 있는 고순현 이가촌 마을,
닭 2 (보고)
피디일행 들어가고 16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토박이들이다.
취재팀은 마을 노인들을 만나보았다
(INT)-----------------------------------
노인 인터뷰 최치원은 신라에서 왔고 율수현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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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인터뷰 나도 이런 얘기를 열살 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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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 일행 풀샷 3 마을 노인들은 취재팀에게 최치원과 관련된 아주
노인들 팬 6 오랜 전설을 들려주었다.
길 팬 우산쓴 일행 8 (2-3 초 후)
마을에서 20여분 떨어진 곳에 그 전설의 현장이
시나리오 작가 앞장서고 6 있다고 한다.
(보고)
쌍녀분 비석 4 쌍녀분 ,두 여인의 무덤임을 말해주는 비석 뒤로
묘지 줌인 8 잡초 우거진 두개의 무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보고)
묘문에 걸린 천 8 최치원의 전설이 내려오는 이 쌍녀분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겐 신령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왔다
촛대 3
(INT)----------------------------------------
복양강경 인터뷰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병이 나면 집에서 쌍녀분의 두 소녀에게 빌었는데 병이 나으면 이곳에
와서 붉은 색과 녹색천을 걸었다. 이런 일이 많아지면서 무덤 앞에는 저렇게 많은 천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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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12 (6초 후 사람들 보이고)
쌍녀분
복양 강경 말하고 4 고순현 문화재 관리소장인 복양강경씨,
쌍녀분 현장조사도 10 쌍녀분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그는 중국의 여러 역사기록에 쌍녀분
이야기가
사진과 책 3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다.
6조사적편류표지 3 송나라 역사서인 6조사적편류도 그 중의 하나.
목차 줌인 쌍녀묘 7 쌍녀분 전설은 그렇듯 1100년 동안 대대로 전해져온 내려온 것이다.
(INT)----------------------------------------
복양강경인터뷰 당00종 2년 계림인 학자 최치원이 율수현위로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공무 때문에 초현관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때 초현관 앞에 커다란 묘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더니 두 소녀가 묻혀 있다고 했다. 당시 최치원은 젊었기 때문에 직접 묘지 앞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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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녀분 5 쌍녀분의 주인공은 강제결혼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씨 자매,
버들강아지 4 두 자매의 운명을 슬퍼하며 최치원은 위로의 시
강물 4 를 바친다. 이 시를 보고 감동한 두 소녀가 그
강물 팬 무덤 11 날 밤 최치원을 찾아와 즐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새벽이 되자 두 소녀는 최치원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무덤으로 돌아간다.
비석 틸다운 8 이것이 중국인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오는 쌍녀분과 최치원의 전설이다.
강물 팬 쌍녀분 8 1100년 전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 사랑의 전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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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기본세트에 당탑 배경)
중국의 전설 쌍녀분기의 주인공은 최치원입니다.
이 쌍녀분기는 당나라 시대 이후 송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의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전설인데요.
그런데 최치원이 지은 글 중에 이 전설과 똑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최치원이 중국에 있을 때 실제로 있었던 러브스토리를 소설로 썼는데 그 소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의 전설로 내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쌍녀분기에 의하면 당시 최치원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로서 중국 율수현의 관리였습니다.
신라사람이, 그것도 아주 젊은 나이에 중국의 관리가 됐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의 유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유학생이 아니었습니다.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간 요즘으로 치면 조기유학생이었던 것입니다.
12살, 최치원은 왜 이렇게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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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최치원은 조기 유학생이었다]
길 트래킹 8 (3-4초)
최치원이 유학을 떠냔 배경을 알아보기로 했다
서악서원 6 경주 서악서원
최치원 위패 3 이곳은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후손, 유립들 절하고 3 (보고)
족보 15 현재까지 최치원의 가정환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경주최씨 대동보에도 최치원은
24세손으로 관직명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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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성 인터뷰 최치원의 집안은 6두품 집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의 아버님은 견일이라고 해서
승복사 비문을 보면 승복사 비를 세울 때 관여했다는 것이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말단 관리를 역임하지
않았나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동복형으로써 현준이란 분이 있는데 이 현준은 해인사에 계시면서 당시
화엄고승으로 대단히 유명한 사람입니다. 한 집안에서 유학자와 고승이 동시에 나올 수 있다고 하는 것
이바로 6두품 집안의 하나의 특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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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8 (3-4초 후)
그렇다면 6두품과 유학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성주사지팬 13 (2-3초 후)
충남 보령시 성주사지
한때 이곳은 승려가 3천여명에 이를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피디 +교수 비석보고 6 이곳에 최치원이 직접 지은 비문이 있다.
낭혜화상비 6 대낭혜화상 무염국사비. 높이 4.5미터의 신라최
기단 2 대의 비석이다.
손으로 가리키고 6 최치원이 지은 5천 여자의 비문속에 신분에 관
득난 나오고 10 한 주목할 만한 글귀가 있다 . 득난, 얻기 어려운 지위를 뜻하는 이것은 6두품을 가리킨다.
C/G 15 하지만 골품제사회인 신라에서 6두품은 신분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아무리 그 능력이 뛰어나도
아찬 이상의 벼슬엔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INT)----------------------------------------
최영성 인터뷰 6두품은 비록 성골과 진골 다음가는 계급이었지만 신라의 학문과 사상 면에서 아주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계급이었죠. 그런데 사실 6두품 계급은 그 계급의 한계성 때문에 사실 경륜을 펼 수가 없었
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그런 포부를 펴기 위해서 당나라 유학이란 방법을 택하게 되죠.
당나라에서 과거에 빈공과에 급제했다고 하는 그런 권위로써 우리 나라에 돌아와서 자신들의 경륜을 펼려고
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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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회요] 12 837년 한해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독서당 21 (4-5초 후)
유학경전들 그런데 최치원이 유학을 떠난 나이는 12살.
이른바, 조기 유학인 셈이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난데는 6두품의 신분한계를 극복하려는 아버지의
절실한 바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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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신 인터뷰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밖에 안됐습니다. 지금은 전화도 되고 온라인도 되기 때문에 계속
연락을 하면서 돈을 보낼 수 있지만은 당시로서는 한번 유학을 가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연락이 안됐을 것
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12살짜리 아들을 단독으로 유학보냈다고 하는 것은 최치원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도 그 다음에 둘째는 그 아버지가 자식이 출세하기 바라는 그런 원망도 상당히 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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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달리고 3 (보고)
팬 바다 7 택리지에 의하면 최치원은 전남 영암에서 김가기 최승우와 함께 상선을 탔다고 한다
바다 7 12살의 어린나이에 머나먼 중국땅으로 유학을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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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별도세트 -바다 +배 위에서)
보통 신라의 유학생들이 당나라로 건너갔던 시기는 북서풍이 부는 10월부터 2월까지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맘 때 신라의 학생들이 한창 유학 길에 오르고 있었을텐데요.
신라에서 당나라까지는 2천리, 배를 타고 3-4일이 걸리는 먼 길입니다.
더구나 가다가 풍랑이라도 만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12살밖에 안된 어린 최치원은 혼자 배를 타고 중국으로 떠납니다.
12살은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한창 부모의 품에서 보호를 받고 자랄 나이입니다.
이런 어린 아들을 먼 이국 땅으로 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글씨 뜨고 )
(十年不悌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조)
"십 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기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아라. 가서 공부에 힘을 다하여라"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할 정도로 최치원의 아버지는 오직 아들의 성공만을
바랬습니다. 그야말로 맹렬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어떤 심정으로 유학을 떠났을까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떠난 것일까요?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최치원도 당나라 유학에 대한 나름대로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나라에 건너간 최치원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글씨 나오고 )
(人百己千)
인백기천....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
오늘날에 비추어도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목인데요.
최치원은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던 것입니다.
12살의 어린아이가 낯선 나라에 가서 어디서 공부하고 어떻게 적응해 나갔는지 궁금한데요
지금부터 당나라로 건너간 최치원의 유학생활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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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최치원의 유학생활은 이랬다]
장안성 트래킹 10 (2-3초 후) 당나라에 도착한 신라 유학생은 현재의 서안 즉 당시 수도인 장안으로 향했다
장안성 5 장안은 당나라의 정치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깃발 2 외국 사절과 유학생들이 몰려든 국제도시였다
성 2
길팬 국자감터 11 (3-4 초후)
당나라 시대 장안엔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있었다. 현재 그 터가 남아 있는데
지도보는 일행 3 당시 국자감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지도 3
(INT)---------------------------------------
호극교수 인터뷰 당나라때 국자감은 천여명 정도를 수용하는 규모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당태종때 숙소를
1200개나 지었는데 학생을 8천명이나 되었다.
본래 중국 학생이 3천명이었으나 나중에 고구려 신라 백제 토욕흔 투르판 등에서 학생이 많이 와서 8천명이다
되었다. 당시 유학생들은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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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팬 신당서 7 외국에서온 유학생은 국자감에서 수학했는데
자막 나오고 7 신당서에 의하면 한때 그 숫자가 8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INT)-----------------------------------
호극 인터뷰 당시 국자감의 입학연령은 14세에서 19세까지 였다. 그러나 어떤 과목은 21세에서 25세까지로
늦춰주기도 했다. 최치원은 12살에 이곳에 왔다. 그러면 (입학전) 2년간 무엇을 했을까.
아마도 소학에서 예비수업을 받았거나 소년반에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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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 12 국자감에서 공부하는 동안 신라의 유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를 어떻게 조달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숙위학생 입조장 10 이것은 최치원이 신라에 돌아온 후 신라 유학생에 관하여 중국정부에게 보낸 글이다.
한글자막 나오고 12 최치원은 당시 국자감에 신라의 유학생들이 무척 많을뿐만 아니라 그 향학열도 높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숙위학생 입조장 13 오랜 유학기간 동안 유학생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생활비조달이므로 이를 지원해줄 것을
중국정부에 요청하고 있다
(INT)---------------------------------------
호극 인터뷰 당나라 정부는 유학생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했다 자료에는 당 중종때 국가의 재정부서에서
학생들에게 단체식사를 제공하도록 구체적으로 규정한 내용이 있다.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전통에 따라 스승에게 선물을 바쳤다. 최고기관인 국자감의 경우 비단 세필, 사립학교의 경우는 두필,
기타학교는 한필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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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 산길 7 (3-4초 후)
장안의 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선 종남산은
피디 걸어가고 2 일찍이 불교와 도교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지상사 7 특히 종남산 지상사는 신라 고승들의 자취가 남아있어 신라 유학생들이 반드시 한번쯤 들르
비석 틸업 7 는 필수 코스였다고 한다.
(INT)----------------------------------------
변인석 인터뷰 이 절에 제일 먼저 왔던 우리 나라 스님이 의상스님이 있습니다. 의상스님이 8년간 여기서
화엄을 배웠던 장소고 그 이후 승장이라든지 진감 대낭스님이 와서 공부를 했던 곳입니다.
최치원이 전기를 썼던 법장 스님, 현수 법장스님이 바로 이 절에 주지로 있었던 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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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1 훗날 최치원이 법장스님을 비롯 지상사 스님들에 대한 전기를 쓴 것으로 보아 지상사애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계곡 걸어가고 6 종남산엔 유학생활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유적이 있다.
계곡 틸업 12 (3- 4초 후)
종남산 자오곡에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이 거대한 바위가 그것이다 .
변교수 보고 3 (보고)
김가기 석각 8 바위엔 중국에서 신선으로 추앙받고 있는 김가기 전기가 새겨져 있다.
김가기 이름 5 김가기, 그는 최치원과 함께 당나라에 온 유학생
바위 팬 7 으로 그의 전기에는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자막 8 김가기가 신선이 되기 전 과거에 급제했다는 사실이었다
(INT)-----------------------------------
변인석 현장음 김가기는 본래 신라에서 태어나서 당나라에 일찍 유학와서 빈공과에 합격을 했습니다.
빈공과에 합격했지만 원체 도교를 즐겼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수행을 깊게 하고 나중에 승천을 했습니다.
외국사람으로 승천한 사람은 김가기 한사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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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팬 11 (2초 정도 후)
당시 유학생들의 목표는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었다.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최언위 시 14 없었던 고달픈 심정을 당시 한 유학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보고)
(INT)-----------------------------------
호극 인터뷰 과거 수험생은 보통 수백명이었기 때문에 합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어떤 사람은 평생 급제하지
못하기도 했다. 3년에 한번씩 치뤘는데 열번 스무번 시험을 봐도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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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과고기 넘기고 10 송나라 시대 기록인 등과고기는 역대 과거급제자들의 명단을 모아놓은 책이다.
최치원 줌인 5 이 명단에 최치원의 이름이 있었다.
책 16 최치원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전해에 신라가 발해인에게 장원급제를 빼앗긴 수치를 씻었다. 이는 최치원이 장원급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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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탑 10 (4-5초 보고)
중국 서안의 상징인 대안탑,
탑 내부 불경 15 7세기 중엽 ,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이 탑엔 1335권의 불경이
저장돼 있다.
곡강유음 그림 15 그런데 이 대안탑은 과거급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지니는 곳이다. 곡강유음이라는 행사가
바로 그것이다.
(INT)---------------------------------------
변인석 인터뷰 이 대안탑 남쪽에 한 5킬로 미터 떨어진 지점에 큰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그곳을 곡강이라
그러는데요. 그당시 과거합격자들이 모여서 관계로 나가는 사람들을 축하하는 그런 행사가 었습니다.
술도 마시고 즐깁게 배도 타고 또 시도 지어서 서로 나누고 그러한 여흥이 남아서 시내로 들어와서 이 대안탑에
다시 시작이 되어지는데 그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시를 써서 양사방에 삥 돌아가면서 시를 붙였다는 곳이
이 대안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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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탑 14 과거급제 후 율수 현위의 벼슬을 받은 최치원
그도 이 대안탑에 와서 축하행사를 즐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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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기본세트에 대안탑 배경으로 서 있고)
당시 최치원을 포함해서 유학생들의 목표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국자감의 수학기간이 9년이나
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9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치원은 중국에 건너간지 단 6년만에 장원 급제를 했습니다.
인백기천으로 노력한 결과 최치원은 이렇게 빨리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과거에 급제한다고 해서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원급제 후 최치원이 관리로 등용된 것은 그만큼 최치원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문인이자 과거급제 동기였던 고운이라는 사람이 최치원에게 준 시인데요.
(고운의 시 나오고 -산수화 액자에 시가 그려져 있는 형태)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 射跛金門策)
12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열 여덟에 문단을 휩쓸어
한 화살로 금문책을 꿰뚫었네
문장감동 중화국이라...최치원의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다는 대단한 찬사를 하고 있는데 중국인도 아니고
외국인인 최치원이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다고 한다면 그의 어학실력이나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최치원은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뛰어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유학시절 중국각지를 여행하며 시를 남겼는데 이 시는 우리 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시집에 소개될
만큼 유명했다고 합니다.
중국유학시절, 국제적인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최치원의 흔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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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피디 걸어가고 4 (보고)
부부 만나고 11 취재팀은 중국 율수현에 살고 있는 왕금옥 축리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최치원만을 소재로
그리고 있다
그림 줌 아웃 일행들 11 (4-5 초후)
왕금옥 부부는 최치원이 유학 온 시절부터 귀국
부인 2 하까지의 생애을 화폭에 담고 있다.
유학 떠나는 그림 11 이 그림은 최치원이 유학을 떠날 때 아버지가 배웅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의 말에서 줌 아웃 (보고)
(INT)----------------------------------------
화가 설명하고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한말인가)
글쎄 한번 생각해봐라. 당시 최치원은 12살의 어린아이가 아닌가. 10대에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유학가는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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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녀분 그림 14 왕금옥 부부는 쌍녀분 전설도 화폭에 담았다.
두 소녀가 최치원을 찾아온 장면이다
귀국 그림 10 이것은 귀국하는 최치원의 모습이다. 중국회화에서 구름은 무사귀환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왕금옥 부부 7 (2-3초후)
왕금옥 부부의 붓끝에서 살아나는 최치원은 용붓으로 그리고 6 모가 준수한 청년으로 최치원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엿 볼 수 있다
(INT)----------------------------------------
남편 인터뷰 예전에 우리가 한 자료를 봤는데 최치원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걸 보고 나서 우리는 매우 흥미가
생겼다. 특히 어린시절 유한 온 이야기를 보며 그를 매우 숭배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일을 해냈
다니 어떻게 상상할 수 가 있겠는가. 이점에서 부인과 서로 공감을 했다. 물론 이 이야기 자체는 대단히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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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서서 보고 6 그런데 왕금옥 부부의 그림 중에서 최치원의 두순학과 어울리는 그림 10 교우관계를 알 수
있는 그림이 있다.
율수현위시절 최치원과 자주 어울린 이 사람은 두순학이다.
당풍집 줌인 12 당대 유명시인중 한 사람인 그는 율수최소부에게 바치는 시를 쓰는데 율수최소부는 최치원을
가리킨다.
(INT)-----------------------------------
김중열 인터뷰 이 두순학은 두순학체라고 하는 새로운 문체를 형성할 만큼 인정을 받는 시인이었거든요.
두순학만의 독특한 시체가 있어요. 둔순학체라고 하는 한 시체를 형성할 만한 시인이었는데 이런 이들이 벼슬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친하자 이렇게 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얘기다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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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8 (3-4초 보고)
율수 현위 시절 최치원이 자주 들른 곳이 있다.
강팬 회산 8 강소성 우이현 회산, 경치가 뛰어나 중국인들은
제일산 비석 2 이곳을 강남 제일산으로 부른다.
건물 틸다운 5 (3- 4초후) 당나라 시대
석비 보고 4 수많은 문장가들이 이곳에 들러 회산을 노래했는
석벽시 팬 12 데 당시 시인들의 쓴 석비가 지금도 남아있다.
(보고)
(INT)-----------------------------------
마중가 교수 인터뷰 회산은 주로 경치가 좋다구요. 경치가 좋다는 것이 풍수가 좋아요.
회산은 임금님이 앉은 의자처럼 쭉 반원형으로 됐다고 이제 ...앉아서 남쪽을 보면 회하가 흐르기 때문에 북산
남회 중국 ..풍수기 때문에 시인들과 문인들과 이런 필객들이 와가지고 글을 쓰고 시를 쓰고 심지어는 서예가
들이 와가지고 마애 석각을 남기고 ,최치원은 자기가 율수현위로 있을 때 유명한 당나라 시인들이 회산에 많이
오니까 자기도 왔고 또 친구 이전이 이곳에 현위로 있었기 때분에 초대를 받아 가지고 온 이런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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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회산승경 5 회산 입구에 세워진 현판글귀에서 최치원의 흔적
회산승경 줌인 9 을 찾을 수 있었다.
회산승경은 최치원의 시에서 따온 말이다.
입구문 풀 6 최치원이 우이현을 둘러보며 지은 시는 20여 편
당은평 낭독하고 15 당은평 교수는 그 중에서도 최치원이 이곳 현위 이자 친구인 이전장관에게 보낸 시를 즐겨
암송한다고 했다
(낭송)-----------------------------------
당은평 시낭송 외로운 나그네 다시 여기서 신세를 지니
가을바람에 읊조리며 헤얼질 일 한스럽네
문 앞의 버들잎은 벌써 시들었건만
나그네는 아직도 작년 옷 그대로일세
하늘같이 아득한 길 시름 속에 늙어 가는데
바다 건너 고향집엔 꿈에나 돌아갈까.
우스워라 이네 몸은 봄에 돌아온 제비런가
화려하고 높은 집에 올해 또 다시 찾아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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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킹 7 (3-4 초 보고)
최치원의 발자취를 따라 강소성 회안시로 향했다
둘 걸어가고 4 (보고)
당한국성 조감도 15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당나라 시대에 이곳엔 당 한국성, 즉 신라방이 있었다고 한다.
피디 팬 신라방 터 13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지만 당시 이곳엔 약 천여세대의 신라인들이 모여 살았던 당나라
최대 규모의 신라방이었다
C/G 11 특히 신라를 오가는 뱃길과 운하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유학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INT)-----------------------------------
마중가 교수 인터뷰 옛날에 이곳을 초주라 그러기도 하고 산양이라고 그랬는데 신라사람들이 많이 와가지고서
항해활동을 하는 곳이고 선박제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약 천세대가 와있었는데 고 히하와 고운하가 교차되는 지점이기 때문에 선박제조하기가 아주 편리했고
신라로 가는 길도 여기서 시작했고 신라에서 오는 길도 여기서 시작했는데 최치원도 율수현위로 있으면서
여기서 신라사람을 한번 만나가지고 같이 술을 마시면서 고향생각을 하면서 눈물흘렸다는 시가 깃들어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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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차는 아이들 13 고국을 떠나온 지 어느덧 7년,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최치원은 이곳
에서 달랬을 것이다.
(볼것인지 낭송할것인지 결정?)
<최치원의 시> 17 서로 만나 잠시 초산의 봄을 즐겼더니
다시 헤어지려니 눈물이 수건 적시네
바람 앞에 슬피 바라봄을 괴이히 여지지 말라.
타향에서 고향사람 만나기 참으로 어려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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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사 4 (보고)
여자 그림 그리고 4 동방의 베니스라 불리는 중국의 소주에도 최치원
다리 풍경 4 이 지나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배 3 최치원은 소주의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 이곳의
계단 오르는 노인 3 독특한 문화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는데
여인들 10 특히 이곳 소주에서 최치원이 주목한 것은 바로 여인들이었다.
詩 <강남의 여성> 21 개방적이고 화려한 강남의 여인들을 바라보며 한편으론 하루종일 베를짜며 어렵게
생활하는 여인등의 모습도 시인의 예리한 눈으로 짚어내고 있다
(보고)
(INT)-----------------------------------
당은평 인터뷰 최치원은 율수현위로 있을 때 시간만 있으면 여행을 다녔다. 당나라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
드른 명승지를 유람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오랜 전통문화로 만유라고 한다
(INT)-----------------------------------
김중렬 교수 한시는 뜻만 가지고 두는게 아니고 운이라든지 평측이라든지 다 맞아야 되는데 최치원은 어려서
중국에 가서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중국사람하고 전혀 다르지 않게 시를 쓸 수가 잇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많은 공부를 해서 실력이 많이 쌓였기 때문에 인용하는 고사라든지 하는게 전혀 틀림이 없고
시제가 뛰어나고 그래서 당나라 그 유명한 시인들하고 서로 교류하며 전혀 외국사람이라고 하는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들이 최치원을 너는 문장을 가지고 당나라에 와서 당나라 천지를 감동시켰다라고
감동할 만큼 특출났다고 봐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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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사 팬 강 9 이렇듯 신라에서 온 유학생 최치원은 천재적인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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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대안탑 실루엣)
(일반세트에 중국화가의 그림 3-4장 배경)
이 그림은 중국화가가 그린 최치원의 모습들입니다
쌍녀분의 이야기는 물론 공부하는 모습, 당나라 시인들과 교류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 속의 최치원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 중 젊은 모습 나오고 )
무척 젊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실제로 최치원이 중국에서 이름을 떨쳤던 것은 20대의 젊은 시절입니다.
이 천재적인 신라유학생에 대해서 당시 당나라에서도 무척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요
중국의 역사서인 신당서에는 최치원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崔致遠 四六文一券 又桂苑筆耕十二券 高麗人 賓貢及第)
"최치원은 고려인으로 빈공과에 급제하고 사륙집과 계원필경집이 있다"
신당서는 우리 나라의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정사로써 중국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무척 중요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국의 정사에 외국인의 작품이 소개된 것은 최치원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최치원의 계원필경을 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장집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원필경이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이렇게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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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중국을 감동시킨 격황소문]
중국 양주대 외경 4 (보고)
서가 팬 12 중국 양주대에서 계원필경을 찾아보았다.
(보고)
계원필경 보는 일행 8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율수현위시절 이후에 지은 글 중 그 정수만을 모은 문집이다.
계월필경 줌인 6 계원필경에 수록된 글은 시 60편과 문장 310편
책 팬 6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INT)----------------------------------------
당은평 인터뷰 가장 중요한 것은 문헌적 가치이다. 당대의 사람이 쓴 당대의 역사책이다.
우선 중국 정사인 신,구당서 자치통감에서 빠진 부분까지도 기록했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중국정사에서 틀린
부분이 있으면 계원필경을 근거로 수정하고 있다. 계원필경은 매우 정확한 역사서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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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4 (2-3초 후)
최치원이 계원필경의 글들을 쓴 곳은 어디일까?
거리 5 중국 양주.
버스 5 양주는 중국최대의 상업도시로 유명하다.
운하 15 또한 양주는 수양제가 2백만을 동원해 이룩한 대운하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피디 당성 걸어가고 5 최치원은 율수현위를 그만두고 양주에 그 모습을
당성 팬 8 드러내는데 최치원의 두 번째 직장이 바로 이 양주의 당성이다.
문 3 (보고)
당성 팬 12 수양제의 궁성이기도 한 이 당성은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고대 성중의 하나라고 한다
(INT)----------------------------------------
주광 인터뷰 최치원은 바로 이성에서 일을 했다
이 성은 수양제가 살았던 성이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양주 대도독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나중에 회남 절도사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최치원을 여기서 많은 시를 썼다. 계원필경에 있는 글도 대부분 이곳에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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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7 (2-3 초후)
최치원이 머물고 있던 당성은 회남일대를 장악하
당성 7 고 있던 절도사 고병의 주둔지였다.
즉 최치원은 고병의 휘아에 들어간 것이다.
깃발 3 (보고)
신당서 고병이름 11 양주의 병권과 경제권을 쥐고 있는 고병은 신당서에 열전이 기록될 만큼 중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INT)---------------------------------------
당은평 인터뷰 당나라때 영토가 너무 넓어서 양주에 회남절도사가 있었다. 고병은 회남 절도사로 세력이 커지
니까 도처에서 문인을 모집했다. 이때 최치원의 과거급제 동기이며 가장 친한 친구인 고은과 또 한국사람은 잘
모르지만 원랑충. 이 두사람이 최치원을 적극 추천했다. 최치원도 자기 추천서로 백여편의 시를 고병에게
보냈다. 고병은 최치원의 글을 보고 매우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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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그림 14 (3-4초 후)
당시 당나라는 정치혼란과 계속되는 흉년속에서 최대의 혼란기를 맞고 있었다.
황소의 난 C/G 13 875년 산동지역에서 시작된 황소의 난은 당나라 전역을 휩쓸고 급기야 수도 장안을 점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격황소서 줌인 10 그때 세상에 나온 것이 격황소서. 황소토벌 총사령관인 고병을 대신하여 최치원이 쓴 격문
이다
종이 뜯기고 17 천하의 사람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뿐만 아니라 아마 땅속의 귀신까지도 너를 죽이려고
은밀히 의논하였을 것이니 네가 비록 숨은 붙어 있다고는 하지만 넋은 이미 빠졌을 것이다
(INT)-----------------------------------
김종열 인터뷰 당나라가 시원찮은니까 네가 일어난 심정도 이해는 한다. 이렇게 올려줬다가 그러면서도 이렇게
생전 너를 저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가는 이 죄는 귀신도 용납하지 않을 거다 라고 야단치고 그러니까 이 변려문
이라는 글이 원래 여러 문장수식을 잘 해가면서 멋지게 과장법을 써가면서 운을 맞추면서 가거든요.
그러니까 큰 강물이 흘러가듯이 올려줬다가 내려쳤다가 이어지면서 끝에 가서는 결론은 너는 틀림없이 망하고
말거다 해서 황소를 꼼짝못하게 만드는 이런 기법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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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5 (3-4 초후)
황소의 난이 진압된 후 최치원은 중국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는다. 그의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계원필경 10 신라에서온 유학생 최치원은 불과25세의 나이에 중국에서 큰 명성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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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당나라 성으로 별도세트-토황소격문 내려오고)
이것이 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입니다.
당나라 시대의 문장은 고사성어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짧은 문장으로도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학식이 높지 않으면 훌륭한 문장을 쓸수가 없다고 하는데요
(己議陰誅不覺下床而屈 如非泣鬼警風之手)
고려시대의 명문장가 이규보는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책상에서 나동그라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토황소격문에 대해서 만일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하는 솜씨가 아니라면 어찌 이 정도에 이를 수
있겠는가하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의 솜씨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문장력이라는 칭송하고 있습니다.
최치원이 토황소격문을 쓴 것은 25세, 그렇게 젊은 나이에 자금어대를 받을 정도로 최치원은 중국에서 성공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최치원 본인만 원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중국 땅에서 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치원은 중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 길에 오릅니다.
그는 왜 귀국을 택했을까요?
(비가 쭉 세워진다, 그 비를 하나씩 보면서)
(지중대사비: 군자지향, 낭혜화상비:군자국 , 진감선사비:仁域, 숭복사비:태평승지)
이것은 최치원이 불교 고승들의 생애에 대해 쓴 비문들입니다.
이 비문에는 최치원이 조국 신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요
최치원은 신라를 군자국, 인역, 태평승지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글자그대로 신라가 살기좋은 곳이다라는 뜻도 되지만 신라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최치원이 비록 중국에 유학가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코 신라인이라는 뿌리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치원이 귀국한 후 신라를 위해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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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최치원은 신라의 개혁을 꿈꿨다 ]
함양가는 길 트래킹 4 (보고 )
나무 틸다운 10 경남 함양
이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꼽히고 있는
상림 비석 2 아름드리 숲, 상림에서 최치원의 흔적을 만났다
나뭇잎 2
(INT)---------------------------------------
인터뷰 최치원이 이 고장 태수로 와가지고 냇물이 들가운데로 흘러가고 매년 수해가 나가지고 그 전답이 다
떠내려 가고 고충을 지방민들이 느끼기 때문에 강을 서남쪽으로 돌리고 둑을 쌓아가지고 거기다 숲을 조성했
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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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팬 숲 10 귀국 후 함양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은 민생안정을 위해 이 숲을 조성했던 것이다.
정자 4 최치원이 이곳에서 태수를 지낸 흔적은 마을
사운정 3 주민들이 세운 정자와
비석 18 공덕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3 초 후)
그런데 중국유학에서 성공하고 돌아온 최치원이 왜 지방태수라는 미관말직에 머물렀을까?
(INT)-----------------------------------
최영성 인터뷰 처음에 돌아오자마자 한림학사라는 벼슬이 주어지죠. 한림학사는 문자 그대로 문한을 담당하는
외부에 외교문서라든지 이런걸 담당하는 그런 직책이었죠. 자신의 경륜과 포부를 펴볼만한 그런 적합한 직책
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가 당나라 유학파와 국내 국학 출신과의 갈등이 대단히 심합니다. +그래 걸핏
하면 시기와 질투가 뒤따르니까 최고운 선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외직을
자청해서 절령군 태수라든지 부산군태수로 나가서 외직으로써 백성들을 가까이 하면서 민생고를 직접 목도
하면서 이렇게 정치를 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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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상서장 8 (2-3 초후)
경주 인왕동 상서장. 함양태수시절인 892년, 최 치원은 이곳에서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조를 바친다.
영정 줌인 8 시무 10여조,
상서장 외경 5 그것은 최치헌의 사회개혁안이었다.
(INT)----------------------------------------
최영성 인터뷰 역사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만 진성여왕 때는 하대로 내려갈 때 신라가 가장 혼란한 시기라
할 수 있죠. 멸망의 기초가 진성여왕 때부터 시작됐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 최치원 선생은 지방의
태수로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지방의 관아로 있으면서 유학자로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이대로 가서는 안되겠다. 신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현실개혁이 필요하겠다 해서 나름대로의 마지막
충정을 담아서 올린 글이 시무 10여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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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혜화상비 6 현재 시무10요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최치
능관인 자막 15 원의 기록을 통해 그의 개혁사상을 엿볼 수 있다. 능관인.
인재를 잘 선발해야 한다는 이 대목엔 골품제의 개혁과 과거제의 실시가 담겨있다.
사사위표 20 이것은 효공왕이 즉위할 때 쓴 최치원의 글이다.
불은 나무에서 났지만 불이 맹렬하면 나무를 태우고 배는 물에 뜨지만 물이 날뛰면 배가 엎어진다
군주가 실정을 하면 백성이 군주를 바꿀 수 있다는 덕치주의와 민본주의가 담겨 있다
해인사 북치는 스님 5 (보고)
해인사 풀샬 (보고)
지붕들 6 신라의 개혁을 꿈꿨던 최치원,
정자 풀 5 그러나 그는 시무10여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비석 2 해인사에 은둔한다
계곡 4 홍류동 석벽에 쓴 최치원의 시는 은둔을 택한
홍류동 바위 3 당시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은둔시 자막 17 (자막 보고)
"물은 미친 듯이 바위를 치고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하기 어렵네
항상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다 감싸네"
(INT)-----------------------------------
남동신 인터뷰 시무 10여조를 자칠 때 나이가 38입니다. 우리나이로 38이면 왕성하게 일을 할 때죠.
혈기 왕성할 때죠. 그리고 최치원이 시무10여조를 바쳤다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현실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성여왕도 그 건의에 대해서 졸은 평가를 내려서 아찬
이라는 그당시 6두품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자장 높은 벼슬을 줬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죠.
그의 계획안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기에서 최치원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을깨 생각됩니다.
그래서 해인사로 은거를 하게 되는데 은거라고 하는 것은 공무원신분에서 민간인이 됐다고 하는 것이지 세상과
담을 쌓았던 얘기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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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6 (4-5 초 후)
해인사에 은둔한 후 최치원은 그 어느때 보다도
학사당 현판 4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고 한다.
책들 나오고 8 의상스님의 전기를 비롯해 이 시기의 저서들은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신라 수창군등루기 10 최치원의 마지막 저술인 신라수창군등루기에도 현실참여의식이 담겨있다.
8 불교를 통해 신라의 혼란을 잠재워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숲 팬 8 최치원 그는 결코 은둔자가 아니었다.
홍류동 줌인 13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현실개혁의 의지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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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클로징]
(기본 세트에 영정배경)
예나 지금이나 유학가서 성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 합니다.
12살에 중국유학을 떠난 최치원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가 대단한 천재였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인백기천 즉 남이 백을 할 때 나는 천을 하는 그런 노력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성공을 거둔 만큼 최치원은 중국에 남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그러나 그는 조국 신라를 잊지 않았습니다.
당시 신라는 최치원의 경륜과 학식을 펼치기엔 너무나 기울어진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신라 말의 혼란기에 최치원을 포함한 지식인들은 중요한 선택을 해야했습니다.
쓰러져가는 조국 신라에 끝까지 충성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 일어서는 견훤이나 궁예 왕건에 의탁에게 일신을
도모할 것인가?
최치원의 선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신라였고 그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개혁안 시무10조였던
것입니다.
비록 당대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최치원이 꿈꾼 세상은 새로운 고려왕조에서 실현됩니다.
고려왕조는 최치원을 문창후로 추대하고, 우리역사상 최초로 문묘에 봉사하게 하는데요.
이는 고려왕조가 새로운 국가의 정신적 지주로서 최치원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재 시인이자 유학자인 최치원,
어쩌면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라인 최치원은 암담한 현실을 회피한 소극적인 지식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1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