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돌아가셨어요
중간고사를 마치고 이어지는 추석 연휴, 근 보름 동안을 김동수 선생님과 연락할 수 없었
다. 그래도 핸드폰으로는 항시 전화 통화를 할 수가 있었는데 무척 답답했다. 남태령에서 식
이요법을 하고 계신다고 했는데, 왜 전화가 안 되는 걸까.
학교에서는 격려금을 모았고 아이들은 저마다 편지와 선물을 모아 전달할 수 있는 방법만
찾고 있었다. 10월 5일에 나는 갑갑증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전화를 했다.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신우회 선생님들과 한 번 만나 예배 드리자고 해도 선생님께서는 변한 외모
때문에 그러시는지, 나중으로 미루어 오셨다. 그런 점이 나와 신우회 선생님들을 더욱 미안
스럽게 하는지 아시면서도.
10월 6일 토요일.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서려는데 전화가 왔다. 김동수 선생님의 사모
님이셨다.
"선생님, 학교보다 선생님께 먼저 전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젯밤 11시에 돌...아...
가셨어요........."
"네...에?"
나는 이어서 말했다.
"아니 왜 그 동안 연락이 안 됐어요? 얼마나 연락을 했는데..."
"선생님, 기도원에 갔었어요. 식이요법도 중단하구요... 가고 싶다고 해서..."
나는 무릎을 꿇었다. 김동수 선생님을 데려가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기도.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올렸다.
나는 죄인이야
다음의 내용은 사모님께 전해들은 이 세상에서의 김동수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이다.
김동수 선생님께서는 식이요법을 계속하시다가 배에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물을 빼면 또
복수가 차고 또 빼면 차고, 그렇게 일주일간을 보내던 중 기도원에 가겠다고 하셨다. 섬기시
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청계산기도원을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곳에 올라가셨다. 가실 때 전화
를 가지고 가시지 않아 연락이 안 되었다.
고통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금식하며 기도한 것이 모두 35일. 그래서 사모님께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40일 금식 기도하라는 말씀인가 봐"
하고 말씀하셨다.
매일을 새벽, 아침, 저녁 부르짖으며 기도하던 중 5일 새벽에는 3시쯤 일어나 사모님께 혼
자 기도하고 싶다고 하셨다. 약 한 시간 가량을 그렇게 울며 기도하시고 난 후,
"여보, 나는 죄인이야. 내 죄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 회개할 것이 이렇게 많다니..."
하셨다.
그리고 아침에 변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사모님이 부축해 화장실로 모셨고, 기다려도 오
시질 않아 나가봤더니 기도원 앞 입구에 누워 계셨다. 사모님은 깜짝 놀라 입원하셨던 병원
으로 다시 모셨고, 여러 검진을 하였다.
오후 6시경 눈을 뜨고 동생을 불러 어머니를 잘 봉양하라고 말씀하시고, 사모님과 어머니
등 가족들을 모두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시고,
"내가 너무 누워 있어 미안해. 하지만 곧 일어날 거니까......"
하셨다.
김선생님께는 아들 성환이가 유일한 자녀다. 9살. 초등학교 2학년. 선생님께서는 성환이는
보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초췌하게 변한 외모를 자식에게 보여주어 평
생 기억하도록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말씀을 다하시고 김선생님께서는 잠시 눈을 붙이셨다. 그리고 아들 성환이를 잠시 찾았다.
그러나 성환이는 병원이 아닌 집에 있으니. 그리고 다시 주무시고.......
그렇게 주무시며 하늘나라로 가셨다. 10월 5일 밤 11시. 두 달 가량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하나님의 도구로...
연락을 받고 학교는 분주히 움직였다. 특히 추도식 관계를 어찌해야 하나 하는 문제로 학
교에서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학교장(學校葬)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유가족들과 평교사
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추도식을 하기를 원했다.
빈소에서 사흘을 지키며 김선생님의 영정 앞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김동
수 선생님을 끝까지 사용하신다는 마음을 주셨다. 영훈의 복음화 과정에서 이렇게 귀한 김
선생님을 먼저 데려 가신 것은 분명한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추도식이었다. 인간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김선생님을 통해 드러나길 원하시는 그런 추도식.
교장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과 의견을 나누며 추도식을 2학년과 교직원 중심으로 하기로
했다. 1, 3학년은 교실에서 동참하기로 하고...
나는 교장 선생님께 김선생님 학교 떠나시는데 하나님 믿는 분이시니까 기도 순서가 있어
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다. 교장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은 잠시 생각을 하셨고 이내 섬기시
는 교회의 목사님께 부탁하기로 했다. 그리고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던 찬송을 부르는 것도
말씀을 드려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추도식 날. 식이 시작되기 약 5분 전까지 간부급 선생님들의 논란이 있었다. 기독교 학교
도 아닌데, 기도를 한다느니, 찬송을 한다느니...
영적 싸움.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끝까지 하나님께 가는 것을 방해하고자 하는 세력. 영
훈에 머물러 있는 악한 영의 움직임이었다. 결국 교장선생님도 뜻을 굽히고야 마셨다. 찬송
은 하지 말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급히 기도했다.
'하나님 기도와 찬송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아닙니까?'
계속 기도하며 식장으로 내려가는 순간, 먼저 내려가신 교장 선생님께서 슬며시 다가오셨
다.
"최선생, 기독학생들 앞에 내세워서 그 준비했다는 찬송가 해... 알았지?"
운구차가 들아오고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그야말로 울음을 억제하지 못했다. 특히 담
임반이었던 회장 학생의 추도사 때에는 어찌할 줄 몰랐다. 그리고 목사님의 기도, 기독학생
들과 선생님들의 찬송 소리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
리도다......(204장)"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김동수 선생님을
통하여 영광 받기를 원하셨다. 김선생님을 통회하게 하셔서 깨끗한 영혼으로 만들어 천국으
로 인도하시고,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시고 찬송하
게 하시는 그 은혜, 그 감격.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김선생님을 먼저 보낸 슬픔의 눈물이라
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감격하는 눈물이었다.
복음의 역사 그 아름다운 행진
추도식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쪽지가 있다.
"선생님, 점심시간 때 고3 추모기도회 해요"
아, 즉각적인 변화였다. 나는 고3 아이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2학년도 따로 하기로 했다.
점심시간, 지하 기술실이 꽉 찼다. 아니 발 디딜 틈이 없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이들도 밖
에까지 몰려 들었다. 특히 2학년이 기도할 때는 하관 시간이었다. 참으로 행복한 분 아닌가.
김동수 선생님을 만나고픈 아이들. 그래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애들아, 김동수 선생님은 하나님을 믿는 분이셨다. 그래서 천국에 가셨지. 너희들 김선생
님을 만나기 원한다고 했지. 그런데 그 길은 천국 가는 길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밖에 없
구나. 김동수 선생님이 믿었던 예수님, 하나님을 믿는 것 밖에 없어, 그 길밖에 없단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신실하신 분이니까. 인간적인 마음으로 김선생님을
떠나 보낸 것에 대해 슬픈 마음도 있긴 하지만, 김선생님의 죽음을 통해 다시 한 번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동안 영훈고등학교와 김동수 선생님을 두고 기도로 도와주신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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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동수 선생님
(영훈고 영어 교사, 한국교육자선교회 중앙회 서기, 전농교회 안수집사 )
7월 28일 고대병원 입원, 위암 말기 판정, 2주간 입원
8월 초 오산리 기도원 일주일간 금식기도
8월 하순 강원도 홍천 산 기도
9월 중순 식이요법 계속
10월 초 청계산 기도원
10월 5일 새벽 3시 회개 기도 하나님 응답 고백함
아침 예배 누워서 드림
오후 4시 고대 병원으로 옴
6시 가족들 불러 이야기 나눔
밤 11시 주무시면서 별세하심(41세)
10월 8일 아침 7시 고대병원 발인(장지 : 성남 남서울 공원묘지)
8시-9시 학교에서 추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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