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암전서(冠巖全書) 홍경모(洪敬謨)생년1774년(영조 50)몰년1851년(철종 2)자경수(敬修)호관암(冠巖), 운석일민(耘石逸民)본관풍산(豐山)초명명손(明孫), 조영(祖榮)시호문정(文貞)특기사항기수유(紀樹㽔), 수방울(帥方蔚), 섭지선(葉志詵) 등과 교유
冠巖全書冊二 / 詩○茶墨餘言 / 送季中之任玉山
環山叢似玉。知縣亦佳哉。千寺餘金佛。寺在縣西。唐將蘓定方所建。
孤雲有紫臺。縣有紫遷㙜。卽崔孤雲所遊處。
文仝饞渭竹。何遜臥楊梅。縣有梅竹之産。
回首終南月。那堪獨引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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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 전라도(全羅道) 옥구현(沃溝縣)
【군명】 마서량ㆍ옥산(玉山).
【누정】 자천대(紫遷臺) 서쪽 해안에 있는데, 지세가 넓고 펀펀하며, 샘과 돌이 좋아 즐길 만하다. 세상에 전하기는 최치원(崔致遠)이 놀던 곳이라 한다.
【학교】 향교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옮기어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신증』 【창고】 군산창(群山倉) 군산포(群山浦)에 있다. 옛날에는 용안현(龍安縣)에 있었으며, 득성창(得成倉)이라 하였는데, 지금 여기로 옮겼다.
【불우】 천방사(千房寺) 천방산(千房山)에 있고, 이응정(李膺梃)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전하는 말에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백제를 치려고 당(唐) 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는데, 당 나라에서는 소정방(蘇定方)을 시켜 배로 군사 12만명을 거느리고 천방산 아래에 정박하게 하였다. 그런데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천지가 캄캄하였다. 김유신이 산신령한테 기도하기를, “만일 안개를 활짝 개게 해 주시면 마땅히 절 1천 채를 세워 부처님을 받들겠습니다.” 하니, 그날로 천지가 맑고 밝아졌다. 그리하여 산에 올라 두루 살펴보니, 지세가 너무 협착하여 절 천 채를 도저히 세울 수 없으므로, 다만 돌 1천 개를 배치하여 절의 형태만 만들고, 절 한 채를 세워 천방사라고 부르다가 후에 선림사(禪林寺)라 고쳐 불렀다. 고려 숙종(肅宗) 때 근신(近臣)을 보내어 중수하고, 불상(佛像)을 안치(安置)하였으며, 지금은 다시 천방사라 부른다. 길상사(吉祥寺) 천방산에 있다. 강림사(江臨寺) 오봉산(五峰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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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집(淸臺集) 권상일(權相一)생년1679년(숙종 5)몰년1759년(영조 35)자태중(台仲)호청대(淸臺)본관안동(安東)시호희정(僖靖)특기사항이만부(李萬敷), 오상원(吳尙遠), 이익(李瀷) 등과 교유
淸臺先生文集卷之一 / 詩 / 杜山下一道八咏
《湖南邑誌・萬頃》 坊里에는 “下一道面” 및 “下二道面”으로 되어 있다. |
영조 | 3 | 1727 | 정미 | 雍正 | 5 | 49 | 7월, 萬頃 縣令이 되다. |
영조 | 4 | 1728 | 무신 | 雍正 | 6 | 50 | 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성을 굳게 지켜 민심을 안정시키다. |
영조 | 5 | 1729 | 기유 | 雍正 | 7 | 51 | 3월, 부친상을 당하다. |
大野西將盡。崔巍有鳳山。秪分白沙渚。不見滄溟端。舟遠看如蟻。島孤望似鬟。塵胷元自小。今日十分寬。
進鳳山
小阜因山麓。名菴載地經。北通天際峀。西眺日沉溟。帆影落階石。濤聲振戶欞。居僧無一事。朝暮見潮生。
望海寺
待潮潮未至。展席坐前欞。浦渚俄然沒。波濤何處生。往來期不失。呼吸理難明。隨類消長應。今辰月正盈。
潮汐水
突兀通西海。遙看落照明。懸空仍水沒。下地亦天行。積氣消難得。羣陰讓莫爭。回環有一理。將曉復東生。
落明臺
廢縣草因沒。荒臺石累層。孤雲曾有跡。輿地豈無徵。花木春空發。雲煙暮自興。何時理小艇。吊古一遊登。
紫遷臺
恠底滄溟裏。開成平漫原。嵯峨十二峀。迢遞兩三村。漁子舟爲屋。戎軒海作門。風煙正奇絶。遙望獨銷魂。
古羣山
小村留古號。地誌載分明。細路惟通陸。淳氓尙務耕。煙生近塩幕。雲鎖舊烽城。却訝桃源是。漁舟且莫迎。
吉串村
天際渾溟海。茫茫不見頭。溪湖呑納水。郡國往來舟。日月雙輪浴。乾坤一氣浮。椉槎欲遠去。隨意快周流。
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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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 전라도(全羅道) / 만경현(萬頃縣)
동쪽으로 김제군(金堤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9리, 남쪽으로 같은 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5리, 북쪽으로 전주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쪽으로 해안에 이르기까지 30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두내산현(豆乃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김제군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임피현(臨陂縣)에 붙였고,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현령으로 승격시켰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각 1인.
【군명】 두내산ㆍ두산(杜山).
【성씨】 본현 노(盧)ㆍ두(杜)ㆍ홍(洪)ㆍ곽(郭)ㆍ방(方), 이ㆍ박 모두 임피(臨陂). 김 김제(金堤). 고(高) 청거(淸渠). 백 이성(利城). 문(文) 평강(平江). 윤(尹) 철주(鐵州).이파산(泥波山) 종(宗)ㆍ김ㆍ신(申)ㆍ윤ㆍ섭(葉)ㆍ고ㆍ이, 노ㆍ유(柳)ㆍ곽(郭) 모두 내성(來姓)이다.부윤(富潤) 조ㆍ이ㆍ남궁(南宮)ㆍ장ㆍ승(勝)ㆍ최.
【산천】 진봉산(進鳳山) 길곶리(吉串里)에 있다. 동진(東津)ㆍ신창진(新倉津) 두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북쪽에 몇 봉우리 산이 높이 솟았고, 낙명(落明)이라는 대가 있다. 남산(南山)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대평(大坪) 김제군 조에 자세히 나왔다. 길관 현의 서쪽 34리에 있다. 바다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신창진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수음포(愁音浦)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군산도(郡山島)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둘레가 60리이다. 벼랑에 배를 감출 만한 곳이 있어서 모든 조운(漕運 배로 물건을 운반하는 것)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순풍을 기다린다. 섬 가운데 마치 임금의 왕릉 같은 큰 묘가 있었는데, 근세에 이웃 고을 수령이 그 묘를 파내어 금은기명(金銀器皿)을 많이 얻었는데, 사람들에게 고발 되어 도망하였다 한다.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12 봉우리가 성처럼 서로 잇대어 있고, 옛날에 군산정(群山亭)이라는 객관이 있었으며, 또 오룡묘(五龍廟)가 있었다.” 한다. 와보도(蝸步島)ㆍ궁지도(宮地島)ㆍ망지도(望地島)ㆍ횡건도(橫建島)ㆍ허내도(許內島)ㆍ가외도(家外島)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와 연결된다. ○ 이상의 섬들은 모두 군산도에 가까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광해주 12년에 김제와 합하였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모두 흩어졌기 때문이다. 14년에 전주로 옮겨 예속시켰다가 인조 15년에 다시 두었다.
【방면】 현내(縣內) 끝이 9리. 남일(南一) 처음이 7리, 끝이 10리. 남이(南二) 처음이 8리, 끝이 15리. 상서(上西) 처음이 6리, 끝이 10리. 하일(下一) 서쪽으로 처음이 11리, 끝이 25리. 하이도(下二道)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북면(北面) 처음이 2리, 끝이 7리. 군평(群平)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 이파산소(泥波山所)는 서쪽으로 15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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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환여승람 서
조선환여승람 목록
조선지리총설
조선명의(朝鮮名義) 조선위치(朝鮮位置) 조선경계(朝鮮境界) 조선광무(朝鮮廣袤) 조선연혁(朝鮮沿革) 조선인종(朝鮮人種) 조선방언(朝鮮方言)
전라북도지리총설
연혁(沿革) 산악(山岳) 하류(河流) 해만(海灣) 및 도서(島嶼)
【김제군】
건치연혁(建置沿革)
신구속현(新舊屬縣)
만경폐현(萬頃廢縣) 금구폐현(金溝廢縣) 부윤혜현(富潤廢縣) 거야폐현(巨野廢縣) 역양폐현(櫟陽廢縣)
군명(郡名)
벽골(碧骨) 김제(金堤)
산천(山川)
성산(城山) 승가산(僧伽山) 구산(龜山) 명량산(鳴良山) 오적죽산(吾赤竹山) 봉의산(鳳儀山) 수동산(首東山) 두산(杜山) 남산(南山) 진봉산(進鳳山) 진산(眞山) 입석산(立石山) 성덕산(聖德山) 우산(牛山) 봉두산(鳳頭山) 모악산(母岳山) 황산(凰山) 구성산(九成山) 광령산(筐嶺山) 묘고산(妙高山) 만경강(萬頃江) 동진강(東津江) 금천(金川) 수류천(水流川) 유천(油川) 금계(錦溪) 진봉저수지(進鳳貯水池) 능제저수지(菱堤貯水池) 제언(堤堰) 호포(狐浦) 장신포(長信浦) 회연(廻淵) 몽산포(夢山浦) 수음포(愁音浦) 길곶(吉串) 오봉진(五峯津) 화포진(火浦津) 신창진(新蒼津) 황천진(荒川津) 백구정진(白鷗亭津) 동진(東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