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천에 정령이 가득히 서려 있던 도산골 풍광들을 어이 잊으리~. 강과 산과 나무에 깃든 신령스러운 기운은 청랭한 도산의 얼이 되어 산간벽촌에 있던 우리들을 문명의 세계로 인도했다. 먼 옛날 반 백여 년 훨씬 전부터 도산서원과 시사단을 일상 생활의 일부로 매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은혜이자, 축복이었다.
먼 옛날 그게 그러니까... 아마도... 반 백여 년 훨씬 전부터 시사단試士壇과 상면을 한 것 같다. 도산국민학교를 입학 하기도 전인 유아기 시절이 아닌가 싶다. 유년 시절 고향 분강촌에서 토계에 있는 십 리 길 학교에 갈 때면 동네 삽지껄로부터 500여 미터 지점에 있는 도산서원 앞을 매일 지나가야만 했다. 시사단은 도산서원 강 건너 맞은편에 있는 섬마(섬마을) 강변 솔밭 속에 소각 형태로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산서원과 섬마 사이에는 푸르고 깊은 낙동강 강물이 150여 미터 정도로 넓게 적수되어 있다가 삼밭골(삼바꼬) 앞에서 큰 여울을 만든 후에 병암골(토째비골 혹은 배암이골) 앞을 휘돌아 쳐서 우리 동네인 분강촌으로 흘러왔다. 도산서당(도산서원) 앞에 움푹하고도 넓게 펼쳐져 있는 이 낙천(낙동강)을 퇴계退溪(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ㆍ1501~1570)는 그의 문집인 '도산잡영陶山雜詠'에서 '탁영담濯纓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안동댐 준공(1976.10.28)으로 고향 산천이 수몰(1976.8.15. 오후 5시경 분강촌 수몰) 되기 전까지 도산서원과 시사단은 매일 눈 속에 있었다. 어린 나이였든지라 깊게는 몰랐지만 도산골 퇴계 할배가 우리 도산골 사람들에게 물려준 크고 작은 서당과 정자로만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도산서원과 시사단은 일상 생활의 일부였기에 우리들의 가치관에 분명히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게 어떤 관념으로 가슴과 머리에 들어와 앉았는지는 지금도 말할 수 없다. 다만 유년시절 전반에 걸쳐 '산과 강과 나무는 사람을 선하게 만들고 맑은 마음을 주는구나' 하는 인식만큼은 확실하게 형성시키지 않았나 싶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성리학의 본성인 것 같다. 문득 퇴계가 도산잡영에서 적은 한 구절이 떠오른다. "~ 산림山林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일찍이 알았었다. ~"
시사단은 우리들이 도산국민학교 3학년 때인 1973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76년 10월 28일, 안동댐이 준공되기 전까지 시사단은 도산서원 맞은편 강 건너 섬마(강 건너 마을 이름, 섬마는 '섬마을'의 줄임말) 솔밭 속에 고스란하게 앉아 있었다. 수몰 전 도산서원으로 올라가는 정문 입구 바로 아래 낙동강(도산5곡 지대인 탁영담) 강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섬마 강변에 소풍을 가서 놀던 그 솔밭 한복판에 작은 소각 형태로 있었다.
<<먼 옛날 우리 동무 황해수는 나룻배의 노를 잘도 저었다. 해수는 섬마 시사단 옆에 살았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유머러스하면서도 음전한 데가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두 그를 좋아했다. 흐르는 강물을 가로 질러 가면서 힘차게 노를 저으며 두 발을 뱃전에서 버팅길 때면 제법 소년 뱃사공다운 티가 났다. 해수의 형인 위석이 형님이 노를 저을 때도 있었지만 기억에는 해수의 모습만 남아 있다. 당시 도산국민학교 4학년이었지만 두만강 노래를 구슬프게 잘도 불러가며 정말 두만강의 뱃사공처럼 정겹게 노를 저어 섬마 시사단 앞에 있는 나룻터로 정확히 나룻배를 몰고 갔다. 지금도 도산서원에 들러 낙동강을 바라볼 때면 먼 옛날 탁영담에서 노를 저으며 두만강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던 해맑은 해수의 얼굴이 강물 위로 어렴풋이 떠오른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연~ 임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구나~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섬마을 작은 뱃사공 우리 해수는 어디에서 잘 살고 있는지... 섬마를 떠올리면 푸른 낙강 위로 구슬프게 두만강 노래를 부르며 정겨이 노를 젓던 해수의 얼굴이 보인다. 나룻배... 넘실거리며 삼밭골(삼바꼬)을 돌아 분강촌으로 흘러가던 파란 낙수... 긴 장대로 만든 노... 시사단과 솔밭... 섬마을... 먼 옛날 동화 같은 추억의 화폭에 희미하게 그려져 있는 그리운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전경이다.>>
시사단 비각 속의 비문은 정조 때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두루 지낸 명재상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썼다. 수몰 한 해 전인 1975년 시사단이 있던 그 자리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아올린 뒤 그대로 옮겨 지었다. 섬마 청년들과 도산골 사람들이 한축 한축 애환 가득한 돌덩어리를 쌓아올렸다. 그때만 해도 도산골 사람들은 섬마와 도산5곡인 탁영담(도산서원 앞 강물이 적수된 지대)이 강물 속으로 통채로 사라진다는 생각을 실감나게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목격해야만 현상을 지극히 깨닫기 때문이다.
1792년(정조 16) 3월에 정조는 왕명을 내려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이황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만들어 영남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했다. 도산별과를 치르는 과거시험의 장소가 바로 시사단 자리였다. 1796년(정조 20)에 영의정 채제공이 도산별과를 기념하기 위해 글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채제공이 비석에 쓴 글씨는 이 비석의 명칭인 '도산시사단비陶山試士壇碑'라는 전액(비석 윗부분에 가로로 쓴 제목)과 그 내용을 담은 비문이다. 채제공은 당시 영의정으로서 시사단 건립의 경위와 정조의 인재 등용 의지를 기리는 비문을 직접 제술製述(글을 짓고 씀)하였다. 비문에는 당시 과거시험에 영남 유생 7,000여 명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성황과 정조가 퇴계 선생을 얼마나 각별히 추모했는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금 비석은 1824년(순조 24) 시사단의 비각을 개축하면서 다시 새긴 것이지만 그 내용은 채제공이 쓴 원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각은 아담한 소각이다.
시사단 비각 속에 새겨져 있는 비문을 한글로 번역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정조 임금께서 퇴계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먼 곳까지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시고 이곳 송림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을 여시니 7천 선비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는 성군聖君이 현인을 대우하고 선비를 아끼는 지극한 뜻이니 그 은덕을 잊지 않고자 이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노라."
지금 와서 유년시절 함께 했던 시사단을 되새겨 보니 그 시절이 몹시 그리워진다. 반 세기 전 춘하추동을 함께 했던 분강촌과 도산서원 그리고 섬마 시사단이 이제는 꿈속에서조차 희미해지고 잔망殘亡해져 가는 모습이 한정없는 서글픔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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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및 캡션(caption) : 사진1은 도산서원 정문에서 분강촌으로 내려 가는 신작로 30여 미터 지점이다. 도산서원 정문 앞을 가로지르는 신작로 바로 밑에 섬마(솔밭 속 시사단이 있었던 마을)로 가는 배를 대는 나루터가 있었다. 강 건너에 있던 솔밭과 시사단과 나루터는 사진을 윗쪽으로 촬영해서 나오지 않았다. 사진 오른쪽 중앙 지점에 옛날 섬마 강변에 있었던 양수장 건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분강촌에 살았던 종친들이다. 1974년 재술이 아재가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2를 보면 강 건너 전경을 아래로 촬영해서 솔밭과 솔밭 가운데 위치한 소각인 시사단과 나루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동댐 준공 전인 1970년대 초반 전경이다. 사진3은 1969년 5월 1일, 예안중학교 학생들이 도산서원 맞은편 섬마 솔밭에 소풍을 와서 시사단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모습이다. 시사단 바로 앞에서 촬영해서 소각이 대각처럼 나왔다. 사진 촬영자는 예안사진관 사진사분이고 사진을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제공한 사람은 이원길 선생이다.
사진4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12월 8일 도산서원 보수공사 준공식 때 도산서원에 참석했다. 당시 도산골 사람들과 예안중학교 학생들이 모두 와서 강 건너 섬마 강변에 줄지어 서서 도산서원 정문에 있던 대통령 일행을 먼발치서 환영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당시 강 건너 섬마부터 의인까지 강변이 빼곡했을 정도로 구경꾼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 당시 예안중학교 1학년이었던 분강촌 우리 동네 재술이 아재가 시사단 앞에서 친구들과 촬영한 사진이다. 시사단이 매우 뚜렷하게 나온 아름다운 광경이다. 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재술이 아재이다.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제공한 사진이다.
사진6의 출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며 나머지 사진(2.5.7.8)의 작가는 미상이다. 사진8은 최근 도산서원 주변 풍광이다. 사진 가운데 고택이 운집해 있는 곳이 도산서원이다. 강물 속에 섬처럼 떠 있는 작은 봉우리가 시사단이다. 우리는 유년시절 매일 도산서원 앞을 지나 신작로인 강변길을 따라서 도산국민학교로 등교했다. 그래서 강 건너 섬마에 위치했던 시사단을 매일 등하교 때 바라보며 다녔다. 내가 살았던 농암 선생의 후손들의 마을인 분강촌(영천이씨 집성촌)은 도산서원을 기점으로 500여 미터 아래에 있었고 도산국민학교는 3km 위에 토계 동네에 있었다. 사진9는 2018년 안동시와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이 "안동댐 수몰마을 생활사 아카이브 사진전"에 전시한 사진이다(2018.12.11~15. 잃어버린 고향, 다시 찾은 마을, 장소: 안동군 와룡면 행정복지센터 2층). 사진의 제목은 "나룻배를 타고 미실장터로 향하는 박시골 우지마 여인들"이다. 사진10은 안동시와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이 주관한 "2022 옛 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이명석 선생이 출품한 "1960년 풍산 마애리 나루터" 모습이다. 두 개의 사진에 등장하는 강나루터 전경과 나룻배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유년시절 도산서원 정문 아래 강나루터에서 강 건너 시사단이 있는 섬마 마을을 무던히 오가던 그 나룻배 풍경과 영락없이 닮았다. 그리움이 가득히 묻어나는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사진이다.
첫댓글 잘 봤어요~~
나룻배를 타고 건너던 모습이 생생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