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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2 부활팔일 금 – 133위 131° 최지혁 요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 잡았습니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5.7).
133위 131° ‘하느님의 종’ 최지혁 요한
이름 : 최지혁 요한, ‘하느님의 종’ 이아기 루치아 夫, 최양업 신부님 사촌형
출생 : 1808년, 공주
순교 : 1878년 7월 14일, 옥중아사, 좌포도청
최지혁(崔智爀) 요한은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조부 때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요한도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 천주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을 익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선일’(善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으며, (두 번째) 아내 이아기(李阿只) 루치아 또한 1878년에 순교하였다.
1846~1847년경에 다블뤼 신부를 만나 세례성사를 받은 최지혁 요한은 이후 충청도 홍주에서 살다가 1866년 병인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키려고 장치선(張致善), 김계쇠(金季釗, 베드로)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마련했으며, 1866년 7월 1일(음력 5월 19일)에는 리델 신부와 함께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였다.[1]
리델 신부와 함께 중국 상해에 머물던 최지혁 요한은 같은 해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함대의 물길 안내인으로 동행했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가 2년 가까이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1868년 7월경(양력)에는 조선에 재입국할 방도를 모색하던 리델 신부의 제안에 따라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최지혁 요한이 귀국하기 직전에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는 그의 아내 박 막달레나와 세 딸 부부가 모두 순교하였다. 그러므로 최지혁 요한은 귀국한 뒤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2] 이후 요한은 이아기 루치아를 새 아내로 맞이하였다.
1870년 3월 2일(음력 2월 1일) 최지혁 요한은 충청도를 출발하여 9월 30일(음력 8월 4일) 중국 차구(岔溝, 현 요녕성 대련시 장하시 용화산진[蓉花山鎭])에 도착하였고, 이어 상해로 가서 리델 주교를 도왔다. 그러다가 1872년 5월에 귀국한 뒤 중국을 왕래하며 조선 교회의 소식을 전했고, 1875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새로 조선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에 그는 서대문 밖 고마청동(雇馬廳洞, 현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에 집을 마련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876년 5월 8일(음력 4월 15일) 블랑(J. Blanc, 白圭三 요한) 신부와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빅토르) 신부를 모시고 조선으로 귀국했으며, 1877년 9월 23∼24일(음력 8월 17∼18일)에는 리델 주교, 로베르(P. Robert, 金保祿 바오로) 신부, 두세(C. Doucet, 丁加彌 가밀로) 신부 등을 황해도에서 맞이한 뒤 리델 주교와 함께 서울 고마청동으로 돌아왔다.[3]
그러나 리델 주교의 입국 사실은 곧 탄로가 났다. 중국으로 보낸 교회 밀사가 국경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체포령도 내려졌고, 최지혁 요한은 리델 주교, 아내 이아기 루치아와 함께 1878년 1월 28일(음력 1877년 12월 26일)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어 리델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최지혁 요한은 “지금 배교한다고 해서 어찌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오직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굳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후 요한은 오랫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였다. 연로하고 병이 든 그에게 이러한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는 옥중에서도 기도와 묵상을 멈추지 않았으며, 틈틈이 옥졸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리델 주교가 중국으로 추방된 지 한 달 뒤인 1878년 7월 14일(음력 6월 15일)에 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70세였다.[4][4.1]
[註]__________
[1] 『좌포도청등록』, 정축(1877년) 12월 26일; 「리델 신부가 형 루이에게 보낸 1866년 12월 서한」, A-MEP. Vol. 579, f. 1017;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리델 문서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112면; 『우포도청등록』, 1868년 4월 6.18.29일.
[2] 「최 요한이 리델 신부에게 보낸 1869년 11월 13일자 서한」과 「리델 신부가 델페슈 신부에게 보낸 1870년 1월 26일자 서한」, A-MEP. Vol. 579, ff. 1666, 1716.
[3] 『병인치명사적』, 24권, 64면; 「최 요한이 리델 주교에게 보낸 1870년 9월 30일자 서한」, A-MEP. Vol. 579, ff. 1671, 1674; 「리델 주교가 형 루이에게 보낸 1876년 5월 14일자 서한」, A-MEP. Vol. 580, f. 86; 「블랑 신부가 누이에게 보낸 1876년 5월 19일자 서한」, A-MEP. Vol. 580, f. 109; 「리델 주교가 파리 지도자들에게 보낸 1877년 10월 3일자 서한」, A-MEP. Vol. 580, f. 238.
[3.1] 리델 주교와 최지혁 요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 수난사’(1784~1886) 중에서)
교황청은 1868년 4월 27일 리델 신부를 조선교구의 제6대 주교로 임명하였다. 1876년 2월 27일에는 강화도에서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었고 1876년 5월에는 10여 년 간 목자 없던 조선교회에 다시 블랑, 드게뜨의 두 신부가 서울로 숨어들었다.
이 두 신부를 백령도에서 서울로 맞아들인 교우는 10여 년 전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피난시켰다가 귀국한 유명한 노인학자 최지혁(요한)이었다.
최지혁(요한)은 병인년 박해 때 아내와 6남매의 자녀가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리델 신부를 모시고 청국으로 건너갔었는데 그사이 그의 가족은 모두 순교하게 되었었다.
1877년에는 리델 주교가 드세(Doucet), 로베르 신부와 함께 청국 배를 타고 황해도 장연(長淵) 앞 바다에서 최지혁(요한)을 만나 서울로 잠입하였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리델 주교는 밀사 최치화·오치옥으로 하여금 리델 주교와 최지혁(요한)의 편지를 갖고 만주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 코스트, 뮈텔 신부에게 전하려고 하였는데 이 밀사가 국경에서 잡히었고 무서운 고문에 모든 것을 자백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1878년 1월 28일 리델 주교는 최지혁과 함께 잡혔다. 이때 주교 대리 역할을 하던 블랑 신부가 긴급히 조선교우를 밀사로 보내 이 사실을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알리고 구제할 방법을 부탁하였다.
북경 주재 공사와 북경 주교는 이 문제를 갖고 총리아문 대신인 이홍장을 찾아가 조선주교 리델을 청국으로 보내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게 되어 리델주교는 5개월간 옥살이를 한 후 만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리델 주교와 같이 잡힌 최지혁은 전혀 도움을 못 받고 1878년 7월 14일에 옥사하였다.
최지혁(요한)은 글씨를 잘 쓰는 학자였었는데 1866년 이래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성직자의 재입국을 활발히 준비하였었다.
리델 신부가 1880년 출판한 『한불자전』, 『한어문전』의 한글체 대·중·소의 모형은 모두 최지혁 요한의 글씨체로 하였었다. 이 두 책은 우리말의 사전과 문법책으로 처음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 문화를 서양에 소개한 귀중한 저서들이었다.
[4] 『좌포도청등록』 1877년 12월 26일; 『병인치명사적』, 24권, 64면; 펠릭스 클레르 리델,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 52.111-113.155면; 「드게트 신부가 리델 주교에게 보낸 1878년 7월 16일자 서한」, A-MEP. Vol. 580, f. 388; 「리델 주교가 델페슈 신부에게 보낸 1878년 11월 4일자 서한」, AMEP. Vol. 580, f. 492. 『치명일기』(정리 번호 340번)와 『병인치명사적』(24권, 64면)에는 순교 당시 요한은 ‘70세가 가까웠다.’고 나온다.
[4.1] ‘하느님의 종’ 최지혁 요한과 최양업 신부 집안
- 최지혁, 최경환 성인의 큰조카이자 최양업 신부의 사촌 형 -
이석원 프란치스코, ‘상우교서 2020 가을호’ 통권 68호 (2020), pp.33-40
1.
최지혁(崔智爀) 요한(1808~1878)은 1866년 천주교 박해 때에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배를 마련하여 리델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이후 중국과 조선을 오가면서 리델 주교(1869년에 제6대 조선대목구장이 됨)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고 선교사제의 조선 입국을 도왔다. 1876년 5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가 조선에 입국할 때 다른 신자들과 함께 선교사제들을 서울로 인도했고, 1877년 9월 리델 주교가 다시 입국할 때도 그와 함께 서울 고마청동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리델 주교의 입국 사실이 곧 탄로 나서 1878년 1월 28일에 주교와 최지혁 부부, 주교댁에 있던 신자들이 모두 잡혀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리델 주교는 그해 6월 중국으로 추방되었지만 다른 신자들은 계속 감옥에 갇혀 있었고, 최지혁은 7월 14일 포도청 감옥에서 아사(餓死)로 순교했다.1)
‘최선일’이라고도 불렸던 최지혁 회장은 1878년 순교자로서 현재 ‘하느님의 종’에 선정되어 시복 조사 중에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신자들의 증언2)과 관변 측 심문 자료3), 리델 주교에게 보낸 최지혁의 서한4), 리델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낸 서한5) 등이 있다.
최지혁과 그 가족에 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한 편으로, 주교회의가 편찬한 약전6)에서도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조부 때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요한도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 천주 교리를 배우고 … ‘선일’(善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으며, 아내 이아기(李阿只) 루치아 또한 1878년에 순교하였다. … 1846~1847년경에 다블뤼 신부를 만나 세례성사를 (받았고) … 그의 가족들은 요한이 (1868년 7월경) 귀국하기 직전에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는 그의 아내 박 막달레나와 세 딸 부부가 모두 순교하였다. 이후 요한은 이아기 루치아를 새 아내로 맞이하였다.” 정도만 언급되어 있다.7) 약전의 특성상 내용을 함축적으로 서술하느라 생략된 부분(세 딸 부부)8)도 있지만, 조부와 부친을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교회 측 증언 기록과 리델 주교의 서한, 관변 측 심문 기록에서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최지혁 가족에 대해 필자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새로운’ 자료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로운’ 자료는 아무도 몰랐던 자료를 발굴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잘 알려진 자료이지만 최지혁과 관련하여 주목받지 못했던 자료를 말한다. 그것은 최양업 신부의 조카인 최상종 빈첸시오가 1939년에 자신의 부친인 최우정 바실리오와 그 가족들에 대해 기록한 「최 바실리오 이력서」(이하 ‘이력서’로 줄임)이다.9)
필자는 19세기 한국천주교회의 목판인쇄소에 대해 연구하고 발표할 기회를 가졌는데,10) 1860년대 베르뇌 주교가 세운 서울 목판인쇄소 외에 1880년대 최우정이 블랑 주교의 지시로 목판인쇄소를 설립하여 천주교서적을 간행한 사실도 정리해서 발표했다. 최우정이 운영한 목판인쇄소에 대해서는 장동하 신부의 선행 연구11)에 크게 도움을 받았지만, 블랑 주교의 서한 외에 ‘이력서’가 인용되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사료로서 ‘이력서’를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최우정뿐 아니라 그 가족들 특히 최우정 형제의 큰 사촌 형인 ‘최 요한’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필자는 ‘이력서’에서 언급된 ‘최 요한’이 ‘최지혁’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기존 자료들과 비교 검토를 한 결과12) 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에 대한 내용을 아래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리델 신부와 조선 신자들(1866년 7월, 중국 상해).
가운데 리델 신부의 오른쪽(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는 노인이 최지혁 요한이다.
2.
‘이력서’는 최우정뿐 아니라 선대에 천주교를 받아들인 시점부터 1939년 기록 당시까지 최씨 집안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 ‘이력서’에 의하면, 최우정 집안은 경주 최씨로 원래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787년경 최한일(崔漢馹)과 최한기(崔漢驥) 형제가 이존창 루도비코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최한일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인 이씨와 외아들 최인주(崔仁柱)는 1791년(신해)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떠나 홍주 다리골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편 최한기 가족도 이때 강원도 홍천으로 내려갔고 ‘이력서’가 작성되던 1939년 당시에는 그 후손들이 홍천 학익동과 횡성 풍수원에 거주하고 있었다.
홍주 다리골에 정착한 최인주 집안은 재산을 모아 부유하게 살았지만, 최인주의 세 아들(영열, 영겸, 영눌) 중 막내 영눌, 즉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권유로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서울에서 다시 박해의 조짐이 보이자 삼 형제는 흩어져 피신했는데, 첫째 최영열(崔榮說) 가족은 목천 서덜골13)로, 둘째 최영겸(崔榮謙) 가족은 용인 한덕골14)로, 막내 최경환 가족은 과천 수리산15)에 정착하게 되었다.16)
이상이 1839년 이전까지 최씨 집안의 대략적인 역사이다. 1839년 이후 최경환·이성례 마리아 부부의 순교, 최양업 신부의 귀국과 활동, 최양업 형제들 가족의 시련과 극복 과정이 ‘이력서’의 주요 내용이지만, 최경환의 형제와 그 후손에 대한 내용도 언급되어 있다. 최경환의 큰형 최영열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그중 큰아들 ‘최 요한’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최우정) 바실리오의 백부와 중백부의 이력을 대충 말하건대, 그 백부 영열(榮說)씨는 목천(木川) 서덜골에 사시다가 곽란병(霜亂病)으로 선종하셨는데, … 자제 형제분으로서 큰 자제 의정(義鼎) 요한씨는 일찍 공부하여 학식이 유여(有餘)하고, 위인이 비범하시며, 또한 재상가(宰相家)에서 수학하신 고로 행세와 예모에 출중하셨다. … 안(다블뤼) 주교와 이(리델) 주교를 모시고 다년간 지내시다가 무인년(1878) 군난(窘難, 박해)에 추착(推捉)되어 여러 달 옥중에서 잔고잔형(殘苦殘刑)을 감수하시다가, 옥중에서 치사(致死)하시었는데, 자제는 없고, 따님 3형제는 평창 이씨, 한산 이씨, 함종 어씨 집안으로 출가되었더라.17)
서울의 주교댁에 바실리오의 사촌 최 요한이 계시었는데, 데리고 있는 당질더러 “서울에 계신 너의 당숙을 가뵈어라” 하고 … 보냈다. 그런데 수일 후에 어떤 교우가 와서 말하기를 지금 서울에는 또 군난이 크게 일어나서, (리델) 주교와 (최) 요한이 잡혔다고 하였다. … 천만다행으로 수일 후에 당질 요한이 돌아왔다. … 잡히신 이[리델] 주교와 빅토리노 최[드게트] 신부는 중국으로 환귀(還歸)하시고, 최 요한은 연만(年萬)한 노인이 옥중에서 여러 날 고초를 겪으시다가 옥중치사(獄中致死)하시었다.18)
1870년생인 최상종19)이 자신의 부친인 최우정과 관련된 일화는 자신이 보거나 직접 들었을 것이므로 1877년 12월(양력 1878년 1월) 리델 주교와 최 요한의 체포, 최 요한의 옥사에 대해 기록한 부분은 그 신빙성이 높다. 위에 인용된 ‘이력서’ 내용 중에 리델 주교와 드게트 신부가 같이 잡힌 것처럼 서술된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20) 노년의 나이21)로 1878년 리델 주교와 같이 체포되어 감옥에서 ‘치명’했다는 점에서 ‘최지혁’과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력서’에 의하면 최 요한의 이름은 ‘의정’이고, 다블뤼 주교와 리델 주교를 모시면서 교회 일을 맡았던 복사·회장이었다.
최 요한의 아내와 세 딸, 사위가 모두 순교했다는 내용은 ‘이력서’에서 확인할 수 없지만, 그가 세 딸을 두었고 세 명 사위의 성씨가 최지혁의 1869년 서한[프랑스어 번역본]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주교회의 판독본(요약번역문)에서는 최지혁의 큰딸이 아나스타시아(Anastasie), 둘째 딸이 마리아(Marie), 셋째 딸도 마리아로 나오며, 큰사위는 이 안드레아(Ni André)22), 둘째 사위는 우 요한(Eu Jean), 셋째 사위는 홍 토마스(Hong Thomas)로 나온다.23)
반면 ‘이력서’에는 딸들의 세례명은 나오지 않고, 사위들이 평창 이씨, 한산 이씨, 함종 어씨로 나온다. 서한의 이씨(Ni)는 ‘이력서’에서도 확인되고, 홍씨(Hong)는 ‘이력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판독본에서 우씨로 본 ‘Eu’는 ‘어’로 읽을 수 있다. 다른 최지혁 서한의 불어번역본에서 ‘어사’(御史)를 ‘Eusa’로 표기한 것24)으로 볼 때 ‘이력서’에서 언급한 ‘(함종) 어씨’가 ‘어 요한’(Eu Jean)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력서’에서 언급한 세 사위 중 두 명의 성씨가 최지혁 서한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최상종이 ‘이력서’를 기록할 때 최 요한에 대해 완벽한 기억(정보)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사실에 상당히 근접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포도청 1차 심문(음력 1877년 12월 26일)에서 최지혁은 8, 9세 때인 1815~16년경에 아버지에게 천주교를 배웠다고 했으며, 3차 심문(음력 1878년 1월 11일)에서는 집안에서 천주교를 믿은 것이 3대에 이르렀고, 충청도 홍주 땅에 머물러 살았다고 진술했다.25) ‘이력서’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천주교를 가르쳐준 아버지는 최경환의 큰형인 ‘최영열’이고,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조상은 그의 조부인 ‘최인주’로 비정할 수 있다. ‘이력서’에는 처음 입교한 조상이 최인주의 부친이자 최지혁의 증조부인 ‘최한일’로 나오지만, 홍주에 정착하여 가족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은 최인주 이후였다. 『포도청등록』과 ‘이력서’를 비교해 볼 때도 홍주 지역에 정착한 최지혁의 집안이 곧 최경환-최양업 신부의 집안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력서’와 다른 자료를 비교 검토한 결과 최지혁=‘최(의정) 요한’이 최양업 신부를 포함한 최우정 형제의 사촌 형이자 최경환의 큰조카임을 알 수 있다.
3.
‘이력서’ 외에 다른 자료를 통해서 최경환의 조카이자 최양업 신부의 사촌 형인 ‘최 요한’=최지혁의 역사적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기해·병오 순교자를 대상으로 한 시복재판에 증인으로 나왔던 이 베드로는 최경환과 관련된 일화를 진술하면서 ‘최경환의 조카 최 요한’을 언급했다.
기해군난 때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성패(聖牌)·성물(聖物)은 다 수장(收藏, 모아서 보관함)하고 성서(聖書, 교회서적)만 내어놓고 볼 새[때] 그 조카 최 요한이 보고 왈 “남은 이런 풍파에 다 감추거늘 왜 내어 두시오?” 답왈 “너나 잘 간수하였거든 말(을) 마라. 성물은 악인(惡人)들이 천답(踐踏, 발로 밟음)하겠기에 간직하였거니와 서책이야 성물이냐? 군사(軍士)가 난시(亂時)에 병서(兵書)를 아니 읽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26)
박해가 임박한 시기에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는 성물과 교회서적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군사가 전쟁에 대비하듯이 끊임없이 교회서적을 보아야 한다는 최경환의 신심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전체 맥락에서는 같은 일화가 ‘이력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평시에도 마음에 그윽히 치명원의(致命願意)가 있었던 고로, 아무리 위험시대라도 항상 제대 위의 고상(苦像)과 성경(聖經)을 모셔두었다. 한번은 그 장질(큰조카)이 와 보고, 숙부께 아뢰되, “이같이 위험 시대에 어찌 성물(聖物)을 심심장지(深深葳之)하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는데, 프란치스코가 대답하시되, “너희들이나 잘 간수하여라! 전장(戰場)에 군사가 군기를 어찌 잠시인들 놓으리요? 삼구전장(三仇戰場)에 필요한 우리의 군기는 고상과 성경이니, 한때도 멀리할 길 없으므로, 이같이 모셨노라!” 하시더니,27)
필자가 참여한 『교회사학』 6호(‘최경환 성인과 수리산 성지’ 특집) 자료편에 이 베드로의 증언을 수록하면서 각주로 조카 최 요한이 최경환의 큰조카 ‘최의정 요한’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28) 하지만 ‘이력서’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지 못해 ‘이력서’에 기록된 위의 일화를 전거로 들지 못했다.29) 하지만 ‘이력서’와 다른 자료들을 통해 최지혁이 최경환의 큰조카임을 확인하고 ‘이력서’ 전체의 내용을 다시 검토하게 되면서 최경환에게 질문을 던진 최 요한이 최경환의 큰조카인 ‘최(의정) 요한’=최지혁임을 알 수 있었다.
‘최 요한’=최지혁에 대한 또 하나의 방증은 1922년에 작성되어 ‘뮈텔문서’에 포함된 「이천(伊川) 망답지방에 서교(西敎) 진행(進行) 대개(大槪)라」는 문서이다. 『교회와 역사』 542호 표지 뒷면에 소개30)된 이 문서는 이천 망답본당31)의 약사를 소개한 것인데 내용 중에 “별세한 최 신부의 사촌 최 요한”이 언급되어 있다. 이 내용을 본 필자는 해당 문서를 확인했는데, 최 요한과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별세하신 최(양업) 신부의 사촌 최 요한과 … 김 요한 성업이 길을 떠나 중국 차구 성당에 이르니 그때 마침 이[리델] 주교와 백(블랑) 신부가 조선에로 들어오시지 못하시고 거기서 조선어를 배우시다가 조선 교우를 만나 반기시며 … 그 후 일천팔백칠십오년 을해에 이 주교와 백 신부와 최(드게트) 신부를 경성(京城, 서울) 남대문 밖 고마창골에 뫼시고 … 일쳔팔백칠십칠년 정축에 이 주교 잡히시니 …
(뮈텔문서 정리번호 1922-220)
1922년 당시 망답본당 신자들이 정리한 내용이라 1870년대의 사실과 어긋난 것도 있지만,32) ‘최양업 신부의 사촌인 최 요한’이 중국 차구(岔溝)에 도착했다는 내용은 1870년 9월 30일 최지혁이 차구에 도착한 사실33)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명확한 주체가 언급되지 않지만 선교사제들을 서울 고마창골34)로 모신 이도 최지혁이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의 사촌 최 요한’은 최지혁을 가리키는 것이고, 1920년대 신자들 사이에서 최(지혁) 요한이 최양업 신부의 사촌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서도 ‘이력서’에 나오는 최(의정) 요한이 최경환의 큰조카이자 최양업 신부의 사촌 형이며, 1878년 순교자 ‘하느님의 종’ 최지혁 요한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확인된 내용을 바탕으로 최지혁 요한의 가계도를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주>__________
1)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편찬, 2018, 「최지혁(요한, 1808~1878)」,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374~376쪽.
2) 『치명일기』 340번 ; 『병인치명사적』 24권 64쪽.
3) 최지혁의 진술이 담긴 심문[공초] 자료가 『포도청등록』이다. 정축(1877) 12월 26일(양력 1878년 1월 28일) 1차 공초와 12월 29일(양력 1월 31일) 2차 공초는 좌포도청·우포도청 등록에 다 기록되어 있으며, 무인(1878) 1월 11일(양력 2월 12일) 3차 공초는 우포도청등록에만 기록되어 있다.
4) 최지혁이 보낸 서한의 원본은 확인되지 않으며, 대신 프랑스어 번역본이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579권
(A-MEP, Vol 579)에 남아 있다.
5) 리델 주교의 서한은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579권(A-MEP, Vol.579)과 580권(A-MEP, Vol.580)에 실려 있다.그런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가 2009년에 판독한 『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 문서 판독 자료집』에서는 ‘최 요한’을 ‘Tchen Jean’으로 판독하고 요약번역문에 ‘천 요한’으로 표기한 경우가 많다. 원본을 확인해 보니 ‘Tcheu Jean’(최 요한)으로 나온다. 판독본(요약번역문)의 오류이다.
6) 주 1) 참조.
7) 가톨릭대사전의 약전 내용과 큰 차이는 없으며 일부 내용이 수정·보완되었다. 방상근, 2005, 「최선일」, 『한국가톨릭대사전』 11, 한국교회사연구소, 8229쪽 참조.
8) 최지혁이 1869년 11월 13일(음력 10월 10일)에 리델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는 세 딸의 세례명과 세 명 사위의 성씨·세례명이 나온다. 이 서한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리델 주교는 최지혁의 큰사위 이 안드레아가 1866년 이전에 자신의 복사이자 집주인으로 5년간 함께 지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A-MEP, Vol 579, ff.1716~1718). 주교회의의 약전에는 이 서한을 각주로 언급하면서도 세 딸 부부의 이름은 서술하지 않았다. 최지혁의 재혼한 아내이자 같이 잡혀가 순교한 이아기(李阿只) 루치아도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별도의 약전이 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377~378쪽.
9)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982,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205~240쪽.
10) 2020년 8월 12일에 연구주제를 발표했고, 당시 발표문이 이석원, 2020, 「19세기 서울지역 천주교회 목판인쇄소 운영과 서적 유통」, 『2020 서울역사 중점 연구 중간발표회 자료집』, 서울역사편찬원, 103~125쪽이다.
11) 장동하, 2006, 「개항기 조선교구 인쇄소 연구」, 『신학과 사상』 57,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2) 최지혁과 관련된 기존 자료, 특히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의외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1870년 9월 30일 만주 차쿠에 도착한 최지혁이 리델 주교 앞으로 보낸 서한에는 1866년 이후 천주교 박해에 관련된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 원본은 확인되지 않으며 프랑스어 번역본이 남아 있다(A-MEP Vol.579. ff.1674~1697). 필자는 주교회의 판독본의 ‘요약번역문’을 참고했는데 그 내용이 『병인치명사적』 15권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 문서 판독 자료집』, 597~617쪽). 『병인치명사적』 15권과 비교 대조해 본 결과 15권과 최지혁 서한에만 있는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일치하고 있으며 순서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최지혁의 서한이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병인치명사적』으로 필사되는 과정에서 차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은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2020년 연말에 간행할 『병인치명사적』 판독대조역주본(전 6책)에 실릴 예정이다.
13) 충남 천안시 목천읍 송전리 서들골 마을.
14)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
15)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16) 「최 바실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205~213쪽.
17) 「최 바실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227~228쪽.
18) 「최 바실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235~236쪽.
19) 1939년 1월 ‘이력서’를 작성했을 때 자신의 나이가 70세라고 했으므로 1870년생이 된다. 「최 바실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240쪽.
20) 드게트 신부는 1879년 5월에 공주에서 붙잡혔고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되었으나 그해 9월 중국으로 추방되는 형식으로 풀려났다.
21) 『포도청등록』 정축년 12월 26일 공초 기록에 의하면, 당시 최지혁의 나이는 70세(1808년생)였다.
22) 이 안드레아 : 리델 주교의 서한에 의하면 이 안드레아와 최 아나스타시아는 공주 진밭(현재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의 신부댁 주인이었으며, 3남 1녀(안나, 베난시오, 아우구스티노, 막내 아들 젖먹이 아기)를 두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1994, 《리델 문서 Ⅰ (1857~1875)》, 한국교회사연구소, 79~80쪽, 277~278쪽.
23) A-MEP Vol.579, f.1718 ; 『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 문서 판독 자료집』, 627쪽(요약번역문), 630쪽(판독본).
24) 최지혁이 박해 이후 일어난 일화들을 소개한 서한 중에 나온다(A-MEP Vol.579. ff.1682~1683) 앞의 주 12) 참조.
25) 주 3) 참조.
26) 수원교회사연구소 판독대조역주, 2012,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천주교 수원교구, 737쪽. 원본 5권 49하, 97회차 이 베드로 증언(1885.10.13).
27) 「최 바실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216쪽.
28) 수원교회사연구소, 2009, 「(특집 자료편) 교회 재판 증언 자료(1)」, 『교회사학』 6호, 211쪽, 각주 14번.
29) 이 베드로의 증언이 수록된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위의 각주 25번 참조)에서는 ‘최 요한’에 대한 주석을 붙이지 않았다.
30) 송란희, 2020,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자료 소개 - 뮈텔문서 1922-220」, 『교회와 역사』 542호(2020년 7월호), 한국교회사연구소, 표지 뒷면.
31) 망답본당은 1884년에 설립되었으며 1939년 서울대목구(현재 서울대교구)에서 춘천지목구(현재 춘천교구)로 편입되었다. 1945년 분단으로 38선 이북에 위치하게 되어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32)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해는 1875년(을해)이 아닌 1876년(병자)이고, 리델 주교가 입국한 해는 그 다음해인 1877년(정축)이다.
33) 최지혁은 리델 주교에게 자신이 1870년 3월 2일(음력 2월 1일) 충청도를 떠나 9월 30일(음력 8월 4일) 차구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전했다(A-MEP Vol.579, f.1674; 『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 문서 판독 자료집』, 597쪽).
34) 서울 종로구 평동. 옛날 역마를 빌려주던 고마청(雇馬廳)이 있으므로 생긴 마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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