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땐 이렇게 해봐 (1편)
바리
일을 마치고 돌아온 복주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주방으로 간다. 냉장고에서 총총 썰어두었던 묵은 김치를 꺼내 냄비에 덜고 물을 잔뜩 붓는다. 수저로 대충 김치와 물을 휘적인 다음 냄비 뚜껑을 닫고 불을 켠다. 내일 아침에 도시락으로 싸 갈 김치찌개를 전날 밤인 오늘 미리 만들어두는 것이다. 복주는 요즘 아침마다 두 개의 도시락을 싼다. 전날에 식사를 준비해 놓으면 다음날 아침 6시 40분에 일어나 도시락을 완성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단 10분. 오차범위는 5분 내외다. 도시락 두 개 중 하나는 복주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주의 남편 창섭의 것이다. 창섭은 임플란트 수술을 한 후로 한동안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했다. 그때부터 복주가 야채죽이나 빵을 도시락으로 싸주곤 했고, 창섭의 잇몸과 치아에 통증이 가라앉은 후로는 국물이 있는 메뉴로 발전했다.
치아가 멀쩡한 복주가 밥을 싸가는 이유는 복주가 일하는 마트의 직원 식당이나 푸드코트에서 파는 음식이 지겨워서다. 한식, 중식, 양식을 넘나들며 다양한 메뉴가 펼쳐져 있지만 바깥에서 만든 식사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바깥 맛’이 싫다. 볶음밥에서도, 순두부찌개에서도, 고등어 정식에서도 비슷비슷한 맛이 난다. 특히 복주가 절대 사 먹지 않는 것은 김치찌개다. 요즘은 어디서나 중국산 김치를 사용한다는 인터넷 뉴스기사를 읽은 후로는 김치가 들어간 메뉴에 눈길도 가지 않는다. 그나마 가끔 도시락을 챙기지 못한 날엔 7천원짜리 된장찌개를 사 먹는다. 푸드코트의 된장찌개에는 대충 썰은 두꺼운 두부 몇 조각과 대충 찢은 느타리 버섯이 두어 개 들어있다. 된장찌개에는 한국의 된장을 넣었겠거니 싶은 생각에 그나마 안심이 된다.
도시락을 싸간 날엔 점심 시간이 되면 주차장에 내려가 주차해놓은 차에 앉아 밥을 먹는다. 복주의 자동차는 복주가 거금을 들여 얻은 넓고 아늑한 한 칸의 공간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널찍한 운전석에 앉아 차에 시동을 걸고 히터를 튼다. 간단하게 싼다고 마음먹고선 이것저것 잔뜩 챙겨버린 도시락통을 꺼낸다. 보조석에는 믹스 커피가 담긴 보온병과 삶은 계란이나 토마토, 사과같은 제철 과일을 펼쳐 놓는 식이다. 운전석에 앉은 복주는 마트에 방문한 사람들이 복주의 차 앞을 무심히 지나다녀도 딱히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보온병에 담긴 밥이나 국은 정오를 지나도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다. 줄줄이 늘어선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밥을 한 숟갈 먹는다. 밥은 국물 한 숟갈에 금방 꿀꺼덕 목을 넘어간다. 급하게 먹는 습관을 고쳐보려 했지만 오래 씹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복주는 익숙한 한 끼를 술렁술렁 씹어 넘기며 생각한다. 직접 만든 밥과 국을 먹는 것은 스스로에게 응원을 해주는 거랑 비슷한 거라고. 속을 편안하게 채워주는 소고기뭇국은 세 건의 금반지 반품을 견디는 데에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변비에 좋은 시래기 된장국은 화장실에서 속을 개운하게 비우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내일은 김치찌개를 점심으로 먹을 예정이다. 아직 물이 끓지 않은 김치찌개의 옆에는 먹고 남은 닭볶음탕을 데운다. 냉장고에 넣어두어 걸죽해진 국물이 늘러붙지 않도록 자박하게 물을 살짝 더한다. 차가운 닭볶음탕이 팔팔 끓으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이다. 세련된 은색 왕 단추가 달린 각진 어깨의 검은색 자켓을 벗는다. 빳빳하니 팔이 잘 빠지지 않아 버둥대다가 팔 한쪽을 잡아 힘을 주어 당기니 옷이 허물처럼 벗겨진다. 자켓을 시원하게 벗고 나서야 갑갑한 줄도 모르고 하루종일 자켓을 입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조금 갑갑해도 세련되고 각잡힌 옷을 포기할 수 없다. 귀하고 비싼 금이나 은으로 된 악세서리를 파는 만큼 그에 맞는 격식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깔끔한 복장과 총명한 태도에서부터 자신감이 나온다. 사소한 디테일이 모든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복주는 휴대폰을 볼 때에도 어깨를 앞으로 굽히거나 고개를 아래로 숙이지 않는다. 휴대폰을 눈 가까이에 가져다 대지 않고 팔을 아래로 멀리 뻗어 멀찍이 둔다. 마치 몇백 억이 오고 가는 업무와 관련된 일을 처리한다는 듯이 여유로운 눈빛을 짓는 것이 포인트이다.
헐렁한 옷으로 갈아입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복주의 딸 유라가 만든 무거운 도자기 컵에는 누군가 먹고 남긴 진득한 커피가 눌러 붙어있다. 혹여나 컵을 깨뜨릴까 손에 힘을 단단히 주고 컵을 박박 닦는다. 물을 아무리 흘려대도 커피가 닦이지 않아 답답하던 찰나에 수도관이 고장이 나서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떠오른다. 되는대로 찬물을 세게 틀어 수압으로 커피를 닦아낸다.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티티~ 티티~ 프레절~ 프레절~”
유라가 유행하는 걸그룹 ‘르세라핌’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온다. 집안에서는 온통 매콤한 닭볶음탕 향과 김치찌개 향이 난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단단한 가죽 신발을 훌렁 벗고 곧장 부엌에 있는 복주에게로 걸어간다.
“더 높이 가줄게~ 내가 바랐던 세계 젤 위에~ 엄마, 나 왔어!”
분주하게 설거지를 하는 복주가 유라에게 밥을 먹었냐 묻는다. 커다란 냄비 두 개에서 팔팔 끓는 소리가 난다. 유라는 이어폰 너머로 작게 들려오는 복주의 말을 용케 알아듣고 안 먹었다고 큰 소리로 답한다. 후드티의 한쪽 팔을 손까지 길게 늘려 냄비 뚜껑을 조심히 잡고 열어보니 한쪽에 붉은 때깔로 푹 익은 닭볶음탕이, 다른 한쪽에는 맹탕같은 김치찌개 물이 바글바글 끓고 있다. 복주의 설거지가 끝나간다. 유라가 식탁에 수저, 젓가락, 밥그릇을 놓고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노래 가사를 크게 따라부르니 밖에서 참았던 흥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떨어져도 돼~ 앤타이~ 프래절~ 앤타이~ 프레절~”
유라는 오늘 낮부터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오전 10시 1분 전, ‘복지 노동과 법’ 수업에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했을 때 유라는 진이 다 빠졌다. 절대 늦지 않으리라는 전날 밤의 다짐이 무색하게 오늘 등굣길도 온통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갈아타야 할 버스가 몇 분 뒤에 오는지, 이 버스와 저 버스 중 조금이라도 빨리 가는 버스는 무엇인지 찾느라 온 정신이 곤두선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마른 낙엽을 밟으며 익숙한 길을 따라 뛰는 동안 유라의 마음도 퍼석퍼석 말라 갔다. 수업이 끝나고서도 속상한 마음이 남아 유라를 괴롭혔다. 아슬아슬하게 출발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을 뿐이지만, 일상 모든 통제력을 잃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라는 습관처럼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틀었다.
“난 지금 온 마이 웨이~ 갖다버려 줘 너의 fairy tale~”
정신없이 빠른 비트, 자신만만한 가사, 여자들의 단단한 목소리. 꼭대기로 갈 것이고 떨어져도 된다고 말하는 직관적인 가사가 흘러나왔다. 유라가 박자에 맞춰 걸으니 강의실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겨울 공기가 순식간에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제목과 가사에서 반복되는 ‘앤티 프래절’은 충격을 받으면 더 단단해진다는 뜻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뱀 ‘히드라’의 머리를 하나 자르면 두 개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단어의 뜻을 자세히 알아본 유라의 발걸음에 단단한 힘이 실리는 것 같았다. 다음 수업을 들을 강의실 앞에 도착했을 즈음엔 게으름 따위 날려차기 같은 것으로 거뜬히 걷어찰 수 있겠다는 뻔뻔하고 당당한 태도가 되어 있다.
유라는 닭볶음탕의 뚜껑을 연다. 허연 김이 푹푹 피어난다. 자박한 국물 속에서 깍뚝 썰어진 감자, 양파, 여러 종류의 버섯이 한데 모여 파글파글 끓는다. 복주와 유라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복주는 오늘 매장에서 들은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유라에게 전해준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해. 다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거야. 매장에 서있는 나한테 별 얘기를 다 해주는거야. 아들이 대기업에서 보너스로 천 만원을 받았다거나, 젊었을 때 큰 사기를 당했다거나... 난 이런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 전혀 모르는 남인 나한테 와서 자기한테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거든.” 복주는 마음에 남는 가장 커다란 일화를 유라에게 불쑥 꺼내어 놓는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