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산은
높이 876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고려와 조선조의 건국설화 가 얽혀있는
명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여 사방으로 전망이 빼어난 곳이다.
고려 때의 풍수지리에 통달한 도선국사는 이 산을 본 후,
천자를 맞이할 성지로 손색이 없다고 탄복하고 그후 송도로 올라가 초야에 묻혀있는
왕건에 백일기도를 권하자 왕건은 이곳에 내려와 목욕재계하고 기도드렸다.
드디어 관음의 계시가 나타나 고려건국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는 계시를 받고
그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여 '환희담'이라 친필로 바위에 새기고 암자를 지어 도선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조를 건국한 이성계도 당시의 무학대사의 권고에 따라 성수산에서
기도를 드렸더니 용이 나타나 세 번이나 몸을 씻어주었다는 '발용의 대몽'을 꾸고
돌기둥에 '三淸洞'이라 친필로 새긴 비석을 세웠고,
등극한 후에 이 암자의 이름을 상이암으로 고치고,
이곳에 어필각을 세워 그 안에 '삼청동'이라 쓴 입석비를 안치토록 하였다.
성수산은 또한 한말에는 이석용 장군이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운 전 적지로,
또는 6.25때에는 수난을 겪은 산이기도 하다.
♧ 상이암
상이암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성수산에 위치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인
도선국사가창건한 암자입니다 이후 태조 3년에 선사각여가 중수를 하였습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등극하기 전에 이곳 상이암 와서 치성을 드리던 중에 하늘로 부터
"앞으로 왕이 되리라.”는 소리가들려 왔다고 하여서 절 이름을 상이암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상이암는 태조 이성계와 인연이깊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절 입구에는 태조 이성계가 직접 쓴 “삼청동(三淸洞)”이라고 새긴비석도 있습니다
1894년 동학혁명때 불로 소실되어 1909년에 선사 대원이 중건하였으며
그 뒤의병대장이였던 이석용이 상이암을 근거지로 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왜군들의 방화로소실 다시 중건했지만 6·25 때 다시 불에 탑니다
현재의 건물들은 1958년에 상이암 재건위원들이세운 것입니다
전하는 유물로는 혜월과 두곡의 부도 2기가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