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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셈의장막재건자
장소주의(Localism)는 거부하고 예배 모임은 사수하라
(요 4:5~24)
昔根 유요한 목사
(브니엘교회 담임)
요단강은 성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강입니다. 이 강의 발원지는 북쪽의 헤르몬산입니다. 헤르몬산 기슭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흘러 갈릴리 호수를 지나 사해에 이릅니다.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도 이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단강 서편에 길쭉한 땅이 있는데 한 가운데 사마리아가 있고, 북쪽에 갈릴리 바다를 중심한 갈릴리 지방이 있고, 남방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다 지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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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지방과 유다 지방에는 순수한 유대인이 살고 있고, 사마리아 지방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는 혼혈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 곧 앗수르에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때, 앗수르 제국이 정책적으로 일부는 끌고 가고 일부는 거기 놓아두고 이방인들을 이주시켜 같이 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유대인과 유입된 이방인들이 혼인을 하여 피가 섞인 혼혈민족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앗수르는 주전 609년에 신흥강국이었던 신바빌로니아, 곧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멸망합니다. 그리고 남유다 왕국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합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140년 후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정책은 앗수르와 달랐습니다. 바벨론은 앗수르처럼 소수의 백성을 남겨두고, 다른 민족을 이주시켜 피를 섞는 정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유다는 순수 유대인들이 보존되었습니다.
그 후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남방에도 들어가고 또 북방 갈릴리 지방에도 정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말씀드린 바처럼 남쪽의 유대와 북쪽의 갈릴리 부근에는 혈통이 순수한 유대인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대단히 혈통을 중시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을 싫어하고 혐오하였습니다.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은 구원의 조건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아무리 잘 나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유대인들은 아무리 못나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런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은 타기(唾棄)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唾棄: 침 타, 버릴 기 - 더럽게 여기거나 업신여겨 돌아보지 않고 버림)
해마다 북쪽에 있는 갈릴리 사람들이 남방의 유대로 올 때에는 사마리아로 직통해서 오면 가까울 터인데 그렇게 오지를 않았습니다. 일부러 요단강 동쪽 지방을 거쳐 우회를 해서 여리고 지점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보통 유대인들이 상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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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께서 한 번은 예루살렘에 오셨다가 갈릴리에 돌아가시면서 그런 상례를 무시하고 사마리아를 관통해 갔습니다. 그렇게 지름길을 가시던 예수님은 피곤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시고자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에 홀로 앉아 계셨습니다.
그 때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 여자는 첫 눈에 예수님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복장이나 생김새나 유대인의 특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이상한 유대인이다. 왜 그들의 관례를 따라 돌아서 가지 않고 이곳에 왔을까” 생각하면서 가까이 왔습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가까이 왔을 때 “내게 물 좀 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 네게 물 좀 달라고 하는 내가 누구인 줄을 알았더라면 오히려 내게 구했을 것이고 나는 네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생수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생수라고 하면 땅 밑에서 솟아나는 우물물을 말합니다. 그녀는 “이 우물이 얼마나 깊은데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 생수를 주겠다고 합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왜 갑자기 남편을 불러오라는 것이지... 남편을 불러서 물을 긷게 하시려는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사마리아 여인은 그렇게 대답했을까요? 그녀는 정식으로 혼인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기는 하다.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남의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여자는 남의 남편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자 그녀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여, 내가 보니 선자자이십니다.”(19절)
이 여인은 예수를 처음에는 한 유대인으로 보았으나 이제는 ‘주’라는 존칭을 붙여서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굴곡진 삶을 밝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여러 남자들과 살아봤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통찰력에 놀란 사마리아 여인은 한 평범한 유대인으로 생각하던 예수에 대한 태도가 일변하여 더 이상 예수를 범상한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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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소 신학적인 이슈인 “예배 문제”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상대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예배 장소’에 대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과의 숙제를 논하였던 것입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산’은 ‘그리심산’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거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혼혈족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지역에 ‘수가’라는 곳에 가면 야곱의 우물이 있는데 오른쪽에 ‘그리심산’이 있고 왼쪽에 ‘에발산’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산당을 세워두고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이 산이 진짜 예배 장소라고 주장했습니다. 여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21절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대단히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요카난이 예루살렘에 기도하러 가는 도중 그리심산을 지나갈 때, 한 사마리아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예루살렘에 기도하러 간다’고 대답을 하니, ‘이 거룩한 산에서 기도하는 것이 그 저주받은 집에서 하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고 하였다.”(Bereshith Rabba)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장소주의”(Localism)를 깨뜨린 것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장소주의”는 “Localism”이라고 하는데, ‘지방색’ ‘특정 장소에 대한 애착’ ‘지방 편중주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예배 장소에 있어서 그런 ‘장소주의’를 배격한 것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는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되 산에서나, 들에서나, 바다에서나, 실내에서나, 동굴에서나, 감옥에서나 혹은 길을 가면서 도상에서나 그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으므로 아무데서나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장소만 예배의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21절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예수님은 ‘장소주의’(Localism)를 깨뜨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질서 속에서 성도들은 그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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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모이지 말라”는 뜻입니까? 성도들이 어떤 특정 장소나 공간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그렇게 이해했다면 그것은 성경을 곡해한 것입니다. 어느 곳이나 ‘예배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 더 이상 특정 장소에 같이 모여서 예배하지 말라는 의미는 전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못 가르치는 유명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이재철 목사(100주년기념교회 전 담임)입니다. 이 목사는 최근 CBS가 운영하는 유투브 채널 ‘잘잘법’(잘 믿고 잘 사는 법)이라는 영상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코로나19로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온라인 예배라는 대포를 쏘셨다. 사람들은 예배당 밖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다.”
“2천년 교회 역사상 매 주일 예배드리던 약속된 특정 공간, 절대적으로 신성하게 여기던 그 공간을 벗어나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 특정 공간을 뛰어넘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영이신 하나님께 무엇에도 구속받거나 예속당하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시작하는 그 시점의 기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예배가 시작되는 기회의 서막이라고 한다면 지금이 제2의 종교개혁이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종교개혁은 특정 공간을 절대화해서 오히려 그 특정 공간이 이 산 저 산도 아니고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드리라고 하신 그 주님의 말씀에 걸림돌이 되어 왔던 잘못된 길에서의 출애굽(Exodus) 하는 것이다.”
이재철 목사는 그간 기독교인들이 특정 공간인 예배당을 절대화, 신성시하여 예배당 안에서 예배했는데, 코로나19 상황에서 하나님이 ‘온라인예배’라는 대포를 발사해 예배당 밖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며 이를 제2의 종교개혁이 도래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이 목사는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이 산도 저 산도 아닌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걸림돌이 된 그릇된 예배라고 비판하면서 ‘온라인예배’는 그 잘못된 길에서의 ‘출애굽’(Exodus)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예배당에서의 현장예배는 잘못된 예배가 결코 아닙니다. 특정 공간인 예배당을 신성시, 절대화했다고요? 거짓말입니다. 누구도 예배당 건물을 절대화 혹은 신성시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배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길 뿐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재철 목사가 예수님의 교훈을 곡해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소주의’(Localism)를 거부했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21절). 그러나 이 말씀이 성도들은 더 이상 교회로 모이지 말라는 뜻입니까? 즉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지 말라는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예배의 장소’가 어디든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어디든지 모여서 예배공동체를 세우고 함께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아무데서나 예배할 수 있다는 뜻이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특정 장소나 특정 공간에 모여서 예배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목사는 순진한 성도들을 기만한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말세의 성도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권하고 있습니다.
히 10:25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모이기를 중단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는 일에 힘씁시다 (현대인의 성경)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신약교회의 모(母)교회로서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따라야 할 롤 모델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지 않습니까? 초대교회는 히브리서 10장 25절 말씀처럼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개역 한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라인예배’라는 대포를 쏘셨다”며 “제2의 종교개혁이 도래했다”는 이 목사의 교설은 기만적인 주장입니다.
작금의 ‘온라인예배’는 정부가 소위 비대면 예배를 강요하여 수개월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천주교와 불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유독 교회만 예배와 집회를 제한합니다. 문 정부는 애초에 교회를 희생양으로 삼았고, 그 연장선에서 기독교 예배를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반기독정권이 방역을 구실로 교회를 탄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온라인예배를 ‘하나님’이 대포를 쏘신 것이라는 이 목사의 발언은 주님의 성호를 오용하고 망령되게 일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포를 쏜 게 아니라 악한 마귀가 쏜 것입니다. 그 대포는 주님의 교회를 해체하고 무너뜨리려는 마귀가 쏜 것입니다. 이미 정부의 조치 때문에 문을 닫고 없어진 교회들이 도처에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재철 목사가 온라인예배를 출애굽(Exodus)에 비유한 것은 출애굽 사건에 대한 모욕입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인 것입니다.
또한 이 목사는 그것을 두 번째 종교개혁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런 발언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방역을 구실로 교회의 예배를 짓밟고 기독교를 박해하는 문 대통령이 되레 루터처럼 개혁의 깃발을 든 위대한 인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철학의 장르(genre) 가운데 ‘개똥철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국어사전은 ‘개똥철학’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생각을 대단한 철학인 양 내세우는 것” “엉터리 철학을 속되게 이르는 말” 슬프게도 신학에도 ‘개똥신학’이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의 이론이 ‘개똥신학’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16세기 종교개혁 이래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수녀를 초청해 '신앙대담'이라는 이벤트를 벌였던 이재철 목사가 '종교개혁'을 운운할 자격이 있습니까?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라는 노래 가사가 떠오릅니다.
온라인예배가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부모가 비신자인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어떻게 집에서 ‘온라인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전도한 새 신자들은 어디에서 양육과 케어를 받을 수 있을까요? 또한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는 노인들은 어떻게 ‘온라인예배’를 드리겠습니까?
100보를 양보해서 집에서 소파에 앉아 ‘온라인예배’를 드린다 해도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까? 온라인예배는 성도들이 경건생활을 유지하는데 엄연히 한계가 있습니다.
악한 마귀는 홈런을 날렸습니다! 사탄은 지금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기쁨의 춤을 추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가 ‘온라인예배’라는 대포를 쏜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는 성도들을 속이고 기만했습니다.
이 목사는 하나님이 온라인예배라는 대포를 쏘셨다며, 온라인예배를 ‘종교개혁’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배당에서 현장예배를 드리려고 애쓰고 있는 교회들은 개혁 거부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졸지에 그들은 하나님을 잘 못 믿는 부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재철 목사 자신은 의롭고 개혁적인 인물이 되시는 거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결국 이 목사는 자신을 개혁적 인물로 부각시키면서 현장예배를 드리고 있는 목사와 성도들을 능욕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리새적 위선인데, 이 목사도 자신이 쓴 책 “새신자반”에서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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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목사가 쓴 <새신자반>은 1994년 처음 발간되었고, 2008년 표지를 바꾼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기독서점에서 꾸준히 판매되고 있는 책입니다.
<새신자반>은 목차가 총 10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제9장의 제목은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입니다. 이 단원에서는 바른 교회생활의 기본적 요소들 다섯 가지 -1.주일성수 2.전도 3.봉사 4.친교 5.헌금– 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주일성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재철 목사는 ‘주일성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반드시 지킨다. 안식일을 안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행위이다.
둘째, 반드시 거룩하게 지킨다.
셋째, 반드시 예배당에 나와야 한다.
세 번째 조항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재철 목사는 “반드시 예배당에 나와야 한다”는 소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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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반드시 예배당에 나와야 한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3~24).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이다. 요즈음의 용어로 해석하면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 그대는 주일 예배를 그대 집에서 그대의 가족과만 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예배당 아닌 그대의 집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그대가 꼭 확인해야 할 조건이 있다. 집에서 드리는 예배가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보다 더 마음이 집중된 예배인가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집에서 평일의 가정예배가 아닌 주일 예배를 드릴 때, 그대 가족 모두가 예배당에서처럼 주님께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출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역시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함께 기도와 찬송을 드리며,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을 부르는 예배당이라야 우리의 초점이 더 잘 맞추어지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예배당)에서 드리는 것이 좋다. 주일아침 온 가족이 예배드리기 위하여 함께 ‘지정하신 곳’을 찾는 것 자체가 더없이 아름다운 훈련이요, 헌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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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사는 출애굽기 20장 24절의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배당’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당신의 이름을 기념하게 한 곳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는 반드시 ‘예배당’에 나와서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이다. 요즈음의 용어로 해석하면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목사는 “가정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지만 그것은 예배당에서처럼 주님께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역시 주일 예배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함께 기도와 찬송을 드리며,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을 부르는 예배당 곧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서 드리는 것이 좋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주일 아침 온 가족이 예배드리기 위하여 함께 ‘지정하신 곳’을 찾는 것 자체가 더없이 아름다운 훈련이요, 헌신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재철 목사는 주일을 성수하려면 반드시 예배당에 나와야 한다고 거듭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21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여 예배당에서 성도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를 그릇된 예배라고 매도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온라인예배’라는 대포를 쏘셨다며, 제2의 종교개혁이 도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재철 목사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단물과 쓴물을 동시에 내는 격입니다. 가위 자기모순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목사는 자기 발등을 찍은 겁니다.
소위 ‘온라인예배’가 제2의 종교개혁이라면 왜 자신은 목회 사역에서 진작 그것을 적극 실천하지 않았습니까? 왜 <새신자반>에서 주일성수의 조건으로 “반드시 예배당에 나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까?
이재철 목사는 왜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왜 한 입으로 두 말을 합니까? 왜 예배당에서 현장예배를 드리는 신실한 성도들을 전부 몹쓸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바리새적 위선 아닙니까?
악한 시대 상황에 재빠르게 편승하여 말을 바꾸고 자신을 개혁적인 인물로 부각시키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목사는 먼저 ‘새신자반’이란 책부터 전부 소각해야 합니다. 그게 바른 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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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거짓 교사들의 기만적인 교훈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환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변신하지 말고 굳세게 내 믿음을 지킵시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 ‘남은 자’가 됩시다.
히브리서 10장 25절 말씀과 같이 모이기를 중단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는 일에 힘쓰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교회는 모일 때만 존재합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로서 “부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형교회는 어디서든 성도들이 모일 때만 존재합니다. 교회로 교회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 교회론
cafe.daum.net/ALILANG/ETNB/610
하나님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을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 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왜 하나님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실까요? 그 까닭은 이러한 연합이 ‘보배로운 기름’과 같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붓듯 형제간에도 연합할 때 큰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귀한 약속을 항상 경험하고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2020년 10월 25일 주일예배 설교원고)
https://www.youtube.com/watch?v=LAZVkHdRISA
☞관련기사: <100주년기념교회 담임 이재철 목사의 괴이(怪異)한 사상>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 수녀를 초청해 ‘신앙 대담’>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cafe.daum.net/ALIL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