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앞바다 부채길의 비경(秘境)
오 영 환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강릉 앞바다로 겨울 여행을 갔다. 봄이 가까워 오는 계절이라 그런지 겨울 날씨 답지 않게 포근했다. 출발할 때는 겨울 점퍼를 입었지만 강릉에 도착해서는 간편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동안 가족들은 자기의 일터에서 생업에 열중하다 오랜만 에 겨울 바닷가 여행을 하니 마음이 새롭다고 한다. 하기야 나도 은퇴 후 무료한 시간을 보냈으니 이번 겨울여행이 많이 기다려졌다.
강릉 앞바다 부채길은 전국 최장거리 해안단구(海岸段丘)로 천연기념물 제437호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힐링(healing)코스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또한 옛날의 지각변동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바닷가 이기도하다. 심곡 항에서 출발 하여 정동진 까지 약 2.86 km의 부채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해바다의 푸른 물결과 부채길에 펼쳐진 웅장한 기암절벽은 찾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푸른색 바다를 배경으로 병풍처럼 이어지는 검붉은 색의 웅장한 바위는 깎아질듯 한 절벽에 매달려 금방이라도 떨어지고 무너질 것 같다. 곁을 지나면서 아찔한 마음이 들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소나무이다. 홀로 외롭고 쓸쓸히 자라고 있다. 절벽에 있는 바위틈에 일부러 소나무씨를 심을 리도 없다. 어디서 소나무씨가 날아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넓은 땅을 뒤로 한 채, 왜 하필이면 바위틈으로 날아와 삶을 시작하고 정착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 작은 소나무는 가꾸지도 않고 돌보는 사람도 없다.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은 웅장한 바위만 바라보며 즐거워한다. 바위틈에 있는 작은 소나무는 무관심으로 지나친다. 왜 그럴까? 넓은 바닷물에 가려서 일까? 아니면 큰 바위에 묻혀서 일까? 하지만 작은 소나무는 사계절 내내 푸르른 솔잎의 향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로 내어준다.
바닷가의 부채길은 거의 철제 구름다리이다. 여러 개의 구멍이 둥그렇게 뚫려있으며 다리의 길이는 약 2Km 정도가 된다. 10여m 다리 밑으로는 출렁이는 바닷물이 훤히 보인다. 바위에 부딪치는 물소리도 크게 들린다. 부채길을 걸으면서 다리 밑으로 출렁이는 바닷물이 신기하여 잠시 내려다보니 갑자기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부채길 가장자리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눈을 감고 멀미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민망스런 생각이 들어 멀리 보이는 바위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곁에 있던 아내는 나를 부추기고 물수건을 이마에 대주었다. 옛날 어릴 적 버스를 타면 차멀미를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노년기의 불청객인 ‘바다멀미’가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씁쓸한 생각이 가슴으로 밀려왔다.
내 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간다. 부채길은 반드시 우측통행을 해야 한다. 구름다리 난간을 오른 손으로 잡으며 천천히 걸었다. 이때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내 곁을 지나치며 힐끔 쳐다본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리한다. 아마도 나의 거추장스러운 느림보 걸음걸이에 답답했을 거다. 순간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도 다가왔다. ‘너희들도 늙으면 나와 똑 같을 거다’라고 혼잣말을 해보았다. 내 곁을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내는 나보다도 더 힘들어한다. 서로 의지하며 부채길을 천천히 걸었다. 어느새 아내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힌다. 그리고 잔주름이 조금 보인다. 거칠어진 손등도 눈에 들어왔다. 순간, 옛날 우리 집으로 시집 올 때의 아내 모습이 그려졌다. 삶의 세월이 우리 곁을 빠르게 지나치며 손짓을 한다. 천천히 따라 오라고 ․ ․ ․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살며시 닦아 주었다. 아내는 고맙다는 눈인사를 한다. 이것이 노년기 부부의 사는 정(情)인가보다.
바다 부채길을 반쯤 돌고 있을 때 바닷가에 우뚝 솟은 부채바위가 눈에 띄었다. 무더운 여름날 나무 그늘 밑에서 노인들이 갖고 있는 둥그런 부채모습을 빼 닮았다. 부채바위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철제 난간으로 가파라 중간쯤 오르다 힘이 부쳐 되돌아왔다. 가끔 바다갈매기가 부채바위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평화로운 모습의 갈매기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면 아는 듯 가까이 오다가는 금방 방향을 바꾸어 멀리 사라진다. 아마도 먹이를 던져 주지 않아 그런가보다.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투구바위도 가까이서 보인다. 투구를 쓰고 바다를 지키는 장수의 모습을 닮았다하여 투구바위라 명명(命名)했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의 형상이라는 설도 있다. 너무도 신기하고 아름다워 사람들이 잠시 머물기도 한다.
검푸른 바닷물의 파도가 출렁이며 다가와 바위에 부딪친다. 수많은 물방울이 생기며 흰색으로 변한다. 부딪치는 소리도 시시각각 다르다. 철석 이는 큰 소리와 살며시 닿는 작은 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파도가 출렁이며 다가올 때는 화가 난듯하지만 바위에 부딪치는 순간 금방 평온해진다. 그리고 파도가 나갈 때는 바다 모래를 조금씩 남긴다. 희고 깨끗한 모래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도 바다 모래알 같이 희고 깨끗함을 닮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지 하고 자문자답을 해 본다
가끔 나는 겨울 여행을 한다. 무더운 여름보다 겨울철의 여행이 더 멋과 추억을 담아올 수 있어서이다. 그래서 이번 겨울 여행도 강릉 앞바다 부채길로 간 것이다. 힘겨운 여행이었지만 부채길을 걸으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비경(秘境)을 추억으로 만들고 가슴에 담아왔다. 평생 잊지 못할 노년기 겨울 여행이었다. 내 생전에 또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회심한 생각이 들었다. 심곡항 바다 위를 평화롭게 나는 갈매기를 뒤로한 채 아쉬운 겨울 여행지인 강릉을 떠났다.
프로필 사진 및 약력(오영환)
약 력
◆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 (전) 제천교육지원청 교육과장. 청주봉정초등학교 교장
◆ (현) 청주대성고등학교 생활지도사
◆ 효동 문학상, 제5회 충북대학교 수필문학상
◆ 푸른솔문학 신인문학상 (수필가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