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2023.5.28. 성령강림주일, 웨슬리회심기념주일)
내게 찾아오신 성령
고린도전서 12:3-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다. 성령강림주일은 교회력 끝 주일까지 이어진다. 올해는 26주일 동안이다.
9월 첫 주일부터는 창조절과 병행한다. 1년의 절반인 성령강림절 동안 일용할 영성, 일상의 영성을 통해 영적 성장과 성숙을 꾀하는 것이다.
모든 교회의 출발점은 주님의 부활이지만, 제도적 교회는 성령강림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도행전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성령강림과 함께 사람들은 영적인 능력을 얻는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노인들도 꿈을 꾼다. 영적인 능력은 희망의 언어로 가득하다.
오늘은 마침 웨슬리회심기념주일이다. 감리교회 창시자 존 웨슬리는 전형적인 영국 국교회 교도로 머리가 차고, 가슴도 찬 사람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유명한 회심 사건 이후 존 웨슬리는 그날을 회고하며 ‘가슴이 뜨거워졌다’(warm hearted)고 일기에 적고 있다.
존 웨슬리의 경건주의 운동은 성령의 감동으로 가능하였다. 사회에 대해서는 합리적 이성을 지니고, 인간에 대해서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모습이었다.
1)
성령의 강림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보혜사가 오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
그 영에 대해 세상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성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만 알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하시자 놀란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가 그 현상에 대해 설교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차신 분이었는데, 당신 뿐만 아니라, 자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전해 주셨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동방정교회가 성령강림사건을 그린 이콘을 보면 성령을 상징하는 불꽃이 12제자의 머리 위마다 임하는 모습이다. 성령은 집단적이 아니라, 각각의 사람에게 또 ‘내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렇다. 성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이미 함께 하신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3b).
과연 나는 어떤가?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사람인가? 성령의 감동으로 살아가는가? 그 속사람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는가?
성령이 없는 교회는 곧 빈 교회이듯이,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하지 않고, 그 은총 안에 살지 않는다면 몸은 멀쩡하나, 영적 생기를 잃은 그리스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는 압니다”(요일 3:24/ 새번역).
바울 사도는 말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일’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 불가능하다. 누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믿는 것은 이미 성령이 내주(內住)하셔서 활동하신 결과이다.
성령은 사랑의 선물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이런 기도문을 남겼다.
“성령이여,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곧 모든 미움과 모든 괴로움을 없애는 그 사랑을 나에게 주십시오.”
2)
성령이 주시는 선물들을 가리켜 이를 ‘은사’라고 한다. 은사(恩賜)는 그리스어로 카리스마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의미한다. 그냥 보통 선물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선물을 가지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4-5).
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은 무엇인가? 바울은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은사를 아홉 가지 소개한다. 모두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필요한 은사를 나열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얼마나 다양한 은사가 있는가가 아니다.
이렇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 분이 바로 같은 성령이라는 사실이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11).
성령은 ‘믿음과 사랑의 선물’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와 그 나라가 자라고, 꼴을 갖추고, 든든하게 하신다. 은사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누라고 내게 주신 선물이다. 이러한 은사로 ‘섬김’(디아코니아)으로써 자신과 세상을 바꾸어내는 것이다.
각 사람이 어떤 은사를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그 은사를 주신 ‘성령의 뜻’이 더욱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건강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과 직결된다. 우리는 매 순간 성령의 교제와 은총을 내 삶 한복판에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현재진행형으로 일하신다. 성령은 내 삶의 모습에서 그 동행 여부가 드러난다.
바울은 성령의 선물로 아홉 가지 은사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아홉 가지 상태를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고 하셨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새 번역).
지금 내 삶 속에 사랑이 있는가? 기쁨과 평화 온유함이 있는가? 성령의 은총 안에 머물라.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라! 성령의 선물을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
바울은 신앙공동체를 가리켜, 즉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12)이 된 교회를 강조한다. 더 나아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13)이 된 교회를 말하고 있다. 얼마나 귀한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의미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주님의 사랑과 인격과 희생을 통해 형성하고, 유지된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를 가리켜 ‘한 몸’이란 의미로서 공동체라고 부른다.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 구별이나 차별이 없다. 한 성령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선물인 다양한 은사는 공동체 안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은사는 서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것이지,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공동체는 고난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곳이다. 서로 존경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높이는 곳이다.
성령강림절기는 생명의 풍성함을 돕는 기간이다.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은 유일회적 사건이지만, 개인의 성령체험은 일상적이고 반복되는 산 체험이어야 한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 열정을 필요로 한다. 진리를 사모하는 뜨거움,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 현실에서 경험되는 산 체험, 사랑에 목말라하는 간절함이 요청된다.
이렇듯 성령강림절기는 영적인 성장과 내면적 성숙을 꾀하는 푸른 절기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향해 권면한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 5:16).
돈 보스코는 영적 성숙의 과정으로 ‘일상(日常)의 영성’을 이야기한다. ‘일상의 영성은 매일매일 일상의 삶에 충실한 영성, 매일매일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영성, 매일매일 가족과 이웃에게 충실한 영성, 매일매일 주어지는 소소한 업무들에 충실한 영성, 더 나아가 매일매일 와 닿는 고통스런 상황들 즉 십자가까지라도 기꺼이 수용하는 영성’이다.
성령의 선물은 ‘일용할 양식’처럼 일상의 모습과 체험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영이신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진실한 삶의 모습이다.
3)
올해는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회개운동 120주년이다.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가면 가장 중심의 자리에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 영적대각성 기념비가 있다.
2006년 5월, 존 웨슬리 회심 268주년 기념일에 한강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양화진 들머리에서 세운 것이다. 이듬해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100년 이전부터 그곳에는 하디선교사의 어린 두 딸이 묻혀있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묘비에 두 딸의 이름 마리(2일)와 마가렛(6살)이 새겨져 있다. 마치 우리 민족의 아픔의 역사처럼 작은 묘석은 빛바래고, 깨어져 있었다.
무려 한 세기가 바뀌어 두 딸의 무덤 자리에 건립된 영적대각성 기념비는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아버지가 두 딸의 묘석을 감싸고 있다.
하디 목사는 생애 45년 동안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생명의 복음을 전한 신실한 감리교 선교사이다. 그는 토론토의대를 갓 졸업한 의료선교사로 이 땅에 찾아왔다. 1890년 일이다. 당시 흔들리는 조선 땅에 두 발을 디뎠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의 운명과 같이 고난을 자처하였다.
특히 하디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영적부흥을 위해 헌신하였는데, 그 자신이 고백한 공개적인 참회가 불씨가 되었다. 1903년 8월, 저 유명한 원산부흥운동의 불을 붙였고, 마침내 1907년 평양대부흥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오늘을 가능케 한 영적 자취로 남았다.
오늘 색동주보에 실린 박희산 장로의 칼럼 ‘하디에게 그 길을 묻다’를 읽어보면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꼭 10년 전인 하디 선교사의 회개운동 110주년에 감리회 본부 출판국에서 <소설 하디> 독후감 공모가 있었다. 색동교회에서 모두 16명이 참여하여 단체상 1등과 개인상 3등을 차지하였다. 처음에는 몹시 불편해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참여한 분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억지로라도 쓰기를 잘했다는 것이다. ‘나를 돌아볼 기회였다’였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이야기하는 기회가 되었다고도 하였다. 누구든 인생의 어려운 숙제든, 독후감처럼 부담스러운 숙제든, 하나님 앞에서 말하기 시작하면 진심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그와 대화를 시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려거든 하나님에 대해 늘 이야기하라. 우리가 입버릇처럼 내 남편 흉을 보든, 우리 아이 자랑을 하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까닭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꽁꽁 싸매어 두고서는 사랑을 표현하기 어렵다.
올해도 공모에 참여하려고 한다. 색동공동체가 그만큼 자랐으니 적어도 두 배 이상은 참여할 것을 부탁드린다. 다양한 형식으로 시도하면 더 의미 있을 것이다. 단체상금을 탐내서가 아니다. 함께 은혜를 받는 기회가 될 것이다.
예배를 마칠 때 목사는 축도로 성령의 임재를 간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이를 삼위일체 축복문이라고 부른다. 날마다, 때마다,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처럼 예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성령과 친교 하는 삶’을 살도록 간구하며 복을 비는 것이다.
‘성령의 교통하심’에서 교통(Communion)은 성령과 공감하는 삶, 교감하는 생활, 친밀한 관계 속에서 진실한 나눔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령의 내주하심, 충만하심 그리고 교통하심으로 살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풍성한 선물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