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로 가는 좁은 길이 초록빛으로 출렁거린다.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 거동사 가는 발길 따라 진록의 풀 내음과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 단향이 번져난다.
때 이른 폭염 주의보가 내려졌지만 산길에는 여전히 선선한 골바람이 인다.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된 거동사 대웅전은 신라의 건축양식임을 말해주거니와 정교하게 조각한 국화 꽃 문살 문양이 보는 눈을 화사하게 한다.
거동사 마당 담 속에 새겨 넣은 듯한 입간판은 퍽 생경스럽다.
절집에 걸맞잖게 ‘산남의진 제4차 결성지’라는 글귀와 함께 ‘국가보훈처 지정 보훈시설’로 명시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대웅전 처마 밑에 지난달 30일, ‘삼남의진 순국선열추모제’를 올린다는 현수막까지 내걸려 있다.
◆경은 화천지수를 아는가
1906년 2월, 이른 아침 정환직은 고종의 부름에 근정전에 들렀다.
근엄한 자태의 고종황제가 부드럽고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환직을 반겼다.
“경을 기다렸네”
환직은 황제의 반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몇 해 전 종묘에 불이 났을 때 황제를 업고 궁궐 밖을 뛰쳐나갔던 그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며 등 뒤로 갑자기 황제의 따뜻한 체온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환직은 머리를 조아리고 황제의 부름에 응대하였다.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고개를 들자 긴 곤룡포 자락의 바람결이 살짝 얼굴에 와 닿았다.
고종황제가 자신에게 한걸음 다가와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왠지 전과 다르게 긴장감이 돌았다.
황제가 자신에게 말을 건넨 것이 비밀명령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은 화천지수를 아는가”
어명을 받든 환직은 어전을 황급하게 물러나왔다.
‘화천지수’란 수세에 몰린 제나라(BC 7년)의 경공을 충신 봉추부가 위기상황을 모면케 했던 고사가 아니던가. 경공의 옷을 바꾸어 입은 봉추부가 목이 마르다며 경공에게 화천의 맑은 물 한잔을 떠 오라하여 도피하게 한 이야기다.
환직은 자신에게 화천의 물이 되어달라는 황제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옥죄어 나가다 못해 1905년 을사늑약을 강행한다.
무참하게 짓밟힌 나라 안의 선각자들은 일본의 부당성에 목숨을 내던졌고 지역마다 의병으로 항거하였다.
고종은 이준 등의 밀사로 하여금 일본의 침략야욕을 국제회의에 알리려 하였고 정환직에게는 적지 않은 군사지원금을 내놓으면서 거병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궁궐을 나선 동엄 정환직은 서둘러 장남 용기를 불렀다.
“너도 알다시피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고향으로 내려가 창의를 서둘거라. 나는 한양에서 너를 지원하마”
단오 정용기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비장한 아버지의 눈빛과 얼굴을 보았다.
결의가 서린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거친 숨소리가 배어 있었다.
만민공동회 등 사회 활동을 하던 용기도 올 것이 왔다는 듯 기꺼이 나라 위해 한 목숨 바치리라 다짐하고는 서둘러 영천 자양으로 돌아왔다.
용기는 먼저 재종 동생이자 함께 시국을 걱정해왔던 순기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포항의 이한구와 그의 지인 손영각을 찾아 거병을 논의한 뒤에 영천과 포항, 영덕 및 청송 등 24지역에서 71명의 연락책을 편성하고, ‘산남창의진’(산남의진)의 붉은 깃발을 높이 올렸다.
“…왜적의 모욕과 악행이 날이 갈수록 극심하여 가는 이때 비록 우리들의 재질이 용열하지만 국세를 만회하고 백성을 구원할 결의를 다진다.
한 사람 두 사람 동지들과 더불어 하늘에 맹세하고 민간 군사를 모아 충정을 널리 펼치고자 하니 존비귀천 가리지 말고 누구든지 합심 단결하여 구국에 나서자…”(격문을 재구성)
600여명의 대원들은 향리의 유생을 비롯하여 전직 군인과 관리, 포수와 농민 그리고 일반 노동자 등 다양한 이력을 가졌다.
민초들의 살아있는 의기에 바탕을 둔 용기는 1906년 3월, 의진의 본부를 자양면 충효리에 두고 동북쪽 포항 경계의 동대산을 중심으로 동남북의 산악지대에 분진을 냈다.
그리고 영덕~강릉 등 동해안 일대에서 활약하던 신돌석 부대와 연계하여 강원도로 북상한 다음 이어 다시 서울로 진공해 왜적의 무리를 몰아내겠다는 목표를 천명하였다.
◆산남의진, 거동사에서 다시 살아나다
정용기를 앞세운 산남창의진은 그해 4월, 동해 북상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포항시 신광(우각)에서 정용기가 경주진위대의 간교로 체포된다.
전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출정 5개월 만에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국지적 유격전을 계속했고 9월에 이르러서야 정용기는 겨우 석방된다.
“우리는 다시 심신을 추스르고 다음해 5월까지 태백산을 넘어 북으로 진군해야 한다.
아울러 나는 강릉에서 북상해 오는 의병들을 영접할 것이다”
영천으로 내려온 환직은 그간 부진해진 의진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용기를 찾아 진영으로 들어선 반가운 손님이 있었다.
“나도 이제 형님과 함께 목숨을 걸겠습니다” 우재룡이었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대구의 우재룡, 울산의 김성일 등 군간부들이 입단을 서약하고 들어온 것이다.
1907년 여름 한더위가 물러서면서 산남의진은 한층 전투력이 강화된다.
증편된 의진은 동쪽의 포항, 서쪽의 신령 그리고 북쪽으로 청송 등지를 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전과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다 강원도로 북상 도중이던 10월,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일본군(영천수비대)이 숙영한다는 정보를 접수한 용기는 이한구를 불렀다.
“중군장, 입암서원과 일제당 부근에 은폐했다가 어둠이 걷히는 새벽녘에 일본군을 섬멸하시오”, “예, 이미 공격 작전을 세워놓았습니다.
훈련된 우재룡과 포수 김일언 그리고 이세기를 퇴로 차단조로 매복시켰습니다”
대원들은 각자의 임무 위치로 들어섰다.
가을 밤 바람에 나뭇잎들이 일렁거렸다.
잘 익은 알밤이 톡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내가 풍겨왔다.
구슬프게 우짖는 소쩍새 소리에 날이 더디 샐 것만 같았다.
매복에 들어선지 그리 오래지 않았을 때였다.
“타당 탕…” 이세기의 호로에서 정적을 울리는 총소리가 귀를 놀라게 하였다.
총성은 순식간에 산촌마을을 뒤덮었다.
작전이 크게 어긋나고 말았다.
정용기와 이한구 등 본진이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대장 정용기를 비롯해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40여명의 대원들이 전사하고 입암은 초토화되었다.
핵심간부를 잃은 산남의진은 또 한 번 존패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정환직은 참담했다.
아들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남은 대원들과 함께 제3차 의진을 결성하게 된다.
64세의 노 의병장은 그가 일본군에 의하여 순국하던 12월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대구~경주~영천뿐만 아니라 영덕~흥해~청송~군위(의흥) 등지에서 활발한 항일전을 벌인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의진의 전력은 일제 군경에 비하여 현저히 하락되어 갔고 전반적인 전황조차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환직은 끝내 북상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그해 섣달, 포항시 청하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만다.
잔디처럼 질기고 모진 민초들의 창의진, 산남의진은 물러서질 않았다.
1908년 2월 18일, 거동사 마당은 대원들과 민초들이 통곡하는 소리로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입암전투에서 사망하고 옥중에서 죽어간 순국자들의 넋을 달래고자 위령제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최세윤을 대장으로 한 제4차 산남의진이 결성된다.
최세윤은 1908년 7월, 그가 일본군에 체포될 때까지 경북 일대에서 국지적 유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7월 이후 의진은 쇠잔한 조직을 놓고 대원 개개인이 각종 항일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거동사는 20세기 초 산남의진 활동을 끝까지 몰고 간 비밀 아지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로운 정신을 현대의 것으로 되살려 놓은 성지다.
2013년 당시의 거동사 주지, 혜신스님은 역사 속에 묻힌 산남의진의 영령을 다시 추모하게 하고 거기에 더하여 유명무실해진 산남의진 기념사업회를 창건하는 등 지역의 숨은 문화유산을 수면 위로 오르게 한 것이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