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시> 연재 칼럼 4 (2023년 12월)
김민홍의 나쁜 생각(월간 시 12월 게재 원고)
스승과 나
스승께선 늘 세상을 쳐다보고 사셨지만 스승의 세속의 일은 입에 담지 않았다. 몸은 세상에 담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의 명예로운 자리를 두루 거치셨지만, 사람들은 스승의 음풍농월 속에서 유유하시던 스승의 시에 감동하였고 스승께서 보여주신 이미지에 찬사를 보냈다. 필자는 그런 스승이 못마땅해 스승께서 가르쳐 준 길을 걷지 못했다. 스승께선 늘 온유하셨으며 눈빛은 사슴처럼 맑았다. 그런 스승께서 육십 대 초반에 돌아가셨다. 당시 필자는 대학 4학년이었고 복학생이었으니 스물 여섯쯤이었다. 그런 필자가 스승의 나이에 점점 가까워지는 나이에 이르러서야 스승께서 속으로 얼마나 자신을 깎아 먹으며 사셨는지 겨우 짐작이 되었다.
암병동에 있었을 때 필자는 그저 무서웠다. 단한번도 암에 걸리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 충격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동안 읽은 책이나 서슴없이 떠들던 철학이나 어설픈 사상, 무수히 써갈기던 시 따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회 사람들이 와서 위로해주고 찬송을 불러주었을 때, 필자에겐 어서 건너가라는 장송곡처럼 들렸고, 절 사람들의 위로도 장례식을 준비하라는 소리로 들려서, 위로는커녕 오히려 낯선 공포감이 가중되었었다. 실체적 인생으로서 내가 죽는다는 문제 앞에서는 어떤 위로도 빛을 잃었다. 나는 그저 생존본능에 의지해서 투병했고, 운이 좋아 아직 생존하고 있다. 퇴원 후 수십 년이 흘렀지만 그 당시를 반추해 보면 여전히 마음이 어두워지곤 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암병동에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 하나는 필자처럼 다혈질, 혹은 성격이 급한 타입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온유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혈질이든 온유한 성격이든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상처들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거의 필자가 신념처럼 믿음이 가는 것은 세상의 모든 암은 유전인자로 물려받거나 영육간으로 받은 스트레스가 거의 100%에 가깝다는 것. 아무리 외부적으로 암 발병 요소에 노출되었다 하더라도 개인이 지닌 저항력에 따라 그 결과는 뚜렷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과중한 스트레스는 저항력을 저하시키고 그 틈으로 암이 발생한다고 필자는 굳게 믿어지기 때문이다.
스승께서는 암 유발 환경에 노출되지도 않으셨고(술 담배는 전혀 안 하신 걸로 기억되므로) 성격도 긍정적이셨고 온유, 겸손하셨다. 세상적으로도 성공하셨으므로 명예도 얻으셨다. 허나 그런 스승께서 육십 대 초반에 돌아가셨다는 것이 암투병 이후 필자의 머리에서 떠나 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스승께선 세상에서 할 일을 다 이루셨고 필자는 아직 갚아야 할 빛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허망에 관하여
내 마음을 열 /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 원하거든 열어라 // 그러하고 /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 가진 후 빈 그릇에 / 허공 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 그렇게 하여라 / 이 세상에선 / 누군가 주는 이 있고 /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 받아선 내버리거나 /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하는 / 이런 일 허망이라 한다 /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 이를테면 / 사람의 식량이다 // 나는 너를 /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 너를 사랑한다 - 김남조 <허망에 관하여> 전문
필자가 이 시를 처음 만난 것은 십수년 전 문화일보가 개최하던 정규 시낭송회에 초대 받아 갔을 때 시낭송집에 실렸던 시로 기억된다. 이젠 이 땅에 생존하고 계신 최고령의 원로 시인 김남조 선생님. 몇 번 경기고등학교 근처 한 갤러리에서 뵌 적이 있지만 날 기억하실 진 모르겠다.
오늘 이 시가 생각난 까닭이 무엇일까?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이를테면/삶의 식량이다”라는 싯귀가 ‘허망은 집착이다’라고 읽혔기 때문일까? 필자의 경우, 관념으로만 생각하던 허망이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부터이다. 아니다. 믿어야 할 어떤 가치들이 구체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들을 몸으로 확실하게 겪으면서 감정적, 정신적 공황에 휩쓸렸고, 그때 비로소 구체적으로 만져진 허망이 바로 집착의 다른 얼굴이었다는 것을 힘겹게 깨우쳤다. 알아채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몸을 지니고 있는 동안 필자는 집착을 벗어버리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어김없이 몸도 아프게 했고, 농도는 좀 옅어졌지만 지금도 그렇다.
영혼이라던가, 사랑이라던가 하는 추상명사가 정말 이 세상에 있기는 한 것일까? 그리고 초월과 포기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한 세상을 떠도는 무수한 가르침들을 나는 구체적으로 육화시키지 못했다. 당신들은 이를 나의 어리석음이거나 교만 때문이라고 질타할지 모른다. 하지만, 난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정직하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일 뿐이고, 솔직함만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몇 년 전 써두었던 초고를 퇴고해 본 것이다. 오늘은 얼마 전 세상을 뜨신 김남조 선생님의 시를 무모하게 읽은 필자의 감상문의 일부를 수정한다. 의욕과 집착은 얼굴만 교묘하게 바꾼 단어로 읽히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바느질에 대해
그의 시론을 읽다 보면 답답해진다. 온통 자신에게만 집중된 이른바 자기 편집증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자신을 파 먹는 행위에 다름이 아니라고 필자도 화두처럼 입에 달고 다니지만, 지나치게 자신만 쳐다보는 그의 시론을 읽다 보면 자신의 소외감도 물건 팔듯 파는 것 같다. 현실을 살아내면서 어떤 형태든지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론을 읽다 보면 소외된 사람끼리 소외를 주고받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소외를 온갖 논리를 동원해서 고급스럽게 포장하는 것도 같다. 물론 적잖은 부분은 공감이 가고, 이해는 하지만, 소화하기 힘들다. 필자의 시가 그의 시론처럼 그렇게 섬세할 필요도 없고, 구태여 그런 일로 피로해 질 이유가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런 피로감을 잘 포장하여 팔아 명예와 부를 누리는 자들도 이 세상엔 적지 않다. 그들은 무리를 형성하고 싸우고 승리하고 때론 패배도 하지만 그것이 다시 일종의 논리의 힘을 만들고 스스로 일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일류 들이 타자의 사고에 기여한 것은 필자의 생각엔 별로 없어 보인다. 왜 요즘 평론과 시론들이 안 읽히는 걸까. 물론 시도 소설도 잘 안 읽히고 안 팔리지만. 일종의 사대주의처럼 보이는, 외국의 거장들을 들먹이며 자신의 논리를 치장하고 있는 논리들. 예전의 "공자왈, 맹자왈"로 자신의 견해에 권위를 부여하던 사대부들의 어법에서 공자, 맹자 대신 서구의 철인이나 학자들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습관적으로 쓰이는 "다 하느님의 뜻, 혹은 섭리입니다"라는 말 속엔 다 "팔자소관입니다"의 팔자라는 단어가 하느님으로 바뀌어 들리기도 하는 것처럼, 자신의 개인적 생각을 진술해 놓고 그 끝에 성경 말씀을 현란하게 바느질하는 잘 나가는 목사들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뛰어난 바느질 솜씨가 우리의 민족성에 본능처럼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언제쯤 우리의 이름이 텍스트로 인용되는 날이 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