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보면 부끄러워진다
김삼진
“뭐 해?”
아내의 전화다. 요즘 들어 전화가 잦다. 저녁을 준비 중이라는 대답에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하면서도 끊을 생각을 않는다.
특별한 용건이 없는 전화이지만 가끔은 그 수다를 다 받아 주곤 한다. 한 시간 반 정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김포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나, 밥해야 해”라며 전화를 먼저 끊기가 미안해서다.
하남에 사시는 부모님을 누군가는 보살펴야 하는 때가 왔고 아내와 상의 끝에 나는 과감히 자원했다. 두 분을 혼자 모시기는
어렵다고, 부부가 함께 모셔야 할 것이라고 형제들은 말했지만 아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나는 굳이 혼자 맡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내와 오 년 만에 또 별거를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 댁으로 거처를 옮긴 지가 오 년이 되어 간다. 따져보니
내가 사업을 시작했던 20여 년 전부터 우리 가족에게 ‘가정’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었다. 내가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말 할 것도 없이 아내다. 나는 사실상 50대 초부터 가장으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십오 년 전쯤, 부도가 났다. IMF 때라면 하던 사업도 접거나 축소를 해야 할 판에 창업을 했으니 예정된 결과였는지 모른다.
무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 년여를 지탱한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25년 월급쟁이로 마련했던 두 채의
아파트는 없어져 버렸고 가족들은 모두 내 곁에 없었다. 제 힘으로 앞길을 개척해야 했던 두 아들과 졸지에 생계를 책임지게 된
아내는 서울에서 단칸방을 얻어 지내게 되었다. 나는 남한산성 중턱 오두막에서 세상과의 연을 끊고 칩거했다. 아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나 염려보다도 남편으로서의 면목 없음이 이산離散으로 감춰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우선이었던, 몰염치의
시절이었다.
칩거 3년쯤 이었을 여름 어느 주말 아내가 산막에 오는 날이었다. 번잡한 서울을 벗어나 전원에서 하룻밤을 쉴 수 있어서였는지
아내는 명랑했다. 우리는 삼겹살도 구어 먹고 소주도 한 잔 했다. 몇 년 전 이곳에 이삿짐을 풀 때의 참담했던 심경을 떠올렸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몇 년 지나서는 곤궁한 환경에라도 이러구러 맞추어 지는 것이 신기했다. 잘 때가 되자 아내가 이부자리를
폈다. 그런데 베개 두 개를 나란히 놓는 게 아닌가. 근년에 없던 일이었다. 이제까지는 나는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혹은 인터넷을
하다가 잤고, 아내는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아내로서는 부도 이후 서먹해진 부부관계를 정상화하려는, 그래서
공식적으로 나를 그 죄로부터 사면시켜주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몸은 어떤 기대는커녕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아내는 자리에 들어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보일러를 좀 보고 오겠다며 어색해진 자리를 피했다. 밖에서 서성이며
공연히 시간을 끌다가 서재로 들어갔다. 아내는 서울에서 예까지 오느라 피곤해서 잠이 빨리 들 것이었다. 거실 쪽에 귀를 기울
이며 건성건성 인터넷 서핑으로 시간을 끌었다. TV를 껐는지 사위가 조용해졌다. 나는 좀 더 기척을 살피다가 거실로 나갔다.
살그머니 이불을 들추고 들어갔다. 아내는 낮게 코를 골고 있었다. 그날따라 속절없이 시냇물 소리는 왜 그렇게 맑게 들리는지,
또 풀벌레는 왜 이렇게 박자까지 맞추며 울어대는지…. 천장을 향해 누웠던 몸을 벽을 향해 돌아누우며 잠을 청했다. 그때였다.
아내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다리가 내 다리에 얹힌 것이었다. 어느새 아내의 몸은 내 쪽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경직된 몸을 끝내 풀지 못했다.
다음 날 오후 아내의 차는 맥없이 툴툴거리며 마을을 떠났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멀어져가는 자동차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고 난 후에도 내 손가락 사이에 끼인 담배는 가느다란 연기 한 가닥을 힘겹게 피어올리고 있었다.
올 10월이면 결혼 사십 주년이다. 이제까지 아내에게 변변한 곳에서 밥 한 끼 사주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내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 휴가 날짜를 맞춰 호텔에서 하루를 지내고 오리라. 적어도 오성급 호텔은 되어야겠지
? 아내에겐 뭐라고 해야 의심 없이 나와 줄까? 머리 염색도 하고 모처럼 정장을 할 것이다 에르메스 넥타이에 진주 타이핀을
꽂고 얼마 전 장만한 새 구두를 신어야겠다. 새신랑처럼 꾸미고 나갈 것이다. 아! 여태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자줏빛 실크
포켓칩도 해 볼 것이다. 그리고 호텔로비에서 두리번거리는 아내 앞에 “짠”하고 나타나 뒤에 감춰온 장미 한 송이를 안겨 주는
것이다. 식사는 티본스테이크에 와인이 어떨까? 식탁엔 멋진 꽃장식과 촛대도 준비해 달라고 매니저에게 미리 말해둬야겠다.
식사를 마치고 아내가 "너무 늦었다. 집에 가야지”라고 하면 난 세련된 폼으로 일어나 내 검지를 아내의 입술에 갖다 대며 말하는
거다. “쉿, 마담, 28층에 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때 아내의 볼은 한껏 홍조를 띠겠지.
“딩동~!”
인터폰 모니터에 놀랍게도 아내의 얼굴이 떠 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각이다. 부모님은 이미 잠자리에 드신 후다.
“어? 웬일이야. 이 시간에….”
친구들과 모임이 있어서 왔다가 지나는 길에 얼굴이나 보고 갈까 해서 들렀단다. 아내는 뒷정리를 하는 나를 졸졸 따라 다니며
다정하게 군다. ‘늦은 시간인데 빨리 가지 않고….’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빨래감을
찾아내 세탁기를 돌리고 이내 서재를 청소하기 시작한다. 시계바늘은 이미 10시를 넘어서 있다. 나는 점점 불안해진다.
이러다가 아내가 자고 가겠다고 하면…, 그때 나는 어떡해야 하지?
첫댓글
부부는 일심동채
그냥 그런대로 함께 동행함이 우리들의 삶 속에 정서가 아닐까요
청송 님
이젠 선선하 새벽 공기가 참 좋습니다
이 가을 멋진 가을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