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直指人心 見性成佛’ 할 때의 心과 性이 어떻게 다른지 의문을 가져왔다. 오늘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이것은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다.) 근원적으로 심과 성은 같지 않을까? 같은 것의 두 얼굴이지 않을까? 같은 하나가 한편으로 ‘작용(用)’으로 나타날 때는 심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 ‘근원(體)’으로 있을 때는 ‘성’이라 하지 않을까? 우리 인간에게 ‘체’는 감지될 수 없고 ‘용’만 감지될 수 있기에, 인간은 심의 작용을 감지하는 것을 통하여 그 심을 직접 가리킬(指)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용을 통해 심을 가리켜나가면(直指人心), 언젠가는 위에서 덮고 있던 것이 떨어져 나가고 본질인 성품이 드러나서 결국 보인다(見性成佛)는 말이 아닐까? 따라서 한편으로 작용은 하되 한편으로는 물들지 않는 자성의 양면에서, 작용하는 부분은 心으로 부르고 형상이 없어 물들지 않는 부분은 性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새삼 이런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우리가 ‘이뭣고’ 화두를 할 때 부닥치는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흔히 화두를 할 때 의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의정이 화두의 핵심이라고 하는데, 의정이 잡히지 않으니 화두공부에 진전이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이뭣고’ 할 때의 ‘이’가 감지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즉 ‘이’가 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이뭣고’ 물어봤자 허공 중에 집을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로 수십 년을 용맹정진 해보았자, 진전이 있을 까닭이 없다. 허공 중의 집은 지어놓으면 와르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두려우니까 허공 중의 집을 지키고만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 모래성을.
‘이뭣고’ 화두가 분명히 되려면, 즉 의정이 생기려면, ‘이’를 분명히 감지한 상태에서, 즉 뭔가 분명히 걸리는 것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막연히 허공에다 대고 무엇인고 할 게 아니라, 분명히 짚히는 게 있는 상태에서 짚히는 ‘이것’이 무엇인고 물어야 승부가 날 게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이’를 감지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우리는 자성, 그 ‘이’를 감지할 수 있는가? 감지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자성은 물들지 않으나 작용을 한다’는 것이 포인트다. ‘直指人心’이 포인트다. 우리가 마음은 가리킬 수가 있다. 즉 마음의 작용은 가리킬 수가 있다. 비록 자성이 형상이 없어 잡히지는 않지만, 자신의 다른 얼굴인 마음을 통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작용을 통해 결국 자성을 ‘관’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자성을 감지하려면 그 작용을 실감해야 한다. 즉 작용이 손가락이고 자성이 달이다. 달을 보는 유일한 단서는 손가락이다. 자성을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그 작용이다. 다행히도 마음은 쉴 새 없이 작용을 한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 아닌 게 없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를 들기 전에 먼저 마음의 작용을 면밀하게 ‘관’해야 한다. 작용을 통해 자성을 실감하게 될 때까지. 그래서 서산대사가 ‘마음을 모르고서는 참선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인가? 그리고 마음을 알아가는 방법은 ‘관해가는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앉는 것이다. 앉는 것은 공을 많이 들여 관해가는 힘을 길러가는 것이다. 그 힘으로 마음의 작용을 통해 자성을 감지하기 위해.
요즘 나는 틈나는 대로 작용을 통해 마음과 자성을 돌아보기 위해, 즉 ‘이’를 감지하기 위해 현웅 스님에게서 배운 말을 활용한다. ‘배고프다’와 ‘배고픈 줄 아네’의 차이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배고프다’가 단순한 의식의 작용이라면, 한 번 돌이켜서 ‘배고픈 줄 안다’고 하면 그 ‘아는 주체’가 감지된다. ‘아는’ 작용을 하는 마음이 들여다보인다. 그냥 ‘보는’ 데서 한 번 더 돌이켜 ‘볼 줄 아네’ 하면, 회광반조가 되어, 보는 마음의 작용을 감지할 수 있는 찬스가 생기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대목을 자세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요즘 무엇을 보면 ‘볼 줄 아네’, 들으면 ‘들을 줄 아네’, 글을 쓰면 ‘글 쓸 줄도 아네’, 밥 먹으면 ‘밥 먹을 줄도 아네’ 하고 수시로 돌아본다.
그렇게 돌아 보느라면, 언젠가 그 ‘아는 주체’를 선명히 감지하는 날이 온다. 감지되면 자연히 그 감지되는 것에 모든 것을 건다. ‘이’가 감지되니까, 자연히 ‘뭣고’하고 묻게 되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뭣고’ 하고 물을 필요도 없다. 감지만 되면 그것이 그대로 ‘묻지 않는 질문’이 되고, 그대로 의정에 들기 때문이다. ‘이’를 관하고 있는 것이 곧 의정이다. 작용을 통해 감지되니, 그 감지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자꾸 익숙해지면, 언제 어디서나 견문각지를 대하는 자가 감지되고, 즉시 의정 속에 들어 화두가 잡힌다. 의식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뭣고’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뚜렷하게 ‘이’를 감지하는 상태에서.
내 일기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공부 상태를 밝힘으로써, 스스로 선원장 스님의 점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이유다. (스님은 지금 미국 버클리에 가셨다. 곧 돌아오시니까 조만간 이 글을 보실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주위의 도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전부 여기서 막혀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의정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나는 의정이 잡히기 때문에 (만약 내가 잡은 의정이 틀리지 않는다면) 내가 잡은 의정이 어떤 것인지 소상히 돌아볼 필요를 느낀 것이다.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이런 속마음을 내비칠 일이 없겠지만, 어차피 공개적으로 쓰고 있는 일기이니까 용기를 내어 밝혀본다. 어쨌든 나는 늘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니까, 틀리면 그대로 털고 처음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부담스럽지는 않다. (이렇게 뱉은 다음에는 털어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야 꼭 뒤탈이 없더라. 터는 방법은, 이 글 역시 하나의 뗏목으로 대하는 것이다. 강을 건넌 다음에는 놓고 가야할 것.)
내가 스스로 확실히 의정을 잡았다고 느낀 것은, 스님이 나에게 “이제 생활 중에서 공부하시오. 일상 중에 언제든지 견문각지를 대하는 자를 돌이켜서 그를 관하시오.” 하고 가르쳐주었고, 그 가르침에 따라 깨어있는 시간 언제라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순간 그 아는 자를 돌이켜 관하다 보니 언젠가 문득 시야가 넓어지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순수하게 보는 자가 곧이곧대로 감지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다. 그것은 운전을 하는 도중이었는데, 평소처럼 견문각지를 대하는 자를 관하다 보니까, 홀연히 시야가 확 넓어지면서 시각이 가서 닿는 대상이 그대로 거울이 되어 그것을 비춰보는 ‘그것’이 확연히 감지되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마음의 작용을 감지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꼭 나처럼 할 필요가 없고, 각자 작용을 느낀 그때 작용하는 주체를 돌아보면 그것이 그대로 의정이다. 그러니 각자 잘 되는 방식대로 하면 된다. 내 글은 참고로만 삼을 것이다.)
그때 나로서는 두 가지 점이 분명했는데, 하나는 마음이 현재에 쏟아지면서 과거와 미래가 끊어져 나가버리는 ‘현재심’이 역력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대상과 ‘그것’ 사이에 끼어드는 의식이 전혀 없이, 마치 하늘이 쨍하게 맑듯이 그렇게 온전히 지각된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지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없이 그냥 그대로 밖을 보면서 안으로는 보는 자를 관하고 있는 것이다. 의심이나 주저함이 없이 그냥 역력하다고나 할까. 그냥 역력한 것을 대하니 그대로 ‘묻지 않는 질문’이 되어 ‘의정독로’가 되는 것이다. 이 상태는 마치 사자가 나타나니 잡 짐승들이 자취가 없어지는 것처럼, 의정 하나만 선명하고 나머지 온갖 의식은 끼어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 하나만 온전히 깨어있으니, 寂寂하고도 惺惺하다. 운전하면서도 되니, 고요하면서도 작용은 빈틈이 없다.
이것이 진정한 의정인지 스님께 점검을 받아봐야겠지만, 나는 요즘은 이 상태에 수시로 들락거린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앞에서 [제소리]라는 글로 밝혔듯이, 그 상태에서 육식의 안개가 걷히면서 마음속에서 ‘원래 없던 것을 있다고 착각했을 뿐’(정확하게는 ‘없던 것이 없어졌을 뿐’)이라는 말이 불쑥 나오기도 했다. 모든 후천적인 것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고 살다가 생긴 것이니까 내가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니까, 으레 그럴 것이라고 미련을 두지 않게 되어 ‘헛 노력을 멈추게 된다’.
옛날일이 생각난다. 내가 어렸을 때, 한번은 아픈 적이 있었다. (큰 병이 아니라 몸살 같은 것이었다.) 고통 속에서 가만히 이전에도 아팠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분명히 그때 아팠는데, 시간이 흐르고 치료가 되니까 다시 원상회복이 되어 아픈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따라서 고통은 유한한 것이었다. 따라서 비록 지금은 내가 아프지만 이것도 불치의 병이 아닌 이상 분명히 며칠 지나면 다시 일어설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이상하게도 고통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쉽게 회복할 수가 있었다. 그 뒤 감기몸살 같은 것이 오면 태연히 받아들인다. “주인이 너무 무리를 하니까, 몸이 좀 쉬게 해달라는 것인가 보다. 비록 온몸이 지끈지끈 아프지만 이 고통은 머지않아 틀림없이 사라질 것이다. 몸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지 말고 쉬면서 기다리자.”
돌이켜보니 이런 에피소드도, 원래 없던 것을 있다고 착각하지 않고, 그 무상한 실상을 정확히 보고 기다린 것이 된다. 괜히 헛 노력을 해서 병을 키우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서 동요하지 않으니까 덧나지 않고, 자연히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것이다. 의정에 들어 직지인심 하고 있으면, 후천적인 일들이 뿌리 없이 붕 떠있는 실상이 보인다. 원래 없던 것을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온 것이 보인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쉽게 불성의 바다에 뛰어들 수 있게 된다. 어려움이 생기면 그 어려움에 딸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우선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서 불성에 비춰본다. 그러면 문제의 근원이 드러나 보인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일상에서 부닥치는 가장 마음 아픈 문제들은 대부분 가족들과의 관계이고, 요즈음은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화부터 내는 것을 자제하고 일단 안으로 돌이킨다. 안에서 비춰보면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가 보인다. 틀림없이 문제는 표피적인 충돌의 직접적인 계기 그 자체가 아니라, 서로 간에 근원적인 신뢰가 이지러진 데에 있다. 그리고 표피적인 그것에 바로 반응하지 않고, 한 수 접어서 근원을 풀기 위해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나를 덮어 왔던 집착을 보게 되고, 동시에 상대도 어디에 사로잡혀 있는가 하는 것이 보이게 된다. 이러면 대부분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나에게서 먼저 문제를 풀려고 한다.
돌이켜 보니, 나도 참 오랫동안 엉뚱한 데에 끌려 다녔다. 원래부터 가지고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엉뚱한 정의를 내려놓고 그 틀 안에서 꼭 갇혀 살아온 것이다. 아무도 날 가둔 사람은 없다. 단지 내가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해서 가두었을 뿐. 본래 타고난 것은 찬란한 자성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살면서 후천적으로 생겨난 것일 뿐. 그러니 놓지 못할 것이라곤 없다. 그리고 놓을수록 원래 있는 자성이 드러날 것은 자명한 이치다.
쓰나미가 쓸고 간 인도네시아 아체주의 마을을 생각한다. (이런 비유를 들어 고인들에게 죄송하지만.) 해일이 한 번 오니 후천적인 모든 것들이 싹 쓸려갔다. 사후에 찍은 사진을 보니 한 번의 쓰나미로 그렇게 싹 쓸릴 수 있는 것이 놀라웠다. 우리도 모든 후천적인 것은 그렇게 쓸어낼 수 있다. (그래도 큰 나무 몇 그루는 남듯이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할 근본 업이야 없지 않겠지만.) 하지만 나는 그 사진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모든 것을 다 쓸고 가도, 티끌 하나 손상 입지 않은 채로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바닥’이었다. 오히려 더 깨끗해졌다고 하면 지나칠까? 마음에도 바닥이 있다. 후천적인 것을 내려놓아야 그 바닥이 보일 것이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마음 바닥을 바라볼 때, 더 없는 자유와 안정을 느낀다.
음력 설날 아침 내가 일어나서 한 첫 일은 걸레로 바닥을 닦은 일이었다. 내가 처음 참선 공부를 시작했을 때, 생각이 많은 나에게 스님이 내려주신 처방이 청소-걸레질이었다. 나는 걸레질 할 때마다, 쓰나미로 쓸려나간 그 마을의 바닥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 마음을 닦는다. 앉으나 서나 내 몸이 닿고 있는 바닥을 생각한다. 나는 한 번도 바닥을 떠나본 적이 없다. 비행기를 탔을 때조차 바닥이 있었다. 나는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가 없다. 모든 존재도 그렇다.
나는 무엇을 볼 때, 내 안에서 그 바닥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나는 그 바닥을 감지하고 바라본다. 의정 속에 들어 깨어있을 때, 나는 내가 된 것 같다. 나는 비로소 ‘자기가 자기로 있을 줄’을 알게 되어 기쁘다.
첫댓글관세음보살~~~^^*()언젠가 영화 한편을 본 기억을 담게 합니다. 별들의전쟁(스타워즈)...그 영화속에서 담아든 내용이 새삼 떠오릅니다.내용은 (생명체가 많이 진보 했다는것)그리고 흔히 이런말 많이 하잖습니까.너 참~많이 컷구나~하고 하는말~^^*이글 읽고 새삼 느껴 집니다.솔이도 큰게 아니라고요~~~^^*()
첫댓글 관세음보살~~~^^*()언젠가 영화 한편을 본 기억을 담게 합니다. 별들의전쟁(스타워즈)...그 영화속에서 담아든 내용이 새삼 떠오릅니다.내용은 (생명체가 많이 진보 했다는것)그리고 흔히 이런말 많이 하잖습니까.너 참~많이 컷구나~하고 하는말~^^*이글 읽고 새삼 느껴 집니다.솔이도 큰게 아니라고요~~~^^*()
namu 님 ! 심(心) 잘 새기고 갑니다. 정진하시어 성불 하세요.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