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나해 부활5주일
사도 8:26-40 / 1요한 4:7-21 / 요한 15:1-8
농부와 나무 그리고 열매
농업이 주를 이루는 우리나라와 달리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지역은 건조한 지역에서는 유목을, 강가와 해안지역에서는 농사를 짓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표상이 모두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지난 주일 복음이 목자와 양에 대한 은유를 통해 주님과 우리 간의 관계를 묘사했다면, 오늘 복음은 농부와 포도나무 그리고 열매라는 은유를 통해 성부와 성자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유목생활에서 이동해야 하는 양떼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목자의 인도를 잘 따라야 하는 반면, 농사환경에서 한 곳에 심어져서 잘 자라야 하는 농작물은 농부의 보살핌을 잘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유목문화의 특징인 이동성과 농경문화의 특징인 정주성을 통해 교회의 두 가지 특성, 즉 선교와 양육이라는 두 가지 핵심요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꾸는 농부는 하느님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면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가 생각납니다. 어린이 예배 때 이 노래를 할 때면 모든 아이들은 꾀꼬리 같은 소리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가 가지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붙어있지 않으면 그러하리라”라고 큰 소리로 불렀던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신학을 공부하고, 사목자가 되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뜻을 조금 조금씩 깊이 깨달아 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 의미를 함께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에는 세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농부, 포도나무 그리고 가지들입니다. 여기서 농부는 성부(聖父) 하느님을, 포도나무는 성자(聖子) 예수님을, 그리고 가지는 제자들 즉 우리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세 요소가 협력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란 바로 신앙의 실천과 증언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선적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포도밭 농부로 묘사하십니다. 농부는 포도를 수확하기 위하여 겨울에는 말라버린 가지들을 쳐내고 봄에는 쓸모없이 웃자란 가지들을 솎아 냅니다. 이렇게 가지치기를 마친 포도나무 가지들은 이제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농부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포도나무는 그것을 각각의 가지들에게 양분을 보냅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즉,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포도나무이지만, 포도나무를 자라게 하고 어떤 가지를 잘라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성부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여기 이 자리에 모여 예배 드리는 우리는 말씀으로 깨끗해져서 열매 맺는 가지가 될 조건을 갖춘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말씀을 칼에 비유하고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묵시록 19장 15절을 보면, “그분의 입에서는 모든 나라를 쳐부술 예리한 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라는 말씀이 있듯이, 칼로 묘사된 말씀은 교회를 정화하고, 우리 내면을 손질하십니다. 그런데 포도나무에 연결되는 것 자체만으로 생명을 보장받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것, 단지 신자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무엇인가 결과를 내야 합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베드로가 스승을 부인했듯이 단순히 예수님과 함께 있고 그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충분치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채 혼자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과 떨어진 상태에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그 분 안에 머물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야 생명이 오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을 받고 그 생명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 열매란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인 요한의 첫째 편지는 이 사랑의 계명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 (1요한4:12)”
이와 같이 농부이신 성부 하느님은 포도나무이신 성자 예수님께 그 사랑을 주시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은 당신과 연결된 가지들인 우리들에게 그 사랑을 양식으로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가지인 우리는 풍성한 포도라는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포도나무 비유의 의미입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한 예수님이 주신 이 생명의 은총으로 충만해진 제자들이 그 사랑의 씨를 온 세상에 퍼뜨리는 활동을 증언한 책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필립보는 예루살렘에 왔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에티오피아 관리에게 성경말씀의 깊은 뜻을 설명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선교활동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광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필립보가 에티오피아 관리에게 세례를 줄 때, 그가 물에서 나오자 성령이 필립보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시는 바람에 그가 필립보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기쁨에 넘쳐 제 갈 길을 갔다는 대목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성부의 음성이 들려온 장면이 연상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세례자 요한은 얼마 있다 헤로데에게 붙잡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예수께서는 당신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 관리는 세례 후에 필립보를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자기 나라로 가는 그 길을 갔습니다. 그는 아마도 세례를 통해 성령으로 충만한 기쁨을 갖고 생명의 열매를 자기나라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프리카에 있는 가장 오래된 에티오피아 교회는 자신들의 기원을 초대교회 이 사건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교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생산한 열매를 나누는 활동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를 통해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그럴 때 교회는 활력을 갖게 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나’라는 의식은 내가 태어나자마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늙어가면서 나를 둘러싼 사회와 문화에서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됩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한 번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기도와 예배, 다양한 신앙활동과 봉사를 통해 주님과 그리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것입니다. 오늘 포도나무 비유 이야기를 통해 주님은 우리가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부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의 돌봄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은 바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랑은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 기쁨은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허울뿐인 그리스도인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8)”
그러므로 영원한 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서 믿는 단계를 극복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기쁨에 넘쳐 믿을 때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집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고 초대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우리 교회 신자분들이 그러한 사랑을 체험하고 전하는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생명의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