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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선집 [☆가벼운 걸음☆]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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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걸음]
박이도 시선집 / 도서출판 시간의 숲(2019.01.15) / 값 8,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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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日沒
박이도
어느 시점에서 하직활까
어느 지점에서 굴러 떨어질까
지금 해는 내 기대를 뿌리치고
고독의 손수건을 흔들며 사라지고 있다
외로움, 두려움, 침묵
죽음의 블랙홀.
침묵 5
―별을 바라보며 말할 수 있는 것은
박이도
홀연히 어둠이 내게 왔을 때
산만했던 사실들은 사라지고
비로소 나는 우주와 마주 앉는다
저 당돌한 별들의 접근,
지호지간指呼之間에
한마디 건넬 수 있는 말
그 말은 무엇일까
내 음성은 어떻게
저쪽에까지 퍼져 나갈까
별을 바라보며
내가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침묵의 말이어라
기러기 1
박이도
기러기 가네
무작정 가기만 하네
간다 온다 말없이 잘도 가누나
끼룩끼룩 장송곡에 맞추어
하늘나라 가네
주검이 보인다
불에 탄 회색 들판엔
까맣게 타 버린
나뭇가지와
무덤이 몇 개 보인다
내 동정童貞에 묻어나던 핏발이
하늘 끝으로 무너지고
이 저녁은 엄숙한 장례식
끼룩끼룩 적막을 깨고
기러기 가네
외로운 말言
박이도
세상은 너무 넓어서
세월은 너무 길어서
혼자 살아가기엔 두려운 곳
시장 바닥이나 역 광장에서
인파 속에 숨어 다니는
혼자만의 세월을 쫓기다가
밤늦게 돌아와 선 대문 밖,
잠긴 대문 안에
멍멍이가 반가운 소리를 지른다
멍멍이의 산울림에
빗장이 열리며
하늘 끝까지 열려 오는 뜨락,
왈칵 밀려오는 격정
하루 종일 뱉어 낸 말들이
하늘의 별처럼 떠다닌다
강물에 떠가는 고기 떼처럼
나의 말은 중력을 잃었다
거짓 없는 멍멍이의 발성
끝내 손짓으로 건네는
나의 사랑
텍데구루루 텍데구루루
어둠 속에 굴러가는
나의 외로운 말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비 1
박이도
먼 곳에서
조심스럽게 찾아오는
비의 입김은
이른 아침 나팔꽃의 입술에
생기生氣로 스며드는
천연색 비타민
비는 항상 부활한다
대지에서
죽고 다시 사는 초목으로
머나먼 강물처럼
살아오는 부활이다
비의 생명은
천리 밖
우레 소리에
놀라 깬
함석지붕 위의 낮잠이다
후두득 후드득
내 가슴을 치고 가는
건반鍵盤 위의 그림자이다.
발견
박이도
이성의 깊이에서 살얼음이 깨어졌다
감성의 깊이에서 풀꽃들이 흩어진다
신앙의 깊이에서 연민의 울음이
깊이깊이 나의 현실을 난타亂打하고 있다
지금은 발견의 때,
현신現身하는 삼위三位는
저 어둠 속의 나그네와 같이
문밖에 쓰러져 이슬에 젖는다
나의 소유였던 한 줄의 생명은
꿈의 저쪽으로 떨어져 가고
나의 애정이었던 지상의 풀꽃들은
꿀맛 같은 입술의 환각幻覺에서 깨어나
땅거미가 지는 언덕으로
카디린 신神의 그림자를 따라
불빛을 찾아 아침으로 환원하는
발견의 시간,
서둘러 이르는 곳에
또한 나의 약속이 있다.
거울
박이도
거울은 요지경
내가 들여다보는 거울 속엔
얼룩진 눈물자국뿐이다
아니 온통 개나리꽃들이,
진달래꽃이 피어난다
아니 파도 같이 함성으로
군상群像의 떼가 밀려온다
아- 퍼덕이는 내 맥박을
지레 밟고 지나간다
한 송이 꽃송이가
나동그라져,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내가 흐느끼고 있다
내가 목 메이고 있다.
저 울음은
박이도
어디선가
한 사람이 울고 있는 것 같다
주검처럼 조용한 이 밤을 뛰어나와
새삼 살아 있음을 깨달아 보며
공허하고 엉뚱한 실체감에 압도되는
한 사람이 울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내심에 이 울음은
성급한 불길처럼 번져서
거센 바람을 타고
저 어둠 속으로 질주하는 것 같다
밤의 전체는 살아 움직이며
위대한 섭리 앞에 다가서는
항해航海
운명같이 진척進陟되는 고요에 싸여
어둠 속에 이끌려 나온
밖의 어디인가
지금, 한 사람이 울고 있어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며
내 가슴을 찢는 것 같다
저 울음은
신신에게 굴복하는 방언인가
군중에게 항거하는 분노인가
텅 빈 광야에서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메아리 되다가
더러는 별이 되어 반짝이며
하늘에 떠 있다가,
곤히 쓰러져 잠든
나의 문 밖에
이슬이 되어 내리는
전능의 목소리로
순수의 형상으로
그는 울고 있는 것 같다
어디선가
이 한밤의 울음은
멍든 내심에 찾아온
최후의 음성으로
가위눌림 같은 악몽의 사슬에서
나를 일깨우고 있다
나를 일깨우고 있다.
평화 1
박이도
선전포고도 없이 공습하는 기관 포성은
함석지붕 위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따 타 타, 따 타 타
평화의 종을 난타한다
전쟁이 터지고
전쟁은 또 하나의 전쟁을 위해
평화의 종을 난타한다
거울 같은 호수의 수면은 평화
우리의 마음 바탕은 본디
평화, 사랑, 꿈
자연의 바람이 스쳐갈 때
우리 생각의 방향은 미래
평화를 꿈꾸는 사랑의 종소리
평화에의 염원이
비둘기의 나래 짓처럼
푸른 이파리들의 함성처럼
미래로 달려간다.
내 詩의 첫 줄은
박이도
내 詩의 첫 줄은
항상 낯선 길에 나서는 어린아이와 같아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무엇이 나타날 것인지 궁금해
어둠이 순두부처럼 흩어지며
우윳빛 새벽 동이 트여 오는 그 길로
엄마 찾아 허둥대며 나서던 겁보
호기심이 커져 설렘으로 치달리면
가슴의 맥박은 큰 붕알 시계 소리처럼
기우뚱 기우뚱 숨이 차다
내 詩의 첫 줄은
따뜻한 마음속 박동치는 음악에서 온다.
투명체 1
박이도
어디에선가
이슬은 어둠을 헤집고 오신다
어디에선가
해는 어둠을 물리치고 오신다
이슬은
노란 햇살을 맞아 드디어
투명한 생명체로 태어난다
이슬과 해가 함께 이끄는
경이로운 우주
지상의 만물은 오늘도 안녕하신가?
겨울 1
― 겨울 나그네
박이도
먼 길 떠나기 위해
단잠에서 깼다
아직 어둠이 머뭇거리는
새벽하늘에 아침이 온다
희끗희끗 날리며 앉으며
순식간에 천지를 휘감아
화살 짓는 눈발
서로 부딪치며 떠밀리며
지상엔 하얀 폭풍이 인다
나뭇가지 위에 새둥지가
툭 떨어지고 새들이
포동포동 황급히 떠난다
굳게 닫힌 성당聖堂 문이 삐꺽
천장에 누워 있던 12사도使徒가
모자이크를 털어내고 걸어 나온다
뚜벅뚜벅 눈 속으로 떠나간다
그 뒤를 내가 따라나선다
열둘 그리고 열셋의 발자국이
하얀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발자국 뒤로 남는 헛기침 소리.
딱따구리
박이도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서
문명의 환청, 천연한 음악이
사라진다 그 사라지는 방향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호흡을 한다
울창한 활엽수 군락 속에서
천사의 소리가 귓불을 때린다
여기에선 눈멀고 귀 먼 짐승이 되자
안으로 가시 돋친 심성을 고르며
먼 데 바다의 우람한 소리에 귀 대어 본다
어느 순간, 숲 속의 저격수
딱 딱, 딱다그르르
계곡과 계곡을 메아리쳐 오는
이 맑고 경쾌한 소리
햇살에 빛나는 금관악기가
숨차게 고음을 뿜어내듯
고요를 깬다
나는 드디어 숲 속의 제왕
딱따구리와 마주 선다.
시로 깃들다
박이도
언어로써 치환置換된 내 사랑
그 낱낱의 담화의 형식들
시로 깃들었던 내 이상
이제 때가 되었네, 때가 되었네
육신의 허물을 벗고
한 마리 잠자리로 날자
자유의 시공時空으로 날자
내 허물 벗는 소리를 엿들어 보라
내 시에 깃든 영혼의 가벼움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그 읍성을,
끝내 볼 수도 없는 밝은 햇살 속으로
사라지는 것, 밤하늘에 별똥처럼 날아가는
인생의 아름다운 풍경을.
시간 1
―시간을 떨쳐 보니
박이도
허물어지는 것들이 보인다
겨울 하늘
허옇게 부서져
태고처럼 손닿지 않는 정다움
벋어가는 인정의 끄트머리에
티끌로 날리는 석양이 보인다
성채城砦가 무너지고
산이 떠밀리는
생생한 그림이 펼쳐진다
철새가 날고
뒤로 달리는 시간이
불빛처럼 번쩍인다
밝은 날빛을 밀어내고
완강한 어둠의 병사兵士가 다가와
드디어 기침하는 내 영혼
잊혀졌던 시간이 보인다
무너진 허공으로
철새들처럼 돌아오는 영혼….
해는 지는데
박이도
해는 지는데
아직 갈 길은 멀고
누구 하나 말벗이 없구나
서산에 불타는 해님은
뉘엿뉘엿 사라지며
네 가는 길의 끝은 어디냐고
조용히 묻고 있지 않는가
멧새들이 소곤대며
잠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나를 외롭게 한다
어느 토담집 아궁이 앞에서
희나리 지피며 눈물짓는
아낙네의 머리 수건에
하얗게 쌓이는 솔 내 향기가
나는 그립다
산 너머 마을에도
해가 지겠지,
이 저녁의 적막寂寞 찾아드는 어둠 속에서
나는 별을 보았다
내가 걸어온 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빛의 하루
박이도
해 속에서 새 빛가루를 묻히고
바닷속 헤집고 나와
반짝반짝 전파를 낸다
제일 먼저
산봉우리 비위틈
비집고 나오는 멧새
밤새 흘린 어둠의 눈물
이슬이 괴어 그의 눈 속에
빛을 준다
고목古木에 감긴 어린 수박풀에 앉아
마음을 내려다본다
솟아오르는 굴뚝 연기
하늘 높이 흩어지는
시간의 피안彼岸을 좇는다.
결별訣別 1
박이도
우리 사이엔 눈물이 있다
사랑과 마음의 정이 눈물을 잉태하고
계절마다 풍경으로 남는다
문득, 결별訣別의 시간
눈물이 흐르고
눈물은 메말라 버린다
풍경은 바뀌고
아름다운 순간, 눈물겨운 순간
조용히 떠남의 사실만이 드러난다.
어느 인생
박이도
이제야 내 뒷모습이 보이는구나
새벽안개 밭으로
사라지는 모습
너무나 가벼운 걸음이네
그림자마저 따돌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반추反芻
박이도
그렇게 애태우던 것
다 가고
나는 하늘에 떠가는 것
흰 구름이나 바라보는
언덕 위의 목동
저만치 풀 뜯는 황소를
두고
사랑, 질투를 물어보고
또 그러그러한 것
다 물어봐도,
“나는 몰라”
꼬리만 흔든다
저 산자락을 향해
돌아올 줄 모르는
망아지를 불러 본다.
눈물의 의무義務
박이도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
트인 하늘이며, 어느 산 밑으로 향하여
감격할 수 있는 불면의 눈은
화끈히 달아오르는 불덩이
열망하듯 호소하듯,
그것은 귀한 보석을 지닌 것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아주 먼 날들을 더듬어
훈훈한 초원으로 풍기는 바람 속,
생명으로 이어오는
많이 반짝이는 별처럼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아직 남아 있는 시간과
마음껏 주어진 자유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많은 소망으로 애무愛撫 하는
이 절대絶大한 생명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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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내 영혼의 자유 의지가 사붓이 찾아가는 곳, 그곳에 시의 정원이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센 비바람도 지나가고 해와 달이 숨바꼭질하느 세월의 기록이 된 시편들, 특히 연작시의 주제가 된 것들을 모아 보았다.
홀로 희열하고 비감하는 감성 혹은 소외와 절망의 늪에 빠져드는 이성의 깊이에서 태어난 어휘들이 서로 짝을 짓고 생명을 이어준, 나의 시들이다.
2018년 겨울
박이도朴利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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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침묵, 평화, 시간의 기록…”
이제야 내 뒷모습이 보이는 구나
새벽안개 밭으로
사라지는 모습
너무나 가벼운 걸음이네
그림자마저 떠돌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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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도朴利道 시인∥
∙ 존재와 삶에 대한 사유와 탐구의 조화, 그의 시의 공간은 나와 사물과의 관계 성찰 속에서 나의 존재론적 의미를 순수시의 시세계로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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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이정표를 찾고 존재 의미를 찾아가는 청춘에게 보내는 시인의 편지
- ‘침묵, 평화, 시간’을 주제로 한 다양한 연작시로 일상과 자연 속에서 자아를 바라보게 한다.
- 시인과 함께 시로 나누는 진솔하고 원숙한 삶의 대화를 열어 준다.
나는 영감처럼 와닿는 언어보다, 때로 길가에서 주운 언어를 맞추어 보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시인 박이도
시의 숲詩林에서 보여 주는 그의 언어들은 인간의 사랑과 희망을 시적 에스프리에 담아 우리의 근원에 깊이 잠기게 한다. 시인의 세월 속에서 그가 토해 내는 내면의 시편들은 단단하고 은은하다. 그는 내면의 진실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생명 사상’과 ‘자유의 정신’이 그의 시적 표상이다.
박이도 시인은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으로 대한민국문학상, 편운문학상, 기독교문화대상, 문덕수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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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he Thorn Birds Theme - Henry Mancini / 가시나무새(TV) The Thorn Birds (1983)
제작 1983년 (Mini) , 미국 // 감독: Daryl Duke // 음악 : 헨리 맨시니 (Henry Mancini)
#출처: 관악산의 추억( http://cafe.daum.net/e8853/MVDb/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