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어 풀이>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썩은 저 선비들아,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능연각 위에 뉘 얼굴을 그릴꼬.
<배경 및 해설>
작자가 함길도 관찰사로 있을 때,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 두만강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지었는데, 그 때,
그 호탕한 기개를 읊은 작품이다.
초장의 '장백산'과 '두만강'은 좋은 대구를 이루어 우리의 국토를 나타내고 있다.
중장에서는 선비들을 낮추어 표현해 무인들이야말로 나라를 수호하는
사내 대장부가 아니냐는 호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종장에서는 우리 무인들이 큰 업적을 세웠으니
공신(功臣)으로서 이름을 남겨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당당함을 보이고 있다.
작자의 대망(大望)과 호탕한 면모가 넓게 펼쳐진 산과 강을 배경으로
잘 나타나고 있으며, 실제 공을 세운 사람을 멀리하고
썩은 선비들이 큰 소리치는 현실을 고발한 작품이다.
김종서(金宗瑞, 1390~1453)
호는 절재(節齋). 1405(태종5)에 문과 급제. 세종, 문종, 단종의
세 임금을 섬기며 단종 때에는 좌의정에 올랐으나,
수양대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영조 22년에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김종서 장군]
김종서장군은 세종대왕 때의 무장으로 용맹함이 호랑이 같다 하여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조선 초기의 국경은 압록강~영흥지방이었고 두만강 주변에는 여진족이 살았는데
최윤덕이 여진을 몰아내고 4군을 개척하고 김종서가 두만강 하류 쪽에
6진(종성.회령.온성.경원.부령.경흥)을 설치하여 오늘날의 국경인
압록강~두만강까지의 국경선이 확립되었습니다.
당시 김종서 장군의 기개를 알려주는 유명한 자작시가 있습니다.
朔風(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明月(명월)은 눈 속에 찬데
萬里邊城(만리변성)에 一長檢(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해석)
몰아치는 북풍은 나뭇가지를 스치고 중천에 뜬 밝은 달은 눈으로 덮인 산과 들에 차가운데,
천리만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국경) 성루에서 긴 칼을 짚고 서서 북녘을 노려보며,
휘파람 불어치며 큰 소리로 호통을 치니 사나이의 기상에 거칠 것이 없구나
이 시를 보면..눈보라치는 북녘 땅 망루에 올라 국경을 주시하며 서 있는 늠름한
김종서 장군을 상상할 수 있으며 병마절도사란 직무를 맡고 알목하 일대의 여진족들을
크게 정벌하여 옛날 우리 영토였던 경원 등에 6진을 설치하여 조선 제 4대 임금이며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시름을 풀어드린 김종서 장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러한 김종서를 신임하여 자신이 죽은 다음,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이 병약하여
일찍 죽게 되었을 때에도 김종서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하였던 바,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어린 왕을 충실하게 보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왕위찬탈(계유정난:단종을 몰아내고 세조 즉위)을
진행하기 위해 당시 정승이었던 '백두산 호랑이'김종서를 제거할 음모를 꾸며
반역죄를 씌운 뒤 두 아들과 함께 살해하였습니다.
결국 김종서는 단종의 비참한 최후를 막아주지 못한 채 한스러운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충절이 재평가되어 1734년(영조 22)에 비로소 원래의 관직을 회복하였습니다.
김종서의 묘소는 충남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의 밤실마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김종서의 다른 시조]
長白山(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셕은 져 션비야, 우리 아니 사나희냐.
엇더타, 凌練閣(능연각) 上(상) 뉘 얼골을 그릴고.
※ 능연각 : 당 태종이 24 공신들의 얼굴을 그려 걸어 두게 했던 누각
장군다운 기상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6진을 개척한 의욕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