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행 스님의 고통 초극법 아짠이 북동쪽으로의 두 번째 여행을 했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과 수행체계에 고무되어 열광하였다. 그는 태국과 라오스 왕국의 읍내를 돌아다니면서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사람들을 가르치고 수행을 격려하였다. 사콜 나콘 읍의 남부 지역과 남서부 지역에는 거대한 삼림과 산맥들이 있었는데, 그가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가장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어했던 곳도 바로 이 부근이었다. 건조한 계절이 되면 인적이 드문 황야를 좋아하는 두타행 스님들이 이 지역 주변을 편력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부서진 대나무 조각들을 얇게 쌓아올려 단을 만들어 잠자리로 삼았다. 각자의 단은 서로 30~4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 간격은 스님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즉, 좀 더 넓은 지역에서는 훨씬 더 떨어져 있을 수 있다. 주어진 공간에 스님들이 적게 머물수록 서로의 간격은 떨어져서 기침소리나 재채기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정도가 된다. 각 단 사이에는 나무와 수풀이 있어서 가장 가까이에 머물고 있는 이도 잘 볼 수 없었다. 경행 길은 재가불자들이 깨끗이 쓸어 두었는데, 스님들에게는 각각 하나의 경행 길이 있었고 길이는 보통 10~20미터 정도였다. 스님들은 이 길에서 밤낮으로 경행하곤 했다. 귀신이나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스님이 있으면 아짠은 그를 그 지역 변두리에 두되, 다른 스님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게 하였다. 아짠은 그런 스님들이 자신의 공포를 잘 통제하도록 훈련시키기 위하여 이 방법을 쓰곤 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자신의 추측이나 상상에 의한 소산임을 그 스님은 터득해야만 했다. 일단 위험과 고통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망상을 극복할 수 있게 되면, 그 동안 자신을 압박해왔던 짐을 덜어버리고 어디를 가든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아짠에 따르면, 두려움으로부터의 일시적인 도피는 오히려 자신을 그 두려움의 영원한 노예로 만들기 때문에, 그 두려움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편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두타행 스님들은 대나무 단이 없으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마른 잎이나 싱싱한 잎, 또는 지푸라기로 땅바닥에 침대를 만들어 자야만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태음월[12월과 1월 사이]은 우기가 막바지에 달하는 기간이므로 다소 지내기가 불편한 계절이다. 장대비가 스님들의 피부 속까지 흠뻑 적셔 누구도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밤새도록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두타행 스님의 우산인 클로드도 사나운 비바람이 불면 아무런 보호막이 되지 못한다. 모든 스님들이 추위에 떨면서 자기 클로드 안 어둠 속에 앉아 있어야만 하였다. 그 모습은 가난한 장님보다도 더 비참해 보였다. 낮이 되어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 스님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비를 피할 임시 거처를 만들기 위하여 무언가를 주워 모은다. 스님들은 겉에 입는 가사와 성냥은 바루 안에 넣고 뚜껑을 꼭 닫아 조심스럽게 보관해야만 하였다. 윗 가사는 비가 오는 동안 담요나 비옷으로 사용하곤 하였다. 비바람을 막기 위해 클로드를 덮고 있는 모기장을 내리기도 하였다. 밤새도록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아침이 되도록 가사가 마르지 않았는데, 그럴 때면 탁발을 하러 마을로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 다음 석 달인 2월~4월 동안에는 점차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두타행 스님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동굴 속이나 절벽 밑에 거처를 찾았다. 몇 달 동안 이 지역은 비에 젖어 습기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계속 머무르면 당시에는 특별한 치료 방법도 없던 열병이나 말라리아 또는 만성쇠약증 같은 질병에 걸릴 것이 뻔했다. 일단 누군가 감염이라도 되면 자연적으로 치유가 될 때까지 견뎌내야 했다. 아짠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두타행 스님들이 그 지역에서 말라리아의 습격을 받았고, 그 중 몇 명은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이런 사실은 아짠과 그의 제자들이 해탈을 위한 고귀한 투쟁 속에서 얼마나 엄청난 고난을 견뎌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들은 죽음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서 살아남았고, 그 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떠맡았다. 즉, 자신들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깨달은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수행의 길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아짠은 항상 마음의 계발을 염두에 두면서 재가불자, 스님, 사미승들을 가르치는 데에 열중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목표는 사람들을 참다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마을을 돌아다닐 때면 그는 종종 그곳의 유지들과 마주쳤는데, 그들은 아짠에게 질문하고 토론하기 위하여 다가오곤 했다. 토론의 인기 있는 주제는 귀신과 아귀들의 존재, 인간의 출생의 근원지, 남자와 여자 ․ 수컷과 암컷이 서로 사랑하는 이유, 사랑에 있어서 교육의 필요성 여부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귀신 또는 아귀들은 존재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아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귀신이든 아귀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한다. 인간이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그들은 그 스스로 존재하므로, 인간의 믿음이 외적인 사물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귀신들에 대한 공포와 고통의 원인은 자신의 근심과 망상에 있다. 무서운 이야기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두려움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두려움은 실재하는 귀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망상으로 인하여 훨씬 더 많이 생겨난다.” “귀신은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합니까?” “실제로 귀신과 같은 게 존재한다 해도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그 존재를 확신시킬 명확한 증거는 아직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물건을 훔쳤다는 혐의로 붙잡힌 도둑은 대부분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 심지어 증인과 대면하여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어도 자신을 정당화할 어떤 방법이든 찾아내려고 애쓸 것이다. 감옥에 가서 그가 무슨 죄를 범하였는지 질문을 받는다면 절도죄로 고발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습성이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아짠은 인간이 부모로부터 태어났지 ‘나무의 구멍에서 나오지는 않았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마도 누군가 정석대로 ‘인간은 무명과 욕망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질문자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명과 욕망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다만 개개인의 출생 원인이 번뇌[kileśa]라는 것에 사로잡힌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점은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러한 번뇌들의 요소를 분해한다면 그것은 연기의 법칙에서 명시되었듯이 무명, 욕망 등으로 붙여 질 수도 있다. “무명으로부터 업(karma, 行)이 형성 된다”거나, “무명의 소멸을 통하여 업도 소멸된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어디에서 왔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근심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으며 다른 곳에서 대답을 찾을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외부로 쏠리는 생각과 주의력 때문에 자신의 본성, 현상, 그리고 가장 중요한 번뇌에 대하여 잘 볼 수 없게 된다. 그러한 마음은 허영과 완고함 때문에 길들여지지 않고 수련되지 않은 마음이다. “관습적인 교육이 없이도 어째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사랑하게 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아짠의 대답은 직접적이고 대담했다. “어떤 책에서도 인간의 육체적 욕망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되며 어떤 학교나 선생도 그것에 대해 가르쳐서는 안 된다! 육체적 욕망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또한 사랑에 빠진 짐승의 마음에도 존재한다. 육체적 욕망은 사람들과 짐승들로 하여금 나이나 계급, 종족과 국적에 관계없이 부끄러움을 잊게 한다. 욕망을 저지하고 억제하는 시도를 하지 않으면 마음은 육체적 욕구의 노예로 완전히 전락되어 사회는 곧 붕괴될 것이다. 이러한 번뇌를 부당하게 조장하고 중시함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숱한 고통의 가지들이 생겨났다. 사랑으로 가장된 육체적 욕망에 뒤덮인 마음은 고통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둑에 강물이 넘쳐나듯이 이 마음은 공공의 재해를 야기할 수도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홍수는 1년 내내 가뭄도 모르고 마음을 범람한다는 점이다. 이 육체적 욕망이 바로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동인(動因)이다.” “육체적 욕망으로 인하여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 이끌려 서로 기쁨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육체적 욕망의 교활함은 미묘해서 포착하기 어렵다. 그 욕망이 한편으로는 사랑을 야기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면 노여움, 증오와 같은 파괴적인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육체적 욕망으로 인해 남녀는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 같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헤어져서 증오하고 서로 눈도 마주치기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이 같은 사랑의 이중성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아짠이 그 질문자에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 부부는 싸움에 넌더리가 날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걸 피할 수가 없어요. 그냥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싸우게 됩니다.” “부부끼리 서로 도우려고 진심으로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싸우면서 사는 것은 그대 부부뿐만 아니라 그대들이 말다툼하고 고함치는 것을 보면서 자라는 천진무구한 자식들에게도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서로 화가 나고 상대가 미워지면 과거에 사랑했던 순간을 돌이켜 생각해 보아라. 그러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보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무엇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지를 생각조차 않는 군주나 완벽주의자와 같다. 이러한 태도는 대양의 물을 양손으로 막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결과는 틀림없이 쓰라린 실망과 좌절뿐이다. 이는 불가능한 욕망추구에 대한 당연한 대가이다. 이 원칙은 다른 가족 혹은 친구들, 타인들에게까지 확장되어 적용된다. 그럼에도 이 같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요, 불행이다. 사실을 수용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 그 자체에 의하여 축복을 받는다.” 이것이 사랑에 관한 아짠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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