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열세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녀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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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2,23-28)
"Look! they are doing
what is forbidden on the Sabbath!"
Then Jesus said to them
The Sabbath was made for man,
not man for the Sabbath.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를 뽑도록 하신다. 사무엘은 주님의 이 명에 따라 이사이의 아들들을 만난다. 주님께서는 사무엘의 예상과는 다르게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항의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옛일을 언급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밝히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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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는 놀랍게 들릴 두 가지 사실을 명백히 하십니다. 하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현대인에게 너무나 절실한 주제인 ‘자유의 체험’에 관해 묵상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의 주장을 이어 주는 접속사 “그러므로”는 논리적 귀결이나 인과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분리할 수 없이 깊이 연결된 직관적 깨달음이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율법 규정은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게 도울 때 그 ‘존재 이유’가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이어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자유의 몸’이시며 우리 역시 그러한 자유를 선사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이제 이러한 자유의 체험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란 무엇이며 자유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의 답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의 규정을 포함한 모든 계명의 정신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것과,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온 자유를 체험하는 것은 사실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진리에 감명받고, 더 나아가 자신이 ‘타인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사람은,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라는 노트거 볼프 아빠스의 말에 동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에 대한 체험일 것입니다.
언젠가 전철을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 앉아 있는데, 몇 정거장을 지난 뒤에 연세 지긋한 분이 출입구를 지나 제 앞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지요.
“어르신, 이곳에 앉으세요.”
그런데 이 어르신께서는 “나 노인 아니에요.”라고 거절하시면서 자리를 양보하는 저를 무안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절을 당하니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앉아있는데 괜히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치 ‘자리도 양보하지 않는 뻔뻔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제가 양보를 했는데도 어르신이 거절하셨어요.”라고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순간, ‘그냥 전철에서 내려야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내리면 자리가 생기는 것이고, 그렇다면 노인이라고 양보 받은 자리가 아니니 앉지 않으실까 편안한 마음으로 앉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내릴 전철역도 아니었는데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좋은 마음으로 양보한 자리였는데, 아마 이 어르신에게는 오히려 부담되는 양보였나 봅니다. 그렇다면 그 좋은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르신이 잘못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어르신 역시 남들에게 대접 받는 것이 편하지 않아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제게 도리어 양보한 것이니까요. 서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좋음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택한 방법은 어르신이 불편하지 않게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일어나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지요.
중요한 것은 나의 선의가 거절되었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상대방이 편안하게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 중심의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 중심이 아닌, 내 중심으로 생각하다보니 나의 선의가 거절되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가슴에 새겨야 할 분명한 기준을 말씀해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우리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 역시 사람 중심, 특히 나의 이웃들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배려하는 삶,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움직인다(이반 투르게네프).
함께 울어주는 따뜻한 사람
인터넷에서 따뜻한 글을 하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30대 초반의 유치원교사입니다. 가벼운 우울증이 있어 간혹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곤 합니다. 그냥 눈물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친구들과 식사를 하다가, 저녁에 TV를 보다가, 아침에 출근을 하다가... 제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릴 때 주변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요?”
“내가 무슨 실수 했나?”
대부분 이렇게 ‘이유’를 물어봅니다.
하지만, 제가 일하는 유치원 아이들은 다릅니다. 친구가 이유 없이 울음을 터트릴 때 주변 아이들의 반응은 거의 한결같습니다.
그냥 함께 웁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옆 사람의 눈물을 함께 해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서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솔직히 저 역시 항상 이유를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중요했는데 말이지요. 사실 주님께서도 항상 침묵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시지요.
이제부터라도 변해야 합니다. 이유를 묻는 우리가 아닌, 침묵 속에서 함께 울어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우리가 많아질수록 하느님 나라는 더욱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미움이 아닌 사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김대열신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코2,27) … 허기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낟알을 까먹는다. 이를 못마땅하게 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트집을 잡는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겁니까?”
행간을 읽어야 한다. 정말 율법에 나온 조항을 어겼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을까? 과연, 몇 퍼센트의 바리사이들이 613개의 율법 조항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고 있었을까?
어느 누가 미워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미워진다. 그가 잘했던 못했던 모든 것이 미워진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지닌 또 하나의 약함이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이 싫었던 것이다. 낟알 몇 움큼이 없어지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더욱이 율법 조항에 어긋나는 듯 한 일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싫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싫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에 걸맞은 논리를 찾으려 한다. 대부분 빈약한 논리들이다. 안식일이라는 틀에 사람을 끼워 맞추려는 듯한 논리다. 사람이 돈을 위해 있는 듯한 논리다.
경계해야 한다.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잘못된 일을 비판해야 한다.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위한 부정이어야만 한다.
율법 조항 613개가 많다고 하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의식할 수조차 없는 수없이 많은 복잡한 법과 규제 속에 살아가고 있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모든 법과 규제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를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모든 생명체와 자연이 그 존재 이유에 맞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모든 도리의 기본임을 기억하자. ----
삶은 정말로 단순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 삶을 복잡하게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다. (공자) Life is really simple, but we insist on making it complicated. (Confucius)
인간미가 넘치는 안식일 규정
-양승국신부-
아전인수(我田引水)란 말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어떤 사건이나 행동을 자기 멋대로,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또 잘 하는 것이 ‘확대해석’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듭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젯밤 아주 골치 아픈 일을 하나 겪었습니다. 밤잠도 설치고 아침에 출근하니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할뿐더러 어둡고 시무룩했습니다. 그 얼굴을 본 아전인수, 확대해석 잘 하는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오늘따라 왜 저리 인상 빡빡 쓰고 있지? 나한테 무슨 감정이라도 있나? 감정 있으면 말로 할 것이지 아침부터 재수 없게 왜 인상을 쓰냐구?’ 그걸로 끝나면 좋을 텐데 끝까지 다가가서 따집니다. “뭐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습니까?”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이 아전인수나 확대해석의 명수들이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의 취지는 원래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탈출기 34장 31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합니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이 말은 인간을 정말 많이 생각하는 말, 최대한 배려하는 말이었습니다. 원시적인 형태의 ‘근로기준법’이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악덕 기업주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강도 높은 노역으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저임금에 시달렸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정말이지 사람을 생각해서 만든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안식일 규정의 문구 하나 하나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세부 규정을 만들어나갔습니다. 아무리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몸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안식일에 걸어 다닐 수 있는 최대거리까지 규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거리는 1392미터였습니다. 더 철저한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요리조차 일이라고 생각해서 안식일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스위치 하나 켜는 것, 엘리베이터 버튼 하나 누르는 것조차 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이 하루는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난삼아 밀 이삭 몇 개를 잘라먹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즉시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밀 이삭 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재미삼아 몇 가닥 뜯어 먹었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본격적인 수확이나 농사일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장난이었는데, 그걸 그리도 확대해석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요즘 시대 안식일(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에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방에만 가만히 드러누워 있지만은 않습니다. 자녀들 끼니를 챙겨주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몸의 건강을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이 들길을 걷습니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에 몰두합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을 즐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결정적인 실수를 놓치지 않습니다. 율법에 대한 그릇된 해석과 오해, 편협한 적용과 과장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인간의 건강과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통해 인간이 일이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반대로 사람을 안식일의 노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나 제도라할지라도 그것들이 인간을 힘겹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수 없게 만든다면 백퍼센트 재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자유로움 자체이신 분, 하늘을 떠도는 구름처럼 거칠 것 없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제정한 법과 제도들이 조금이라도 그분 앞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볼 일입니다.
< 존재이유를 잊으면 괴물이 된다 >
-전삼용신부-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주연한 ‘터미네이터’란 영화는 1997년 개봉하여 매우 큰 흥행을 일으켰습니다. 온 몸이 불에 타고도 또 다리와 손이 잘려져 나가고도 한 여인을 죽이기 위해 눈에 빨간 불을 켜고 쫓아오는 사이보그의 모습은 영화가 끝난 이후로도 아주 긴 두려운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언지 모르는 공포로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이 영화의 발상이었습니다. 인간은 사이보그를 인간 자신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가정에서 편안함을 찾기 위해, 혹은 공장에서 위험함을 감소시키기 위해, 혹은 전쟁을 위해 로봇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많은 로봇들이 만들어지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런데 2029년 미래에 이 로봇들이 인공지능을 가지게 되면서 더 이상 인간에게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인간과 맞서게 된 것입니다.
로봇은 방사능에 영향을 받지 않음으로 핵전쟁까지 일으켜 30억이라는 인간을 죽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대장을 죽이지 못하자 타임머신을 이용해 그 대장의 엄마를 죽이도록 1984년 L.A.로 총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 사이보그, 터미네이터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레지스탕스 대장도 한 병사를 과거로 보내어 자신의 어머니를 보호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보낸 그 병사가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우리 편의를 위해 만들어 내는 어떤 것들이 결국엔 우리를 지배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안식일 법은 그것을 만든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제자들에게도 걸림돌이 됩니다.
안식일 법이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습니다. 바빌론 유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제 계급을 중심으로 고대 근동지방에 존재하는 안식일 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상 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6일 동안 일을 하고 안식일에는 쉬셨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하느님도 쉬셨으니 인간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면서 하느님을 기억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안식일 법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예수님 시대까지 오면서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을 위한 법이 아니라 돈 많고 시간 많아서 안식일에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이들, 즉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기득권들만이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정당성을 주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 동시에 도둑질까지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 법으로 옭아매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다윗도 도망치면서 하느님의 법을 어겼지만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법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법에게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안식일 법을 어긴 제자들을 옹호하는 것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 사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법을 어긴 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요즘 영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송강호 주연의 ‘변호인’입니다.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느냐란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법을 어기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돈만 밝히던 속물 변호사 송강호는 법이 인간의 존엄성 위에 있어서는 안 됨을 깨닫고 인권을 위해 자신의 편안한 삶을 걷어차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나는 있는 법을 집행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법이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국가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곽도원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국가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난 후,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읊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국가란 국민입니다.”, 이 송강호씨의 연기는 예고편만 다시보아도 왠지 눈물이 나옵니다. 정말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국가가 곧 국민이고 모든 법과 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정신이 사라지니 법도 괴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학순 주교님도, 김수환 추기경님도, 또 지금의 많은 분들도 권력과 법에 맞서셨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법이란 것에 피해를 받는 이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예언직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예언직이란 흰 것을 희다고, 검은 것은 검다고 말해주어야 하는 의무입니다. 모든 박해와 죽음은 바로 이 예언직 때문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고 수많은 과거와 현재의 예언자들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터미네이터가 인간을 해치기 위해 나타났다면 당연히 그것과 맞서야합니다.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본래의 존재이유를 찾도록 맞서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진 이유. 그것을 잊으면 나도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 원초적 존재이유, 그것이 소명이고 부르심입니다. 내가 변질된 모습이 아닌 참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내가 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되묻고 그 존재이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
- 황지원 신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 하루에도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열심히 선교하는 개신교 신자들, 그리고 특히 사람들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민과 동정의 마음은 무관심으로 변해 가고, 때로는 불편함까지 느끼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몸이라도 피곤한 날은 대뜸 '공공장소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법적인 잣대를 들이대곤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며 먹는 모습을 그려보면, 한편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들의 여정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어디 한곳에 머물러 안정된 삶을 살아가기보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세상을 다니며 가난한 삶을 살아가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면을 보는 듯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바리사이들은 그들의 삶에 연민을 느끼기보다 안식일 법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들의 법에는 사랑은 사라지고 차가운 시선만 느껴집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있기 전에 사람이 있었고, 그 이전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음을 말씀하시며, 하느님의 따스한 시선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끊임없는 사랑과 연민의 눈빛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떤지 돌아보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중세 봉건시대 때 어느 지역의 영주가 성탄절 전날 밤 거지차림으로 분장을 하고 마을을 돌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러한 영주를 마을 사람들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문전 박대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썩은 음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제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영주의 성탄절 아침 식사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밤 자신들이 적선했던 것과 똑같은 접대를 받아야만 했으니까요. 거지차림의 영주를 문전박대하며 내쫓았던 사람 앞에는 빈 접시가, 아무도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영주에게 주었던 사람 앞에는 썩은 음식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 전날이라며 좋은 음식을 나누었던 사람에게는 좋은 고기와 야채가 주어졌지요. 그런데 어느 농부의 접시에는 값비싼 금화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 농부는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지차람의 영주를 보고는 자기가 먹을 감자를 아낌없이 적선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세상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사랑을 받고 싶거든 먼저 사랑을 행해야 하며, 많은 것을 차지하고 싶다면 많은 것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기만 사랑을 받으려 하고, 또한 많은 것을 차지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아픔과 상처를 남에게 전하게 되고, 결국 자기 자신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 바리사이들이 따집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 역시 추수행위로 보았고, 그래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트집을 잡으려는 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흠집 찾기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결국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아 이긴 것 같았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그들의 패배로 되돌아오고 말았지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좁은 마음이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하고 자기만 많은 것을 얻어야만 한다는 속 좁은 마음으로, 2천 년 전의 바리사이들처럼 말도 안 되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내가 행한 대로 다시 되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최고의 사랑을 베푸는 오늘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최고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 가장 해로운 것은 허영심이다. 허영심은 항상 눈에 보이게 마련이며 악덕 중에서도 제일 바보스러운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노)
좁은 창
-김광태-
제 어머니 흉을 좀 볼까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무척 슬기로운 분 같았습니다. 가난에 찌들어 살았지만 동네의 젊은 여인들이 어머니를 찾아와 가정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위로를 받아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자주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제가 보좌신부가 되었을 때 뵌 어머니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만 만나면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얘기를 한꺼번에 풀어놓으셨는데, 그중 상당 부분은 형수에 관한 불만이었습니다. “네 형수가 돈을 헤프게 쓴다.” “아이들을 너무 버릇없이 키운다.” 저는 어머니 말씀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형수는 정말 보기 드물게 좋은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무릎이 아파서 외출을 못하시던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거실에 앉아 하루 종일 형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던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어긴 제자들이 잘한 건 없지만, 그런 걸 눈감아 주지 못하는 바리사이들 태도 역시 잘한 행동은 아닙니다. 좁은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그렇게 됩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넓은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도 넓어질 것입니다.
법과 자유, 그리고 사랑
-김찬선신부-
들은 얘기입니다만 옛날 전방 부대에서 군인들이 노루를 생포하여 우리에 키웠답니다. 저의 부대 같은 경우에는 무식해서인지 바로 잡아먹었는데 그 부대는 노루를 키우자고 의견이 모아져 부대원들이 아주 정성껏 키웠답니다. 그런데 먹이를 갖다주어도 이 노루는 먹지 않더랍니다. 먹이가 맞지 않아 그런가 하고 이 먹이 저 먹이를 가져다주었지만 끝내 거부하다가 마침내 굶어죽더랍니다.
부대원들의 사랑 부족도 아니고 먹이가 나빠서도 아닙니다. 죽은 이유는 자유 없음입니다.
야생 동물 같은 경우는 우리에 갇히면 죽습니다. 가축은 우리에서도 잘 삽니다. 길들여졌기 때문이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고 편합니다. 사람의 경우도 어떤 사람은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하고 규정이 있으면 그것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마살이 낀 사람은 한 곳에 머물러 살지 못하고 자유로운 영혼은 規定이 많으면 답답해서 못 삽니다. 규정이란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규정은 자주 충돌합니다.
개인의 자유를 너무 강조하고 너무 존중하다보면 공동생활이 불가능하고 결국 개인도 불편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규정을 너무 강조하고 많이 정하면 개인의 자유는 제약을 받고 개인의 창의성과 카리스마도 죽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는 사랑으로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존중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이 규정에 의해 방해받거나 차단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개인도 사랑으로 자신의 방종함을 절제하고 공동체의 일치와 공동선을 위해 규정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공동체는 규정을 가지고 개인을 억압하지 않고 개인은 공동체의 규정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며, 개인과 공동체 간에 사랑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전삼용신부-
요즘 저도 ‘추노’라는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추노꾼은 도망친 노비를 현상금을 받고 잡아오는 사람들입니다. 드라마에 보니 다시 잡혀온 노비들은 아주 처참한 형벌을 받습니다. 때리고 거꾸로 매달아놓고 굶기고 얼굴에 노비라는 글을 새겨 넣기도 합니다. 당시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하느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법이란 것은 그것을 만든 돈 많은 양반들에게나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법이 공평한가?’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틀리다고 말할 수 없는 경우들을 봅니다. 누구는 살기 위해 적은 돈을 훔쳐서 수십 년 감옥살이를 하고 또 많은 사람을 죽이고 수천억을 해먹은 사람은 잘도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법이 모든 사람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법 위에 서서 법을 이용해 더 큰 권력과 돈을 벌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법이라는 미명하에 가지고 있는 조금마저 아무소리 못하고 빼앗겨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요즘 방영하는 ‘아마존의 눈물’이란 다큐멘터리에서 보면 원시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돈이 없어도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잘 살아 갑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개념이 들어오자 이제는 잡아온 것들을 자기 가족들만 먹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은 그들에게 개인소유, 즉 이기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렇게 돈이나 법은 모두 ‘필요 악’인 것 같습니다. 필요는 하지만 그것 없이 살 수 있다면 더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법을 너무 따지는 사회, 그것은 어찌 보면 안전하고 공정한 것 같지만 사실 비인간적인 곳입니다.
가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가정에 법이 있어서 몇 시까지 귀가하지 않으면 매를 몇 대 맞아야하고 부모에게 말대꾸하면 외출금지가 며칠로 정해져있다면 그런 가정에서 사랑을 느끼며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남의 밀밭 사이를 가며 그 밀 이삭을 뜯어먹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본 법치 주의자들, 즉 바리사이들은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지른 죄는 남의 재산에 손을 댄 도둑질과 안식일에 그것을 뜯어먹는 일을 했기 때문에 안식일 법 두 가지를 동시에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만 가지고 트집을 잡는 것일까요? 그것은 도둑질보다 안식일법이 더 엄중한 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모세 법에 의하면 도둑질을 하면 두 배로 갚아주면 되지만 (탈출 22,6)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탈출 3,14)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하시며 제자들을 옹호합니다. 그들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던 다윗도 모세의 법을 어겼음을 알고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끝맺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지 법이 우선이 되면 안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법이 우선시되는 집단은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삭막한 사회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향하셨던 공동체는 법을 넘어서는 가족공동체였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주다보면 어쩔 수 없이 주일을 빠진 분들도 고해하러 자주 들어오는 것을 봅니다. 직장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족이 입원하여 간호해야 했기 때문에, 여행 중에 성당을 찾지 못해서 등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오지 못한 것을 왜 고해하느냐고 합니다. 의무감으로 주일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나와서 억지로 앉아있는 것보다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주일을 빠질 수밖에 없었던 신자를 하느님은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향하여 만드신 공동체는 이렇게 법이 사람보다, 사랑보다 우선하는 그런 집단은 아니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교구와 수도회가 서로 법을 놓고 싸우고 재판을 받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법을 이야기한다면 이미 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공동체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법대로 하자고 하면 이미 둘 관계는 막장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가서 깜짝 놀랐던 것은 규정을 어기면 가차 없이 처벌이 온다는 것이고 실제로 잘리지 않기 위해서 몸을 움츠려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가족 공동체라고는 하지만 규율이 너무나 엄했고 지금도 몇 명씩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아파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어기는 제자들까지 옹호해 주시며 따듯한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사랑으로 모든 딱딱한 규정들을 녹일 수 있는 우리들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 뽑히는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내치시리라는 예언을 전한 뒤, 예언자 사무엘은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아픔에 통곡하고 있었다.
사울이 어떻게 하여 뽑힌 왕인데...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며,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다.” 라고 백성에게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백성의 간청을 이기지 못해 어렵게 뽑은 왕이 사울인데... 이제 겨우 사울이 왕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 조직을 갖추었는데? 주변의 여러 종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안정을 누리고 가나안 땅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왕을 내칠 수밖에 없는 사무엘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통곡하는 사무엘에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왕을 뽑도록 하신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이사이의 집에 갔고, 이사이가 추천한 7명의 아들들을 보았다. 사무엘은 그들 가운데 용모와 신장으로 보아 출중한 아들을 뽑고자 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없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사람은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고, 힘이 있고, 얼굴이 잘 생기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가지기를 원한다. 더 많은 재물과 재산, 더 많은 학식, 더 강한 힘, 더 잘생긴 얼굴을 원한다. 그래서 사람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하여 서로 다투고, 헐뜯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양을 보지 않으시고 속마음을 들여다보신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속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물론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의지하고, 맡기며,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마음, 즉 하느님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마음을 더 중요시한다. 자신의 생각, 의지, 판단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신앙의 마음을 더 중요시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이가 추천하고 사무엘이 점찍은 크고 잘생긴 일곱 아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이사이 뿐만아니라 사무엘도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어린아이, 아마도 14살이 되지 않아 아직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어린아이, 그러기에 도저히 왕으로 선택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어린 다윗을 선택하셨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시다. 우리의 판단과 상상을 뛰어넘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크고 화려한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능력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비록 부족하고 모자라 다른 이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할지라도 좌절할 것이 없다.
내가 비록 실패하여 남들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으리라고 손가락질해도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할 이유가 없다. 내가 언제 어디서라도,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내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하느님께 의지하고 내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하느님께서 나를 뽑아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신앙인, 자신의 생각과 판단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뽑히는 신앙인이 되자...............◆
영혼을 찾아 나서시는 님
- 조정희 수녀-
오늘 말씀에 머무르며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여섯 식구를 부양하느라 늦은 밤까지 일하시던 아버지, 늦게 돌아오셔서 모기장 밖으로 빠져 나온 우리의 발을 넣어주시고 부채로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주시던, 주일에도 쉬지 못해 통신교리를 받으셨던 아버지. 내가 교사가 되어 촌지를 거절했다는 말씀을 듣고 “네가 나보다 더 소신껏 살 수 있어 기쁘다.” 하고 말씀하셔서 ‘아, 아버지는 이렇게 자신을 굽히고 살아오셨구나.’ 하며 눈물이 북받쳐 올랐던 적이 있다. 위암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먼저 돌아간 큰아들을 생각하시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이란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를 물으시곤 세례를 받으셨던 아버지….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 모습을 묵상하며 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배고픔과 안식일에도 영혼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가 당신을 찾을 때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님! 우리를 당신 삶의 주인으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기며 우리도 참된 사랑의 길을 걷도록 초대하시는 님…. 그저 밤이고 새벽이고 아이들이 좋았던 때가 생각난다. 방학 때도 함께 눈 덮인 산을 오르고 바다에서 일출을 보며 돌아올 땐 돈이 떨어져 라면을 먹으면서도 좋았던…. 그런데 이제 난 휴일엔 쉬고 싶어하고, 먼 길 떠나기도 전에 미리 피곤해한다. 이런 나에게 님께선 조용히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그 눈빛은 내게 ‘네 안에 있는 나를 보렴.’ 하시는 듯하다.
종교적 의식보다 인간의 필요가 더 중요하다
-오기백 신부-
몇 년 전에 미사를 봉헌할 때의 일입니다. 성체를 분배하던 중에 한 아기를 업은 엄마에게 성체를 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엄마가 성체를 손에 받았을 때쯤 아기가 너무 울자 성체의 작은 조각을 아기에게 주었고 아기는 금방 조용해졌습니다. 그 순간 저는 당황했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이 그 아기가 엄마와 함께 예수님의 최후 만찬에 초대 받았다면 예수님께서 그 상황에 고개를 끄덕이셨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오늘날 미사와 관련된 규칙과 법칙에 위반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종교적 의식보다 인간의 필요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의 제2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 금구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영광스럽게 하고 싶습니까? 고통 받는 당신의 형제의 몸인 성전이 교회라는 성전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성찬 전례를 거행하는 제단보다 고통받는 형제의 몸이 더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제2의 모습입니다.
법치사회에서 가족공동체로
-전삼용신부-
어떤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신학생들 사이에서 자꾸 물건이나 돈이 없어지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도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하자 경찰에게까지 범인을 잡도록 의뢰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도둑은 신학생 중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심지어는 지문조사까지 해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교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았습니다. 외출도 엄중하게 규제되던 때에 네 명의 신학생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밖에서 만두를 먹고 늦게 귀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교수신부님께 걸려서 모두 본보기로 수스펜시오, 즉 1년씩 휴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나머지는 다음 해에 복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만두 하나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는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가져야만 하는 걸까요?
법으로 규제되는 사회, 그것은 어찌 보면 안전하고 공정한 것 같지만 사실 비인간적입니다. 가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가정에 법이 있어서 몇 시까지 귀가하지 않으면 매를 몇 대 맞아야하고 부모에게 말대꾸하면 외출금지가 며칠로 정해져있다면 그런 가정에서 사랑을 느끼며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법으로 통제되는 집단을 ‘사회’라 부르고, 사랑으로 이루어진 집단을 우리는 ‘가족공동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과연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남의 밀밭 사이를 가며 그 밀 이삭을 뜯어먹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본 법치 주의자들, 즉 바리사이들은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지른 죄는 남의 재산에 손을 댄 도둑질과 안식일에 그것을 뜯어먹는 일을 했기 때문에 안식일 법 두 가지를 동시에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만 가지고 트집을 잡는 것일까요? 그것은 도둑질보다 안식일법이 더 엄중한 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모세 법에 의하면 도둑질을 하면 두 배로 갚아주면 되지만 (탈출 22,6)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 (탈출 3,14).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하시며 제자들을 옹호합니다. 그들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던 다윗도 모세의 법을 어겼음을 알고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끝맺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지 법이 우선이 되면 안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법이 우선시되는 집단은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삭막한 사회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향하셨던 공동체는 법을 넘어서는 가족공동체였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주다보면 어쩔 수 없이 주일을 빠진 분들도 고해하러 자주 들어오는 것을 봅니다. 직장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족이 입원하여 간호해야 했기 때문에, 여행 중에 성당을 찾지 못해서 등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오지 못한 것을 왜 고해하느냐고 합니다. 의무감으로 주일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나와서 억지로 앉아있는 것보다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주일을 빠질 수밖에 없었던 신자를 하느님은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향하여 만드신 공동체는 이렇게 법이 사람보다, 사랑보다 우선하는 그런 집단은 아니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교구와 수도회가 서로 법을 놓고 싸우고 재판을 받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법을 이야기한다면 이미 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공동체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법대로 하자고 하면 이미 둘 관계는 막장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신앙공동체 안에서만이라도 법이나 규정을 이야기하지 말고, 사람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가족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는 천신의 사자로 자신의 존재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인간들이 자신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궁금해졌지요. 그래서 헤르메스는 인간으로 변해서 신화에 나오는 신만을 조각하는 어느 조각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조각가의 집에 있는 제우스 동상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이 동상의 값은 얼마입니까?”
“그 동상은 1백만 원입니다.”
헤르메스는 이번에는 헤라의 동상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이 동상의 값은 얼마죠?”
“그 동상은 1백50만 원입니다.
헤르메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조각을 가리키며 값을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천신의 사자이기 때문에 그래도 값이 가장 비쌀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조각가는 아주 의외의 답을 합니다.
“그 동상은 다른 동상을 사시면 그냥 드리겠습니다.”
자기 자신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모습, 이 모습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쓸데없는 일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생각나요.
어떤 사람이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이 유산을 가지고서 특별한 동물을 만들어 더 큰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지요. 그리고 드디어 세상에서 최초로 ‘점박이 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이 점박이 쥐를 살까요? 수많은 돈과 시간, 노력과 재능을 투자해서 점박이 쥐를 만들었지만, 결국 쓸모없는 일이 된 것이지요.
이렇게 쓸모없는 일만, 즉 무의미한 일만 계속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들을 바로 내 자신의 모습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지요. 따라서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겸손함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의미 있는 삶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대한 규정을 내세워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최근까지도 열심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 시계태엽을 감지 않으며, 편지를 뜯지 않는 것은 물론 추워도 불을 지피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이보다도 더 엄격히 지켰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모습에 대해서 옳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즉, 재계를 지키는 것이 재계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때를 가리어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이 모습을 쫓을 때가 많습니다. 형식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습들, 그리고 이 형식만을 쫓고 있는 내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들. 바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닮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 대단하지 않음을 생각해 봅시다.
안식일의 이유
-구경국 신부-
십자고상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기시켜 그리스도의 죽음을 좀 더 쉽게 묵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고상 자체를 미신적으로 숭배하는 위험이 생길 수 있는데, 상징에 지나지 않는 십자고상이 차츰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어 결국에는 십자고상과 그리스도를 혼동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동은 비단 십자고상과 같은 성상뿐만 아니라 계명을 해석하는 데에서도 생겨납니다. 안식일 계명의 의미는 하루를 쉼으로써 우리들의 노동력을 회복시키거나 다음번의 노동을 위하여 몸의 상태를 조절하기 위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노동의 고역이 아니라 영원한 휴식의 기쁨을 인간의 목적으로 설정하신 하느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주인이며 세상의 창조주, 그리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연결되는 날이며 하느님의 손안에 창조된 인간이 머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거룩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안식일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느님과 함께 머물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는 하느님의 거룩한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으로 배려하면서 지내야 할 것입니다.
화려한 주말
-김현숙 수녀-
◆“이번 주말엔 뭐해요?” 주말이 화려할수록 멋진 인생을 사는 것처럼 생각하며 으레 주고받는 인사다. 나의 안식일도 언제나 미리 스케줄이 짜여진다. 주일미사를 성대하게 드리고 고요히 하느님과 사귀는 날로 지내야지 하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 무언가 스케줄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손해 보는 듯 무능한 듯 생각되어 강박에 쫓기듯 계획을 짠다. 밀린 일, 밀린 빨래, 방 정리, 수업 준비, 영화 구경, 가벼운 등산, 누군가와 미팅, 못다한 숙원 사업 등. 어쩌다 주어지는 연휴엔 더 많은 계획과 일거리를 미리 준비해 둔다. 계획으로 채워진 주말을 기다리다가, 지나간 주말을 못내 아쉬워하는 월요일엔 어김없이 만성 월요병 증후군에 시달린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위한 사람으로 전도되는 현실. 안식일의 주인이며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부담스럽게 모시고 재빨리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서는 우리의 주일. 어느새 우리가 안식일의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 김남주 시인은 아들이 사는 시대에는 노동자들이 토요일·일요일에 안식을 취하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열망하며 아들의 이름을 ‘토일’이라고 지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풍요·이상을 누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과연 그 옛날 의식주에 허덕이던 시절보다 무엇이 더 나아졌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이상을 희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학창 시절에는 가족과 함께 곱게 차려입고 미사를 드리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그래서 이런 꿈을 그리기도 했다. 화사한 봄날 주일, 온 가족이 말끔하게 차려입고 미사에 참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린아이들 손엔 풍선을 쥐어주고 들녘을 걸어가는 행복한 가정! 안식일에도 생계를 위해 일해야만 한다면 예수님은 그와 함께 안식일에도 일하실 것이다. 안식일에 주님을 예배하고 축복을 청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축복을 주실 것이다. 바리사이 같은 나의 안식일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 밀 이삭을 뜯지 않겠니? 나와 함께 미사에 참석하지 않겠니?”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어떤 의사가 꾀병은 고칠 수 있지만 월요병은 고칠 수 없다고 했는지 말이다. 예수님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오상선신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어느 가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를 떠올린다.
사실 하느님의 창조물 중에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피조물, 가장 하느님과 유사한 피조물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기 때문이다.
우리 크리스천 인본주의는 바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데서부터 출발한다. 각 사람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다면, 아니 바로 하느님의 각 사람 안에 살아계시다면 그 어떤 사람도 무시되거나 비인격화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비단 오늘 바리사이들이 밀이삭을 잘라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도 이와 유사한 비인간화의 행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돈 때문에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들은 이제 매일같이 듣고 보게 되는 가십거리에 불과할 정도가 되었다. 자식은 낳으려 하지 않으면서도 애완동물을 자식보다도 더 애지중지하는 것도 크게보면 같은 맥락이다. 사람보다는 차가 우선시 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율사들의 안식일 규정에 대한 해석은 마치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나 국회에서 볼 수 있는 아전인수식 법해석 논리와 유사하다. 사람을 위하기보다는 정치논리가 우선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어떠한가? 교회법, 사회법 등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나의 필요에 따라서만 해석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해석이 사람에게 유익한 것인가 먼저 깊이 헤아리고 숙고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 오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하자. 사람이 돈보다 더 소중하다고 노래하자. 사람이 곧 하느님이라고 노래하자.
사람을 위해 생긴 안식일 -정 호 신부 -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스승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말썽을 피우는 제자들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피하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질문에 오히려 옛날 이야기를 하시며 우리의 판단력을 흐려놓으십니다. 곧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이 정작 그 일을 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었을 때 우리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를 물으십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일 때 말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라는 말씀은 이 안식일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을 밝히신 것입니다. 모든 창조가 끝나고 온 세상이 하느님을 닮아 창조된 이들에게 맡겨졌을 때 하느님은 쉬셨고 사람에게도 쉬도록 이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쉬셨다 함은 그 이외의 날에 일을 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은 나머지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만드는 것마다 좋았노라고 감탄하시며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이 모든 것을 주관할 사람을 당신을 닮게 창조하시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 하나 하나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지켜보셔서 당신의 사랑의 능력을 닮은 인간에게 그 세상을 맡기심으로써 창조를 완성하시고 안식일에 그 사랑스러운 세상의 어울림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일의 쉼의 또 다른 모습인 정지가 아닌 사랑의 조화로운 세상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후 하느님은 당신의 쉼을 사람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 창조되었기에 그에게 맡겨진 일은 만들어진 세상에 사랑을 줌으로써 풍성하게 세상을 유지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일이 시작되고 하느님은 그런 그들에게도 자신들이 베푼 사랑을 확인할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 바로 안식일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안식일 역시 사랑의 중단이 아닌 사랑의 확인이며 모든 것에 대한 조망의 휴식시간이라고 느껴집니다.
바로 그 날, 인간이 배고픔에 허덕일 때, 세상이 관심의 부족으로 쓰러질 때 그것을 그냥 보는 것을 하느님의 뜻을 어긴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타당한 일일까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시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기회를 무산시키고 누군가를 희생시키려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희생이라고 후에 치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서 만드신 날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듯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며 즐겁게 보내라고 세우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날 우리의 마음은 평소보다 더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한주간 즐겁게 살아온 삶을 멀리서 확인하며 더 풍부해지는 사랑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느님의 배려를 단순히 명령으로만 해석하며 사람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느님을 따라 만든 수도 없는 법과 관습 속에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은 분명 하느님이 주셨으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모습에 따라 그 법을 여러가지로 해석하곤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오늘 복음에서처럼 배고픈 이를 위해 밀밭의 곡식을 먹을 수 있게 해 놓은 사랑의 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를 굶주림에 지쳐가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위해 안식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뜻을 따라 우리의 안식일을 그분처럼 지키도록 노력합시다. 그것이 일부 이 말씀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려는 허망한 인생이 있음에도 우리에게 절실한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유 루시아 수녀 -
◆예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면서 형식과 사람이 만든 법과 규율에 빠져 있는 바리사이인에게 도전을 합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있을 땐 미사를 참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길이 막히면 신부님이 우리 마을에 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억하기에 두 달 동안이나 신부님이 못 오셔서 그날은 정말 애타게 신부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미사 참례를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우리에게 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도와주러 가면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미사 참례를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정말 애통하게 느꼈지요. 그때 나는 예수님이 지금 내 처지에 계시면 어떻게 하실는지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제 귀에 울렸습니다. “미사 참례를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 환자를 도와주어라” 하시는 것이었어요. 예수님은 정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양승국신부-
<해질녘 강가, 과수원에서>
어린 시절, 주말만 되면 저는 ‘고기잡이 전문가’였던 형을 따라 강으로 계곡으로 따라다녔습니다. 저도 슬슬 재미를 붙여 해지는 줄 모르고 고기를 잡았습니다.
고기를 잡는 방법도 다양했지요. 낚싯대로 잘 안 잡히면, 커다란 해머로 물에 잠긴 바위를 내리칩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위 밑에 숨어있던 고기들이 기절을 해서 떠오르지요. 어떤 날, 저는 하루 온 종일 형과 같이 타고 간 자전거의 페달만 열심히 돌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형은 페달을 돌릴 때 생기는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서 고기를 ‘감전’시켜서 잡았습니다. 또 형은 손으로 고기를 잡기도 했는데, 정말 귀신같았습니다.
그렇게 잡은 고기는 날걸로 먹기도 하고, 튀겨먹기도 하고, 매운탕도 끓여먹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해가 넘어가곤 했습니다.
강가에는 큰 과수원이 하나 있었는데, 늦여름 쯤 되면 사과의 크기도 크기지만, 그 빛깔이 너무 고왔습니다. 낮에는 괜찮았는데, 해만 떨어지면 그리도 유혹이 커졌습니다. 때로 유혹을 참지 못해 과수원 담을 타고 넘어갔습니다. 크고 잘 익은 것은 미안해서 손을 못 대고, 떨어진 것들 몇 개씩 주워서 나오곤 했습니다.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는 말, 누가 했는지 정말 정답이었습니다. 그 맛이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그러다 가끔씩 주인아저씨에게 들켜서 밤늦게까지 벌도 서고, 거름도 옮기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우리 시골 전통 안에 ‘서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별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젊은이들이 혈기를 한번 부려보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은 관대한 마음으로 눈감아주는 좀 특별한 전통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닭서리’ ‘수박서리’ 인데, 아직도 그 기억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했었지요. 요즘같이 ‘차 때기로’, ‘무자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안해하면서, 닭 한두 마리, 혹은 수박 한 두통, 그 정도였습니다. 어르신들도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허허’ 하고 슬쩍 눈감아주셨지요.
요즘같이 경찰에 고소한다든지, 법정에까지 간다든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리란 것은 적정선의 ‘장난끼’가 발동되는 것이었습니다. 심각하게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호기부리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가다 보니,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장난기가 발동되었습니다. 아니면 어린 시절 밀 이삭을 잘라먹던 추억이 떠올랐겠지요. 자연스럽게 밀 이삭 몇 가닥을 뜯었습니다. 비벼먹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웃으면서 따라했겠지요. 장난으로 그랬지, 그것을 ‘노동’한다면서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지금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기가 치지도 않았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안식일을 정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신체구조, 신체리듬 상, 한 엿새 일하고 나면 지치기 마련입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칩니다. 스트레스 지수도 높아만 갑니다. 그런 상태에서 계속 일을 하게 되면 일의 능력도 떨어집니다. 그 정도 되면 일이 기쁨이요 보람이 아니라 인간을 힘들게 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괴로움의 원천이 됩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노동은 삶의 큰 보람입니다. 노동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안식일(혹은 주일)이라도 먹어야 합니다. 안식일이면 오히려 재미있게 지내야지요. 안식일 날 꼼짝 없이 집 안에서만 지내기보다는 산으로 들로 나가 맑은 공기를 쐬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겠습니다.
안식일 규정에 나와 있는 것처럼 송장처럼 꼼짝없이 지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웃기는 일입니다. 당시 안식일 규정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때로 너무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규정이어서, 너무나 이치에 맞지 않는 규정이어서 배를 쥐고 웃을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안식일의 세부 규정 때문에 안식일이 오히려 더 괴롭고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1,392미터 이상 걸으면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밀 이삭을 한 개 자르는 것 역시 큰 위반이었습니다. 꽃 한 송이 꺾는 것도 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열매에 손대는 것조차도 위반이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위반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쫀쫀하게’ 된 바리사이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주고 싶으셨습니다. 안식일의 핵심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최의정 신부-
제가 2년 전, 이맘 때, 휴가를 보내면서, 어느 수도원에서 피정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비록 2박 3일의 휴가였지만, 수사님들과 함께 참여했던 전례와 식사시간, 그리고 모처럼 고요한 가운데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피정 때, 산책을 하면서 그곳 바위에 새겨진 글귀를 보았습니다. 꽤 큰 글씨로 새겨졌지만, 아주 단순한 내용이었는데,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하느님만 찾으라.”(성규 58, 7) ... ... ... 이 얘기를 들으신 여러분 가운데에는, 거기가 어딘지 아시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정말, 하느님만 찾으며 살 수 있을까요? 수도생활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계십니다. 세상의 일을 하고,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근심걱정도 해야 하지요. 앞날에 대한 걱정도 해야 하고, 자녀들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하고, 당장 내일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고, 잠시도 쉴 겨를이 없습니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많이 일을 해야 하고, 그러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기에 바쁜 여러분에게, “하느님만 찾으라.”는 말은 그저 먼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생산성, 효율성을 강조하는 요즘 세상에서, 하느님만 찾고서 사는 수도자들의 모습은 어쩌면, 가장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모습으로 비춰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을 바치고 극기를 실천하고, 세상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어떤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가 이렇게 건재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직도 이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폭력,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분위기, 지구 한 편에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하루에도 부지기수이고, 또 한 편에서는 사치와 과소비가 급증하는 그런 불의가 있지요. 우리가 먹다 남기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요. 아직도 끊이지 않는 이 세상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위해서,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서 누군가가 끊임없이 드리고 있는 그 기도가, 하느님 진노의 팔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봐
-문화순 수녀-
사도직을 하면서 궁금한 것이 있어 K신부님을 찾아갔다. 신부님은 텔레비전으로 축구 경기를 보고 계셨다. 운동을 무척 좋아하시는 신부님이라 ‘때를 잘못 맞췄구나’ 생각하며 “나중에 올게요”라는 말을 하려는데, 신부님은 텔레비전을 끄고 별 것도 아닌 내 얘기를 들어주셨다. 연세 많으신 신부님이 아직 종신서원도 안 한 어린 수녀를 존중해 주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필요한 것이 있어 신부님께 청하러 가면 “그렇게 해봐”가 대답이셨다. 그래서 어떤 땐 “신부님, 이런저런 것들이 필요한데요. 돈은 얼마가 듭니다” 하고는 내가 대답으로 “그렇게 해봐” 하면, 같이 한참 웃고는 역시 “그렇게 해봐” 하신다. 늘 우리가 하는 일을 믿어주셨기에 청하러 갈 땐 오히려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고, 꼭 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결정해서 가게 되었다. 부끄러움이 많고 긴장을 잘하는 나는 실수도 많고 덤벙대기도 잘했는데 실수를 웃음으로 넘겨주셔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신부님과 농담도 곧잘 하면서 마음 편하게 소임을 할 수 있었다. 가끔 미사 때 대제병을 놓지 않으면 우리만 알 수 있게 성반을 휙 돌리신다든가, 우리의 실수를 교우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돌려 말씀하셨기 때문에 늘 고맙고 아버지같이 기댈 수 있었다. 우리에겐 그렇게 후하게 해주시면서도 당신은 손수 폐지를 잘라 메모지로 쓰시고, 재활용 화장지를 사용하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신부님과 수녀들이 회합을 하면 신부님이 농담을 잘하셨으므로 내내 웃다가 온다. 그런데도 모든 성당 일이 잘 돌아갔다. 제의실에 들어오시면 먼저 우리를 웃겨놓고 제의를 입으신다. 신부님이 다른 본당으로 이동되시던 날, 본당 회장님께서 인사 말씀 중에 “우리 신부님은 돈 얘기를 한번도 하신 적이 없는데도 본당 살림에 돈이 모자란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셨던 것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부님은 우리 삶 안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임을 깨우쳐 주신 예수님처럼 신부님도 팍팍한 일상의 건조함을 웃음과 여유와 너그러움, 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아낄 줄 아는 큰마음으로 헤아려 준 분이셨다. 지금은 천당에서 나를 보시고 ‘작은 눈 가지고 뭐에 쓰노?’ 하시며 놀리실 것 같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
- 이수락 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오늘은 안식일 법에 대한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논쟁의 핵심적인 의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법은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법이 법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인간을 위한 보편적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어떤 법이 인간을 너무 통제하는 쪽으로 흘러 인간이 이 법에 의존하기 시작함으로써 사람이 오히려 그 법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법을 ‘악법’이라 하며 개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한편에는 악법도 법이라면서 사회적 질서를 위한 법과 규범은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일 세상 모든 이가 각자의 이익을 기준으로 법을 바라본다면, 하나의 법이 누구에게는 악법이 될 것이요 누구에게는 유용한 법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옳은 규범을 가져다주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율법은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시면서, 사실 이 둘은 본질상 하나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 법이 하느님을 위한 법으로 제정되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사람을 위한 법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면 하느님도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모든 법은 사람을 살리고자 만들어졌으며, 그런 이유로 동시에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2장 18절에서 3장 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벌인 논쟁입니다. 어제 복음인 2장 18절에서 22절까지는 단식에 관한 논쟁이고, 오늘 복음인 2장 23절에서 28절까지는 안식일의 주인에 관한 논쟁이고, 내일 복음인 3장 1절에서 6절까지는 안식일 치유에 관한 논쟁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식과 안식일과 치유의 근본정신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동차 문화도 이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과시용으로 중형차,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점잖은 사람도 자기 자동차를 누가 스치거나 긁기라도 하면 돌변하여 목청을 높이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동차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자동차를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중요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안식일 규정은 예수님 시대에 중요한 규정이었고, 의로운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잣대로 모든 것을 쟀기에 근본정신을 잊었던 것입니다. 근본정신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법의 근본정신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한 가지 방편은 법을 지키는 데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그 법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반성과 숙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교통법규는 꼭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긴급차량이 지나가야 할 경우에는 복잡한 도로에서도 서로 협력해서 먼저 갈 수 있도록 양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중앙선을 지킨다거나 갓길로 차량을 운전해서는 안 된다고 비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통법규의 목적인 안전한 운행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전과는 거리가 먼 지나친 단속이나 자신과 이웃의 안전에 심각한 위험이 있는 음주 운전 등은 법의 목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일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경우도 생각해 봅시다. 가끔 교우들이 미사에 빠지거나 미사 시간에 늦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면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는 생각하지 않고 편한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법을 잘 지키면서도, 그 법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리지 않는 참다운 신앙인들이 되도록 다시 한번 다짐하고 노력합시다.
창조적 휴식
- 이기양 신부-
??주일을 일요일로 고치자.?‘라는 논쟁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주일을 주님과 함께?‘ 라고 광고를 내자 비신자들이 주일이 아니라 일요일이라고 시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작은 논쟁이었지만 주일에 대한 신자와 비신자의 생활 방식이 전혀 다름이 드러났던 사건이었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율법 학자들은 주일의 참된 의미?대해서 논쟁을 벌입니다. 안식일은 히브리말로 ??샵바트?‘(sabbatch)라고 하는데 ??쉬다, 하던 일을 멈추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이 되는 날 쉬셨기에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해 주님께 바쳐 드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2,2-3)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할 때에 주간과 안식일 제도까지 제정하셨다고 창세기 저자는 말합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백성을 다른 민족들과 구분 짓는 커다란 표징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 ??안식일?‘이 예수님과 율법 학자들 사이의 큰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불쌍한 병자를 고쳐 주시는데 이를 바리사이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요. 이 안식일에 관한 갈등으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모의까지 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분개하며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로 고발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예수님께서는 으레 회당에 가셔서 전례에 참석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1,21-2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 또한 계속해서 안식일 규정을 지켰습니다.
?’바오로는 늘 하던 대로 유다인들을 찾아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사도17,2)
오늘 복음에서도 안식일 법을 놓고 바리사이들과 예수님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2,2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마르2,25-26)
바리사이들은 참된 안식일의 정신이나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이 만든 법의 세부 규정에 얽매인 그릇된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휴식과 기쁨의 날인 안식일, 곧 하느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내야 하는 날이 일종의 금령의 날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짐스러운 날이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법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
안식일은 하느님의 위한 날이고 하느님을 위함은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됩니다. 다시 말해 안식일은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날인 것입니다.
우리 시대 역시 안식일, 곧 주일을 신자의 의무로만 여기어 짐스럽게만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으로 여겨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가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징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들은 또 다른 바리사이들로서 주일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 또한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주일은 나 자신의 휴식을 취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날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통해 육체적인 휴식뿐만 아니라 영적인 재충전도 맞는 은총의 시간을 갖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나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계명입니다.
안식일 법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예수님과 함께 매주간을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해방자 예수
-강영구신부(2004-01-20)-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때 함께 가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마르코 2,23-24.27)
성령으로 도유되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신(루가4,18-19;이사야61,1-2) 예수님은 찬미 받으소서.
예수님, 우리를 온갖 사슬에서 풀어주시는 당신은 저희들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데는 법과 규칙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인간은 욕망 덩어리입니다. 욕망은 폭발하는 에너지입니다. 그냥 내 버려두면 무절제하게 폭발하는 욕망에 지배당하고 욕망의 늪에 빠져 다함께 망합니다. 율법과 계명은 그릇입니다. 출렁거리는 욕망을 담는 그릇입니다. 율법과 계명의 그릇 속에서 비로소 출렁거리는 욕망은 잠잠해지고 에너지 분출의 방향을 바로 잡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희들에게 두 가지 큰 그릇을 마련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릇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그릇(루가10,25-28)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사는 길이 있으니 그대로 실천하라 하셨습니다.(루가10,28)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을 쥔 자들, 그 권력이 정치적인 권력이든 종교적인 권력이든 권력을 쥔 자들은 온갖 규율과 규칙을 만들고 그 규율과 규칙 속에 사람들을 가두어 놓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규율과 규칙의 노예가 되면,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쉽게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계명과 사람을 사랑하는 계명 말고는 모두 파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을 율법과 규칙의 사슬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있는 날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사람을 배고프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 본래의 의미를 되찾아 주신 예수님,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오늘 저희들도 하느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一明)
안식일의 주인
-박상대신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논쟁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논쟁(論爭)은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동시에 반대자들의 생각까지 폭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논쟁을 즐기신다. 예수께서는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동시에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밝혀 드러내신다. 결국 논쟁은 예수님 자기계시의 한 방편인 것이다.
예수님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이에 논쟁의 강도가 점점 깊어져가고 있다. 마르코복음을 따르면 예수님의 중풍병자에 대한 죄사함의 발언(2,5-12)에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한 식탁공동체(2,13-17)와 단식문제(2,18-22)를 통해서 불거져가고 있으며, 이제 두 번의 안식일 규정문제(2,23-28; 3,1-6)로 논쟁은 극에 치닫게 된다. 결국 안식일 논쟁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를 없애버리려는(3,6)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나타나서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만들기 위해 밀 이삭을 잘랐는지, 배가 고파서 먹기 위해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맥상 후자(後者)의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평소 때라면 이웃집 밭에 서 있는 곡식 이삭에 낫을 대지 않고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허용된다(신명 23,26). 그러나 이 일도 안식일에는 금지된다.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일이 안식일에 금지된 추수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항의에 예수께서는 세 가지의 답변을 시도하신다. 첫째는 굶주렸을 때 법을 지키지 않은 사례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이 법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법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가르침, 즉 인본(人本)위주의 법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셋째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법의 주인이며 근본적으로 모든 법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 가지 답변을 분석한다면, 첫째는 유다인 계통 그리스도교인들의 입장일 것이고, 셋째는 이방인 계통 그리스도교인들의 입장일 수 있으며, 두 번째 답변이 예수님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에비아달 대사제 때에 사울에게 쫓겨다니던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파서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제단에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25-26절)고 했는데, 관련된 성서의 구절을 살펴보면(1 사무 21,1-10) 당시 대사제는 에비아달이 아니라 아히멜렉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분명 잘못된 기록이다. 아무튼 논쟁의 핵심은 인본 위주의 법해석이며, 예수께서 법의 주인이시며 법 위에 군림하신다는 것이다. 법은 지켜지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법의 정신을 따라 법을 적용하는 것이 분명 더 중요한 일이다. 이제 예수님은 법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는 해석자로 등장하시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