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이교도인으로 로마 제국의 관리인 부친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그리스도인인 모친 성녀 모니카(Monica, 8월 27일)의 아들로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 현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Souk Ahras])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타가스테와 인근 마다우라에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는데, 370년에는 법률가가 될 꿈을 안고서 수사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카르타고(Carthago)의 대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는데, 여기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여 그의 부친이 항상 소중히 여기던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낳았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여러 지방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생활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는 점차 철학에 흥미를 갖다가 존재 문제, 특히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을 기대하고 373년경 마니교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타가스테와 카르타고 등지에서 10여 년간 교사 생활을 한 후 383년에 로마(Roma)로 가서 수사학교를 세웠으나, 학생들의 태도 때문에 크게 실망하다가 384년 가을부터 밀라노(Milano)의 수사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신플라톤 철학과 성 암브로시오(Ambrosius, 12월 7일) 주교의 설교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성 암브로시오의 강의를 통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은유적 또는 영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한편으로는 명예, 재산, 결혼 등의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정원을 산책하다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고 반복해서 외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쳐 읽어 본 것이 사도 성 바오로(Paulus)의 로마서 13장 13절의 말씀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그래서 그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의 친구 성 알리피오(Alypius, 8월 15일)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387년 4월 13일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에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지도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와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다가, 391년에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사제로 서품되었고, 5년 후에는 히포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북아프리카의 교구에서 그리스도교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사람으로 거의 35년을 참된 사목자로 헌신했다. 그는 사목자의 권위를 행사하되 백성들의 복리와 행복을 위하여 사용했고,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으며, 엄격한 규율 아래 모든 일을 행했으며, 주일과 축일에는 반드시 강론을 했고, 직접 예비신자 교리를 담당했으며,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의 재정지원을 물색하는 등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주교직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글을 썼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교구 신자들과 도나투스파(Donatism) 이단자들에게도 반박문을 써 보냈다. 특히 마니교(Manichaeism)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를 반박하는 강연회에는 너무 많은 청중이 몰릴 정도였다. 이외에도 삼위일체와 은총론에 관한 책도 썼는데, 그의 연구 대상은 매우 광범위했었다. 그래서 전해오는 저작으로 113종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편지, 500회의 설교 등이 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자신의 개종 과정을 기록한 자서전적 저서인 “고백록”(Confessiones)과 호교론적 저서인 “신국론”(De ciavitate Dei)이다. 그는 자신의 극적인 개종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은총을 절실히 체험했기 때문에 은총론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거듭했다. 그래서 그를 흔히 ‘은총론의 박사’(Doctor Gratiae)라고 부른다. 그는 서방교회의 4대 교부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교회 학자이며 뛰어난 영성가였다. 주교가 된 이후에도 주교관 내에 성직자 수도원을 세워 공동생활을 이어갔을 정도로 수도자로서의 그의 영향 또한 대단하다. 그의 수도 규칙은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성 아우구스티노는 서방 그리스도 교회 지성의 모델로서 가톨릭 신앙 안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 공격하던 430년 76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어떤 성인도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 또한 어떤 큰 죄를 지었던 죄인이라도 미래가 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교회의 오랜 진리를 몸소 보여 준 인물이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오랜 세월 눈물로 하느님께 기도했던 어머니 성녀 모니카의 정성과 영적 스승이었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도움으로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의 증거자가 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대개 연구에 몰두하는 주교의 모습으로 서재에서 책을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15세기 이후에는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를 든 어린아이와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성인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다. 중년의 성 아우구스티노가 심오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몰두하던 중 바닷가를 거닐다가 한 아이가 모래톱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놓고 조개껍데기로 부지런히 바닷물을 퍼 나르는 것을 보았다. 궁금해 묻는 그에게 어린아이는 바닷물을 다 퍼 담을 것이라 했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에 “그럼, 아저씨 작은 머리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어떻게 알아들으려고요?” 하는 말을 남기고 어린아이는 사라졌다고 한다. 17세기 이후에는 불타는 심장을 들고 있거나 화살에 의해 관통된 심장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도 그려지는데, 이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종교적 열정을 표현한 것이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8월 28일 목록에서 그의 생애에 대해, 특히 주교로서 설교와 저술을 통해 오류에 맞서 정통 신앙을 지키고 지혜로써 신자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끈 성 아우구스티노에 대해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