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꽃은 피는 순간보다 질 때 더 깊은 이야기를 남긴다.
담양 명옥헌의 연못가에 섰을 때 나는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연못은 하늘을 담고 있었고, 하늘보다 먼저 수천 장의 꽃잎을 품고 있었다. 배롱나무에서 바람을 따라 내려온 꽃잎들이 수면을 가득 메우며 분홍빛 융단을 펼쳐 놓았다. 그것은 꽃이 떨어진 풍경이 아니라, 꽃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물들이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꽃이 피면 탄성을 터뜨린다. 그러나 꽃이 질 때는 쉽게 지나친다. 아름다움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옥헌의 꽃은 달랐다. 가지를 떠난 꽃잎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보여 주었다.
한 장의 꽃잎이 물 위에 내려앉는다. 이어 또 한 장이 내려오고, 다시 몇 장의 꽃잎이 바람을 따라 흩날린다. 꽃비는 소리도 없이 내린다. 빗방울처럼 세상을 적시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적신다. 수면 위에 번지는 작은 파문은 꽃잎을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기대며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 풍경 앞에서는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말보다 침묵이 더 아름다운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봄이면 마당에 떨어진 꽃잎을 모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곤 했다. 금세 시들어 버릴 것을 알면서도 예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래 바라보았다. 그때는 몰랐다. 아름다운 것은 오래 남아서가 아니라, 짧게 머물기에 더 아름답다는 것을.
세월도 꽃과 닮았다. 젊음은 나무 위에서 피어나는 꽃이라면, 살아온 시간은 연못 위를 떠가는 꽃잎이다. 화려했던 날보다 견디어 낸 날들이 더 깊은 향기를 남긴다. 삶은 피어나는 일보다 내려놓는 법을 배워 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명옥헌의 연못은 떨어진 꽃을 외면하지 않았다. 마지막 꽃잎 하나까지 품어 안으며 더 넓고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사람도 저런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젊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까지도 함께 품어 줄 수 있다면 우리의 세상은 훨씬 따뜻해질 것이다.
바람은 다시 한 번 숲을 스쳐 지나갔다. 꽃비가 또 한 차례 내렸다. 꽃잎은 서두르지 않았다. 떨어지는 순간에도 가볍게 흔들리며 자신이 머물 자리를 알고 있는 듯했다. 연못은 아무 말 없이 그 꽃잎들을 받아 안았고, 하늘은 그 모든 풍경을 푸른 빛으로 감싸 안았다.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꽃이 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꽃이 지는 모습마저 아름답게 기억하는 정원을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분홍빛 꽃비는 마음속에서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 꽃비는 계절이 내리는 비가 아니었다. 살아오며 놓아야 했던 시간들, 그리워해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끝내 품어야 했던 사랑이 조용히 내리는 마음의 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