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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후반 안록산의 난 이후 중국은 전국이 분열되면서 각 지방의호족(豪族)
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이때 중국에서는 선종(禪宗)이라는 새로운 불교가 유입되는데요.
지방 호족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선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차(茶)입니다.
차와 선이 한 가지 맛이라는
차선일미(茶禪一味)는 차와 불교의 관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좌선을 할 때 차를 마시면 정신을 맑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차는 단순히 음료가 아니라 수양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지요. 9세기 이후 중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것이 널리 확산되고요.
차를 마시는 찻잔으로 청자가 각광을 받게 됩니다.
당(唐)대에 이르러서 중국의 청자가 더 성숙해 지는 까닭입니다.
육우(陸羽, 733~804)가 쓴
『다경(茶經)』에는 옥(玉)같은 청자와 은(銀)같은 백자를 언급하면서 다기(茶器)가운데 월주요에서 만든 청자가 최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세기 이후 청자는 찻잔 뿐 아니라 실생활 그릇으로 확산되고요.
절강성 월주지방의 월주요는 오월왕(吳越王)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과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후기신라는 9세기에 6두품과 골품제라는 신분제에 갇히면서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신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당나라 장안으로 험난한 유학길에 오르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최치원과 같은 유학자도 있었고요.
도의와 같은 승려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중국은 선종으로 가득한 세상이었지요.
유학승들은 당연히 중국의 선종을 익히고는 신라로 돌아옵니다.
선종은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지만 신라의 불교는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佛)사상이었습니다.
결국 유학에서 돌아온 선종 승려들은 경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방으로 흩어지는데요.
지방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 호족들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 됩니다. 호족들은 승려의 가르침에 따라 선종을 받아들이고요.
차를 마시게 됩니다.
당연히 중국으로부터 차를 마시기 위한 찻잔도 수입했겠지요.
실제 당나라의 찻잔들이 다량 수입되었다는 것은 경주 안압지와 익산 미륵사 터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828년(흥덕왕 3)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김대렴(金大廉)이 지리산 쌍계사 부근에 차나무를 심어 국산 차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찻잔을 계속 수입만 할 수는 없었을 거고요.
우리도 청자를 직접 만들고자 하는 욕구는 굉장히 강렬했을 겁니다.
마침 고려가 건국하면서 중국은 당(唐)나라가 멸망하고 북송에 의해 통일되기 직전의 오대(五代) 혼란기였는데요.
뛰어난 청자를 만들던 월주요가 속해 있는 오월국(吳越國)이 송나라에 망하면서 고려는 월주요 장인들을 불러들일 수 있었습니다.
10세기 후반, 이제 우리도 청자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만들어진 가마는 개경 일대였습니다.
봉천군 원산리, 시흥 방산동, 용인 서리 등이었지요.
이들은 모두 벽돌가마(塼築窯전축요)로 시작했습니다.
길이 40미터에 폭이 2미터로 중국 가마와 똑같은 형태였고요.
번조에 필요한 도구까지 중국과 같았습니다.
가마와 도구까지 중국과 같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청자기술이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고려인들이 갖고자 했던 찻잔은, 삿갓을 엎어놓은 모양에 굽이 햇무리를 닮은 햇무리굽 완이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8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10세기까지 제작된 것인데요. 우리나라에서 만든 햇무리굽 완은 중국에서 10세기 후반 경에 제작된 것과 매우 유사한 형태입니다.
이 역시 우리나라에서 청자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 10세기 후반임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하겠습니다.
⬇️ 용인서리 진흙가마 터
⬇️ 용인서리 진흙가마의 바닥
⬇️ 용인서리 백자도요지 터에서 나온 자기 편.
굽이 해무리진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최순우선생이 햇무리굽 완으로 불렀습니다.
사적으로 지정된 용인 서리는 10세기와 11세기를 대표하는 가마터입니다. 청자보다 백자를 더 많이 만들었던 곳이라 사적지 이름도 <용인 서리 고려백자 도요지>입니다.
가마터 주변은 퇴적층으로 직경 50 ~ 80미터, 높이가 6미터에 이르는 구릉을 이루고 있는데요.
이 구릉은 자기를 굽다가 실패해서 버린 일종의 폐기장입니다.
1만여 점을 조사한 결과 햇무리굽을 가진 완(찻잔)이 절반이 넘게 나왔습니다.
찻잔을 만들기 위한 고려인들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실패한 그릇들은 가마에서 구울 때 높은 열을 이기지 못해 일그러지거나 내려앉았으며, 유약색은 어두운 회녹색이나 녹갈색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고려청자의 뛰어난 비색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순화 4년'이 새겨진 항아리(순화사년명호淳化四年銘壺)
993년, 국보, 높이 35.2㎝,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35Cm 크기의 항아리인데요. 유약은 흘러내리고 엷은 황갈색을 띠고 있어서 과연 이게 청자일까 싶을 정도로 상태는 좋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항아리 바닥에는 음각된 명문이 있습니다.
순화사년계사태묘제일실향기장최길회조(淳化四年癸巳太墓第一室享器匠崔吉會造)'
여기서 '순화'는 북송의 연호로 '4년(四年) 계사(癸巳)'는 993년을 가리키고요.
'태묘(太墓)'는 고려 시대 왕실의 재실(齋室), '제1실'은 태조 왕건을 모시는 곳 입니다.
'향기(享器)'란 제사용 그릇이고요. '장인(匠人) 최길회(崔吉會)'가 만들었다는 기록입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 제작된 청자 가운데 제작연대, 목적, 용도, 만든 사람이 함께 기록된 것은 이 항아리가 유일하며 이런 이유로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태조 왕건의 제사그릇이라면 아마 최고의 정성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했겠지요.
그러나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는 993년의 청자는 황갈색과 녹황색을 띄고 있고요.
유약의 시유상태도 흘러내리거나 유표면이 바늘에 찔린 듯 빠끔빠끔한 기포가 있어서 고르지 못한 편이었습니다.
초기의 청자제작 수준은 그랬습니다. 상당히 거칠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여기에 만족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