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L팀장이 2주 후에 사임하는데 지금 시기에 후임자 찾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서 당분간 이안씨가 L팀장이 맡던 부서의 일을 좀 맡아줘야겠어요."
설마설마했다. 두 달 전 내부 회의를 통해 L팀장님의 이직 소식을 들었다. 연말도 아니고 이제 막 2분기를 앞둔 시점에서 그만두신다니. 갑작스런 소식에 놀랐고 또 걱정이 됐다. L팀장님과 부서는 다르지만 어쨌든 행정적으로는 L팀장님이 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새로운 팀장님이 오면 또 당분간 적응기간이 필요하겠군'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L팀장님의 사임 2주를 앞둔 시점에 부장님에게 위와 같은 통보 아닌 통보를 받게 된 것.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큰 부서 하나를 맡으면서 동시에 다른 여섯 개 부서를 아우르며 관리해야 하는 팀장 자리를 갑자기 나보고 임시로 맡으라고 하면 어떡하느냔 말이다. 직급상 내가 맡는 게 안 맞는 것도 있지만, 실은 L팀장님이 지난 3년간 담당 부서의 규모를 꽤나 키웠고 능력을 인정받았던 게 큰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부장님의 말에 '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주세요'라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쨌든 다른 팀원들 가운데는 내가 선임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임시로 L팀장의 일을 맡아야 한다면 내가 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부정, 분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책 <인생수업>에서 사람들이 ‘죽음’ 같은 큰 슬픔이나 어려움을 마주하는 첫 반응이 부정(denial)과 분노(anger)라고 말한 바 있다. L팀장의 빈자리를 메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거의 일주일 동안 이 상황을 부정했고 또 분노했다. '왜 하필 내가 이 짐을 떠안아야 하는 거야.' '지금 시스템에서 이게 최선인가? 왜 하필 나야?' 이직을 결정하기까지 마음고생이 나름대로 심하셨겠다며 L팀장님을 위로하던 심정도 온데간데 사라졌다. 대신 팀장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일었다. ‘왜 하필 그만둬도 이 시기에 그만두셔서, 연말까지만 조금 더 참다가 그만두시지. 왜! 왜! 왜!’
하지만 이 막막하고 답답하고 무겁게 짓눌리는 마음을 더 가중시켰던 건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기껏 내가 마주한 어려운 상황을 털어놓으니, “아니, 그럼 못 하겠다고 해. 지금 맡은 부서 일도 힘들어서 가까스로 하고 있잖아.” 이런 말들이 되돌아왔다. '안 할 수 있는 상황이면 벌써 안 했지. 못 하겠다고 해서 피할 수 있으면 벌써 피할 수 있었지. 지금 상황 자체가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더욱 외로워졌고 화가 치밀었다.
이 답답함, 막막함의 감정들을 어디엔가는 풀어놔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모닝페이지 노트를 열어 휘갈겨 썼다. 불평과 원망, 분노, 짜증, 걱정, 염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 등등을 가감 없이 적어 내려갔다. “모닝 페이지는 창조성 회복의 실마리가 되는 도구이다. 화가 나거나 우습거나 사소한 모든 내용들이 당신과 당신의 창조성 사이에 있다”(47p) <아티스트 웨이>
이때 쓴 모닝페이지는 창조성이고 뭐고 일단 숨통을 틔우고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도망가 버리고 싶다’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 ‘잘 되던 부서를 맡아 더 부담이다.’ ‘일을 더 맡는다고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이제 거의 매일 야근인가.’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 됐다.
계속해서 이렇게 속풀이식으로 노트에 쓰는데 비슷한 내용이 반복이 되니 그 와중에 살짝 지루해는게 아닌가. 그래서 같은 내용만 쓸게 아니라 방향을 좀 바꿔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지금 계속 걱정되고, 부담되고, 염려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뭐가 구체적으로 걱정이 되는 건가. 내가 두려워하는 게 뭐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적어보니 내가 마주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들이 한 대여섯 가지로 정리가 됐다. 눈에 보이게 정리가 되니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함과 막막함이 사라지고 걱정과 두려움의 크기가 내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될 정도로 줄어듦을 느꼈다. 물론 두려움과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개같이 막연하고 모호하고 끝이 없어 보이는 불안을 글로 덧입혀 놓으니 경계선이 생겼고 응시할 수 있게 됐다. '아, 이게 두려웠던 거구나. 이게 걱정이 됐던 거구나.' 하면서 말이다.
“글쓰기의 네 번째 치유 기능은 바로 거리 두기이다. 참 희한하게도, 직면하게 되면 오히려 담대해진다. 피하고 외면할 때는 한 없이 두려웠는데, 돌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똑바로 쳐다보면 오히려 견딜 만 해지는 것이다.” (56p) <치유하는 글쓰기>
L팀장은 떠났다. 그 빈자리를 남은 한 해 내가 메워야 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닝페이지로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풀어냄으로 일단 숨통은 트였고, 뭐가 막막하고 걱정되고 불안한지 글로 적어보니 고통에서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응시할 수 있는 힘은 얻었다. 그렇다. 일단 꺼내 놓아야 직면할 수 있고, 직면하며 견뎌낼 때 살길도 보이는 법이다.
“나는 받아들였다. 이것은 내가 가야 할 길의 일부, 내 여행의 일부라고, 더 이상 고통과 싸우지 않고, 그것이 왔다가 가는 것을 다만 응시할 뿐이다.”(54p) <치유하는 글쓰기> 이렇게 직면하고 응시하다 보면 어느새 이 상황도 지나가 있겠지. 그것(고통)이 왔다가 가는 것을 홀가분하게 바라볼 날이 분명 언젠가는 오겠지. 그날까지, 투명 망토 같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고 축소시키기 위해 계속 나는 쓰고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