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103]구경재久敬齋와 우정론友情論 단상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에 ‘자왈子曰 안평중晏平仲(은) 선여인교善與人交(로다) 구이경지久而敬之(온여)’라는 구절이 나온다. ‘로다’와 ‘온여’는 현토懸吐이다. 안평중은 제나라 대부이다. 여러 사람을 사귀기 좋아한다(善)는 뜻의 ‘善與人交’라는 말도 좋지만, (사귐이) 오래된 친구를 처음 만난 때처럼 존중하고 공경한다는 뜻의 ‘久而敬之’라는 구절은 더 좋았다. 하여, 50여년만에 고향집 사랑방을 복원하면서 당호를 ‘구경재久敬齋’로 한 까닭은, 멍석을 깔아놓았으니 여러 친구들이 많이 오기를 바라는 뜻이기도 하고, 무릇 세상사람들이 가벼이 사귀고 쉽게 (관계를) 끊는 세태世態을 빗대어 친한 친구라면 더욱더 ‘예절’을 지키며 서로 존중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붕우유신朋友有信이 바로 이것일 것. 자칫하면 친하다고 서로 예의를 잃기도 하고 우정을 빌미로 사기 등 악용하는 경박한 풍토를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지 않았던가. ‘포도주와 우정은 오래될수록 좋다Old wine and friends improve with age’는 서양 속담에서도 우리는 그 의미를 성찰할 수 있겠다. 이 구절은 나로서도 많은 친구를 잘 사귀면서도 이런 초심初心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온 터인지라, 진즉부터 마음에 서재의 당호로 점찍어놓은 것이었다.
우정友情의 역사는 인류의 탄생과 같이 하지 않았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아무리 잘났다해도 혼자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인간은 누구였을까. 꾀(깨)복쟁이 친구(불알친구)는 한 동네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같이 놀며 자란 친구를 일컫는데, 예를 들면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똑같이 붙어다닌 친구들도 제법 많다. 복 받은 친구들이다. 죽을 때까지 그 우정이 지속된다면 ‘반세기 우정’을 넘어 요즘같은 백세시대엔 ‘70년 우정’도 될 것이다. 수십 년 전 언론사 중역이 고위직 관료친구를 기리는 칼럼에서 "사나이가 한번 사귀었다하면 70년은 되어야 친구지"라며 죽음의 이별을 슬퍼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변치 않는 우정’은 미덕 중의 미덕이다. 우여곡절 살면서 변치 않는 우정이 쉬울 것인가. 우정을 상징하는 많은 사자성어 중 대표적인 것이 관포지교管鮑之交일 것이나, 문경지교刎頸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붕우유신 등도 있다. 이만치 살아오면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로 잃기도,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돈문제로 의義가 상해 하루아침에 '웬수'가 되기도 한 애증愛憎의 경험들을 최소한 한두 건씩은 겪었으리라.
나와 나의 친구들을 생각해본다. 6학년쯤 되니 ‘먼저 간’ 친구들도 제법 된다. 너무 안타깝고 그립다. 우정이 깨지면 안되는 청소년 시절의 친구와는 왜 깨졌더라? 언제부터 소식이 끊겼더라? 다시 우정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그 친구는 하필이면 왜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보증을 서달라고 했을까? 한 여인을 가운데 두고 웬수가 된 친구도 있다. 살아가면서 얼굴을 부딪칠 때도 많았는데 얼마나 꺼끄러웠을까? 종교가 달라서? 생활환경이 달라져서? 잘 살면 얼마나 잘 산다고 돈이 많고 적어서? 출세하고 박사가 다인가, 가방끈이 길고 짧아서? 어쩐지 부담이 가서(만나면 부담이 없어야 친구다)? 만나도 공통된 얘깃거리가 '1'도 없어서? 그렇다. 핑계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저런 ‘경우의 수’의 친구들이 있다. 생각하면 속상한 일이지만, 이것도 ‘또 하나의 삶’일 터. 어떤 친구는 친구 명단(적어놓은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으로)에서 그 친구의 이름을 지운지 오래이다. 또 어떤 ‘오랜 친구’와는 최근 어쩌다 서먹서먹해졌을까? 너무 친해서 서로 함부로 하다가? 서로의 속을 너무 잘 알아서? 성격과 취향(취미)가 달라서? 언제부터인가 서로의 말이 겉돌기 시작했다.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고 왠지 말에 별로 달갑지 않은 뼈가 들어간 것같다. 틱틱, 깐죽거린다. 예전 같으면 톡 깨놓고 말을 했으련만, 상대가 상처받을까 상당히 조심스러워 솔직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벼가 익어갈수록 고개를 숙이듯, 조금은 자존심을 죽이고, 겸손하게 친구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쪽으로 노력했으면 좋았을텐데. 나이가 들수록 친구밖에 없다는데 말이다. 그게 잘 안된다. 늙을수록 아집我執과 독선獨善만 는다더니, 내가 그러지 않은가 반성해본다. 확실히 그런 점이 있다. 마음에 수양修養을 더 해야 하리라. 3천배를 해볼까 보다?
하지만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는 속담처럼, 급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친구를 급난지붕急難之朋이라고 하지 않던가. 반대로 아름다운 우정의 사례는 쌔고 쌨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반성하고, 그들과 그들의 우정이 부럽다. 우정론友情論이라고 뭐 거창할 변설을 늘어놓을 이유나 필요는 하나도 없다. 그냥 '친구'라고 하면 된다. 유행가에도 ‘친구’를 주제로 읊은 게 수두룩하다. 한 세상 살면서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터. 그만큼 친구는 우리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삶에 있어서 필요충분조건이다. 삶의 비타민이자 윤활유가 그것이다. 삶이 윤택해(기름져)진다. 예기를 나눌 친구가 마땅히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친구들을 하나둘 떠나보내거나, 자신의 잘못으로 잃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슬픈 일이다. 무엇이 옳네 그르네, 지지고 볶고 무엇을 따질 것인가? 어느 친구는 오로지 “우리는 친구”라는 말만 나오면 다투다가도 금세 깨깽한다. 좋은 습관이다.
이성친구나 반려자인 이성과의 사랑과 또다른 감정이 곧 우정이다. 우정은 서로 노력하며 가꾸어야 할 덕목이다.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interactive이다. 손바닥 하나로 박수소리가 나던가. <구경재> 편액을 바라보며, 현관문을 열고 컴퓨터방에 들어가면서 ‘오래된 우정’을 시도때도 없이 생각한다. 우리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용서하자. 살면 뭐 얼마나 산다고? 앞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은 딱 앞으로 10년이 아닌가. “인생 뭐 있나?”라고 술잔을 높이 들면 “우정이지!”라며 건배사도 날리자. 물음표?에 느낌표!로 답하자. 궁금하면 종종 안부전화도 하고, 손편지는 아니지만 카톡 문자도 날리자. 그렇게 이 풍진 세상, 어우렁더우렁 살자. 친구야. 잘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