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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방생♥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가는대로
현대불교신문사가 한마음선원을 세우신 대행스님과 대화 나눈 글이 너무나 마음에 와닿아서
제가 편집해서 올립니다.
멀리 떨어져 있고 한번밖에 뵙적은 없지만 제가 항상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는 분입니다.
길지만 한번 읽어보시고 읽기 불편하신분은 파일을 올리니 출력해서 한번 읽어보세요.
파일에는 줄띄우기 등 보기 좋게 되어있습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수행의 과정은 어떠한가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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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3번 법문일:.. 주인공은 일체의 근본 페이지: 1/3 (한마음선원홈페이지 http://www.hanmaum.org/startpage 에서 법공양에 들어가서 현대불교신문 법공양 3,4,5번글입니다.)
큰스님과의 대화 1
이번 호부터는 큰스님을 모시고 불법의 요체와 수행법의 의미적 근거를 차근차근히 여쭈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수행해 오시면서 여러 가지로 궁금했던 의문들이 해소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이렇게 귀한 시간을 배려해 주신 큰스님께 감사 드립니다. 먼저 우리는 왜 불법을 배우고 닦지 않으면 안 되는지, 불법을 배우고 닦아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불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인지를 모르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왜 살아가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지요.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인생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고, 인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해 줍니다. 즉 불법은 우리의 인생에 목표(방향)를 밝혀 주고 길(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 그렇다면 불법에 비추어 불 때 인생은 무엇이며,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누구나 아는 것처럼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때는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은 부자유하고 그나마도 결국은 죽음이라는, 아무도 원치 않는 완전한 무(無)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 인생이란 길어야 백 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때의 영화도 인생이 끝나는 때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서 자신에게 닥쳐오는 막막한 허무감에 대해서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럴 때 인간은 누구나 다 고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 처자, 친지, 지인(知人)들도 자기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란 오직 자기 혼자서 감당해야만 할 짐입니다. 그런데 죽음만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죽음으로 대표되는, 삶에 있어서의 온갖 고통과 번뇌도 깊이 생각해 보면 누구든 자기 혼자서 그것을 견디거나 극복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나의 이웃이나 벗들, 가족들이 나의 고통과 번뇌를 덜어 주기도 하고 함께 나누기도 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짐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산다는 것을 고(苦)라고 하셨습니다. 고란 사실 우리가 가장 즐겁고 기뻐할 그때에도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수많은 현인들이 깊이 느껴온 인생의 밑바탕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그것 때문에 많은 생각을 했고,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남긴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생의 그런 실제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제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접 성취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취된 삶은 고가 아니라 완전한 자유이고, 영원한 즐거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고이며, 인생의 목표는 그 고로부터 벗어나 부처를 이루어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그렇다면 인생이란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되는 것이 아니요,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아 나가야만 한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따라서 세계는 거대한 도량이요, 개개 인생들은 그 도량에서 자기를 향상, 정화시켜 나가는 수도자여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수행에 있어서 어떤 것을 요체로 하느냐 하는 점이 되겠습니다. 삶이 곧 수행이어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삶을 되돌아 보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사람이라면 대개 다 수긍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수행의 구체적 방법론에 이르고 보면 수많은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저마다 견해가 흩어지고 마는 것 같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수행 지도를 하심에 있어서 어떤 방법을 요체로 하여 가르치십니까?
"삼계가 다 부처의 나툼 아님이 없으니 부처, 중생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이 비록 그러할지라도 실제 벌어진 양상에서는 깨달은 분이 있고, 미혹한 중생이 있습니다. 수행 방법은 이중에서 후자에 관한 것이니,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 주는 것입니다. 나는 일체 경계를 주인공(참나) 자리에 되돌려 몰록 놓으라는 것으로 수행법의 요체를 삼습니다."
- 조금 더 자세하게 일러 주십시오.
"일체 경계를 주인공 자리에 되돌려 몰록 놓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는 데서 생깁니다. 올바른 믿음은 수행의 큰 근본이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바르게 세우는 것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금방 말씀 드린 것처럼 믿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믿음이 중요하니 믿어라, 믿어라 한다고 해서 믿는 사람도 드물고, 또 믿게 되어지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고구정녕한 설명이 따르게 됩니다.
먼저 나를 잘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란 무엇이냐?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확연하게 풀릴 것 같으면 불법의 참 맛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야 그냥 나지 무어겠느냐 싶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나는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이 문젭니다. 부모에게서 왔다구요? 그건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받았다는 뜻이지, 그런 생물학적인 나 말고 나 그 자체는 어디서 왔을까요? 뒤집어서, 부부 사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부부는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전혀 모릅니다. 태어날 아기의 성격, 심성을 짐작도 하지 못합니다. 즉 그것은 부모의 생각대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니,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목수에 의해서 집이 지어지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목수는 자기 마음대로 집을 설계하여 짓지만 인간은 자기의 자손을 그렇게 마음 먹은 대로 낳지 못합니다. 이 말은 뒤집어서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어떤 범상치 않은 무엇과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삶의 비밀 하나를 짐작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결국은 수많은 의문들을 불러오게 되고, 그 끝에서 우리는 불법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나입니다. 이 나는 항상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편안치를 못합니다. 바로 이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계가 고 라고 말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나 말고 또 하나의 나가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말씀 드리게 되면, 그 또 하나의 나가 아주 '또 하나의'나인 줄 알게 될지도 모르니 '참나(眞我)'라고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생멸하는 중생심으로서의 나는 '거짓나'이며, 따로이 나의 참된 면모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나를 찾아라, 나를 찾아라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의 나란 말할 것도 없이 참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나는 거짓나와 떨어져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짓나의 근본 그 자체가 참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중생심 · 번뇌심 · 삼독심을 '끊고'참나를 얻는다기보다, 그것들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참나로 되바꾼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참나를 진정으로 찾아서 실현하게 되면 그때에는 중생으로서의 거짓나 또한 참나의 한 모습임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 바로 그 점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른 종교 창시자들과 구분 짓게 하는 부분 중의 하나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두 문(門)이 있지만 들어가 보면 그 두 문이 결국은 하나라는 것, 그것은 끝끝내 두 문을 고집하는 어떤 종교보다도 더 심원한 뜻이 있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인생을 그냥 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수행자로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수행자로서의 삶이란 괴롭고 부자유한 거짓나를 여의고 참나를 찾아서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아니, 거짓 나를 여읜다기 보다는 거짓 나를 참나로 되바꾼다고나 해야 할까요, 어쨌든 수행자는 그와 같은 목표를 갖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거짓나와 참나의 관계를 좀더 세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역시 둘로 구별해서 혹은 이렇고, 백은 저렇다고 해야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 필경에는 공(空)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입장에서는 일단 분별해서 일러 주시는 것이 저희들에게 도움이 될 듯합니다.
"예로부터 참나를 일컫는 여러 이름이 있었습니다. 불성이다, 진여(眞如)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등등입니다. 나는 그 중에서 주인공이라는 용어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는 선가(禪家)에서 쓰여졌던 용어지요. 왜 주인공이냐? 나의 참 주인이니까 주인공이요, 또 텅 비었기 때문에 주인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두 가지 면에서 나누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나의 주인이라는 측면입니다. 나의 주인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그를 근거로 해서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지요? '부모로부터 몸을 받기 이전에 나는 무엇이었느냐? 인간이(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다만 정자와 난자의 결합만은 아니다. '바로 그겁니다. 내가 있게 된 것은 주인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있는 것은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나무의 뿌리는 땅 위에서는 보이지 않고, 줄기·가지·잎·꽃·열매 등만 보입니다. 그걸 보통 나무라고 부르지요. 그러나 땅 밑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그 뿌리는 땅을 헤집어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는 줄기·가지·잎·꽃·열매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가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해 봅시다. ①나무는 줄기·가지·잎·꽃·열매이다. ②나무는 뿌리이다. 그러면 ①과 ②중 어느 곳에 ○표를 하시렵니까?"
- (생각한 뒤에) 먼저 ②에다 ○표를 하고 나서, ①과 ② 모두에다 다시 ○ 표를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대답입니다."
- 왜냐하면 나무의 근본은 줄기 가지 등이라기보다는 구태여 택일을 하라 한다면 뿌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줄기·가지 등을 잘라내어도 뿌리가 있다면 나무는 다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뿌리가 없다면 줄기·가지 따위는 곧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다시 ①과 ②에 모두 ○ 표를 한 것은 나무는 뿌리 뿐만이 아니라 줄기·가지들을 모두 갖추었을 때 참으로 완전한 나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 대답을 주인공과, 중생으로서의 나에 맞추어 봅시다. 먼저 뿌리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주인공은 우리의 근거가 됩니다. 주인공이 없이는 우리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땅 속에 묻힌 뿌리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인공은 우리의 지각에는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고서 우리는 그 나무에 근거(뿌리)가 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내가 있다는 이것이 바로 주인공이 있다는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있으니까 그냥 있다 싶겠지만 우리는 인연 없이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 그거니까 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곧바로 주인공을 증명하는 것이로군요.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주인공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왜 공(空)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보통 선가에서 주인공이라 할 때에는 '빌 공(空)'자를 쓰지 않고 주인공(主人公)이라 하거든요.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공(公)'을 '공(空)'으로 대치하셨습니다. 그 조어적(造語的) 측면의 타당성은 국어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주인공은 왜 공 하다는 뜻을 지녀야만 하는지를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인공이 나의 근거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나 혼자만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주인이요, 삼계의 주인입니다."
- 그렇다면 주인공(主人公)도 그다지 틀린 표현은 아니겠습니다. 공공(公共)이라는 말이 있으니까요. 사(私)가 아니라 공(公)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해 봅시다. 나무의 근거는 뿌리입니다. 그런데 그 뿌리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땅이지요. 그렇다면 땅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허공입니다. 그렇다면 허공의 근거는 무엇이지요?"
- (침묵)
"주인공은 마치 허공과도 같습니다. 결코 무너지는 일도 없고, 움직이는 법도 없으면서 삼계의 모든 것을 나투고 육성하고 되돌려 거두어 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주인공에 사(私)가 있겠습니까?"
- 그렇다면 그 주인공을 꼭 안에서만 찾아야 할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광대한 것이라면 오히려 허공에 대고 찾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광대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그 신령함이 내 안에 남김없이 깃들어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의 사의(思議)를 초월한 묘법입니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크다 하면 삼라대천세계에 다 차고도 남고, 작다 하면 티끌보다도 작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거대한 주인공의 품에 싸여 있고, 내 안의 작은 불씨(주인공) 하나는 거꾸로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참으로 오묘한 이치입니다 ! 그렇다면 주인공은 곧 부처입니까?
"그렇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주인공을 우리는 증득해야 하겠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너와 나라는 주객(主客)의 대립을 초월하고, 개체자로서의 고독과 번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다. 아니, 벗어난다기보다 이 거대한 세계 자체가 불법이요 불신(佛身)이니, 우리는 불법·불신 그 자체가 됨으로써 번뇌를 떠나지 않고도 번뇌가 번뇌 아닌 경지를 볼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수행자들은 우리의 근거(주인공)가 그처럼 '누구만의 것도 아니면서, 또한 나의 것(公)'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배타적으로 나의 것(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나(私)가 아닙니다. 나란 말은 곧 전체(公=空)라는 뜻입니다."
- 감사합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까 세계에 대한 이해가 드높아져서 마치 해탈해버릴 듯한 기분마저 듭니다. 그러나 독자들을 위해서 계속 세밀한 말씀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한 것을 먼저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금방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인공은 우리들의 근거이며 나무로 치면 뿌리와 같습니다. 즉 최초의 원인자지요. 그리고 그 주인공은 삼계 모두의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부증불감(不增不感)하며, 불구부정(不垢不淨)하지요. 주인공은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 모든 것을 떠나 있고, 우리의 시작이자 끝이며, 우리의 원인이자 결과요,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그를 떠날 수 없고 그와 함께 있으며, 그가 곧 나요, 내가 곧 그인 영원이요 무한입니다. 그런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더 나아가 개체와 개체 사이)의 갈등이란 사실 우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나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니까요. 주인공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것들은 다 형제요, 자매입니다. 아니, 그대로 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큰스님께서도 언제나 상대를 둘로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주인공에 대해서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 그 중에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이도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대응하느냐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또 사회윤리적으로나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가 바로 나라고 해도 그의 피해자가 될 수는 없는 게 아닙니까? 나아가 그런 악덕을 이 세상에서 몰아내는 것이 사회적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세상에서는 정의라고 하고, 그 정의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사실 그런 사회적 정의나 용기에 의해서 세상은 많이 개선되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의 원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대를 나 자신으로 봄으로써, 내게 닥쳐오는 것이 설사 악덕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악덕으로 상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지고(至高)한 아름다움과 숭고한 종교적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아직은 에고(ego)를 가지고 있는 중생으로서, 또 인지되어지지 않는 위대한 하나(주인공)보다는 우선 눈에 보이는 정의가 더 급한 것이 대다수 인간들의 삶입니다. 이 문제는 참으로 미묘하고도 심각한 문제여서 저도 일도양단의 해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만, 이에 대한 큰스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또한 나와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으로 굴려서 돌려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그냥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법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 큰스님의 진정을 헤아릴 때마다 저는 큰 감명을 받곤 합니다만, 지금도 저는 가슴이 찡한 느낌을 갖습니다. 지금의 큰스님 말씀이 글자로 바뀌어 전달될 때에는 큰스님께서 지금 보여 주신 그 간곡하심과 철저한 확신은 다 증발해 버리겠지요. 보통의 글에는 의미 전달만 있지, 그 뜨거운 분위기나 뉘앙스가 남지 않기에 말입니다. 큰스님과의 사사로운 접견에서 저는 큰스님의 지극 간절하신 진수를 보고 가슴이 메어지는 감동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만, 이런 기회가 보다 많은 불자들에게 제공되고 있지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의 일치된 가르침은 모든 것을 사랑과 자비로 되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기준에서 후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당신들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도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것은 그분들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기준(尺度)이지요. 그러나 중생들은 여러 가지 기회주의적인 기준을 갖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떠돌게 되고, 따라서 삶이 고통이 되곤 하지요. 그런데 큰스님께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모든 경계를 둘로 보지 말라, 그 모든 경계를 당신의 주인공 자리에 되돌려 놓아라, 그리고 묵묵하게 하루살이로 살아가라 (순간 순간 처함에 최선을 다 해 집중하라),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을 큰스님께 여쭈어도 그 결론은 언제나 참된 마음, 간절한 자비심, 주인공을 향한 철저한 일심, 삼계를 하나로 보시는 확연한 삶의 시현(示顯)으로 귀일하십니다. 이런 큰스님의 면모에 대해서 저는 내내 감탄해 오고 있습니다. 사실을 말씀 드리면 어떤 때는 그런 철저한 귀일(歸一)이 다양성의 결여로 느껴지는 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그런 철저하심에서 역시 중생과는 다른 확연한 세계가 큰스님의 내면에 성취되어 있음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움과 자유자재 하심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일미(一味)가 큰스님께서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당체가 그러하고, 그 당체를 보아 버리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여기에 사과하나가 있다고 할 때 수천의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여기에는 사과가 없다는 주장을 가지고 천만가지의 의논과 자료로써 그들의 말을 증명하며 나를 설득하려 한다 해도 나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한 번 진리의 당체를 체현하신 분들은 중생이 거짓된 견해에 사로잡혀 떠돌 때에도 언제나 일여(一如)하실 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러함'을 직접 보고 알아버리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분들은 수천만 명의 중생들이 뒤바뀐 인생관을 고집하더라도 결코 그에 끌려가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의연한 삶을 지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의 증험자는 천만 권의 경전을 능가하는 바 힘이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그런 증험자로 해서 경전은 하나의 가설(假說)일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벗고 글자 그대로 진리임을 증명 받게 되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큰스님께는 그러한 면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일면 그렇게 큰스님께 감탄하면서도 저는 사실 아직까지도 큰스님이 '누구'라고 단정짓지 못합니다. 지금도 '큰스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지만 어떤 내용을 지녀야 큰스님이며, 큰스님이라는 호칭이 적당한지도 잘 모릅니다. 큰스님께서는 하도 여러 면모를 보여 주시기 때문에 이런 분이거니 싶다가도 그 생각이 바뀌게 되고, 금방 감탄했다가도 다시 회의하게 되고, 그랬다가는 다시 더 큰 경탄을 하게도 됩니다.
"(웃음) 그게 아마 참말일 겁니다. 나만 그런가요? 우리가 사실 누구를 '진정으로'알 수 있겠어요? 그렇게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이지요."
- 제가 너무 많이 이야기 드린 것 같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이 기회에 궁금했던 많은 의문들을 어느 정도라고 풀어보고 싶으니까요. 사실 큰스님의 일방적인 설법은 항상 일미(一味) 그것이어서, 저같이 사량 분별이 많은 (저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 사람은 어떤 경우 이론정연함이 요구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쭙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일체 것을 나와 다른 것으로 보지 말라, 즉 둘로 보지 말라고 하시는데, 엄연히 둘이잖습니까? 그런데 왜 둘이 아니라고 하시는지요 ?
"둘이 아닙니다."
- 세상에는 부처님이나 선지식들의 불이법(不二法) 말씀을 함부로 쓰는 사람도 많습니다. '둘이 아니잖습니까?'하는 말을 함부로 쓸 때가 있는데, 그때 저는 묻습니다. '그럼 내가 뺨을 맞을 때 당신이 아픕니까?'이에 대해서 큰스님께서는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아프지요. 둘이 아니니까요."
- 그렇다면, 세상에는 많은 중생이 고통 받고 있으니 만치 큰스님께서는 항상 아프시겠군요.
"그래서 중생이 아프기에 내가 아프다고 유마(維摩)거사도 말했다지 않습니까? 그러나 항상 아픈 것만도 아닙니다."
- 무슨 뜻인지요?
"아픈 중에도 아프지 않으니 고요한 때문이며, 아프지 않으면서도 아픈 눈물이 항상 흐르는 것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밑바탕은 깊이 고요하고 묵묵하면서도 하나하나의 일에 응해서는 때론 눈물도 흐르고, 때론 기쁜 웃음도 짓습니다. 이야말로 중도인 것입니다."
- 인도의 성자 라마 크리슈나라는 분은 그 불이(不二)를 직접 보이신 예가 있었다 합니다. 그분이 자기 사원에서 갠지스 강을 내려다 보고 잇을 때, 강에서는 뱃사공 두 사람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노를 들어 상대방의 등짝을 내리쳤는데, 그걸 무심히 보고 있던 라마 크리슈나는 그대로 엎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등에는 노를 얻어맞은 상처 자국이 뚜렷이 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상흔(傷痕)이 몸에 나타나기도 하는 카톨릭의 성자들 또한 예수와 깊이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되기도 하겠습니다. 그와 같이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이 가지는 힘은 위대한 기적을 낳곤 합니다. 큰스님께서도 그런 이적이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누누한 말씀은 생략) 한마음이 되기 때문에, 예컨대 현대 의학이 포기하는 난치병이 낫기도 하는 것입니다."
- 마음의 힘에 의한 치병(治病)이 갖는 여러 가지 의미와 또 거기에 따른 교리상의 의문, 용(用)의 효용과 한계의 문제, 그것의 대승적 면모 등은 차후에 여쭙기로 하겠습니다. 다시 본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엄연히 둘인데 둘이 아니라는 말씀은 어느 편인지요? ① 사실은 둘인데 둘이 아니라고 가르쳐야 할 무슨 까닭이 있어서이다. ② 실제가 둘이 아닌데 중생이 그걸 모르고 잘못 알 뿐이다.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 그에 대해서 저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아까의 나무의 비유로 되돌아 가 봅시다. 조금 전에 든 나무의 비유는 개인을 나무에 비했는데, 이번에는 이 세계 전체를 한 그루 나무라고 생각해 봅시다. 세계는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입니다. 그 근본은 뿌리, 즉 주인공이요, 부처의 당체이지요. 그 뿌리로부터 수많은 가지와 잎들이 나타났으니, 이 현상계입니다.
물론 이렇게 둘로 나누는 설명은 말을 빌리고 개념을 설정하니까 그럴 뿐이지 기실은 하나로 '곧바로 알아야만'합니다. 궁극에 가서는 그 또한 뿌리와 잎이 따로따로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 비유 각각에서 예컨대 잎은 각각의 생명체들입니다. 그래서 세계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비유해서 봅시다. 여기에 잎 하나가 있는데 어떻게 해서 옆에 있는 잎과 서로 부딪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그 두 잎은 서로 자기를 해친다는 생각에서 다투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잎은 개개 중생들입니다. 이런 모습이 중생들의 삶의 양태입니다.
그런데 그 두 잎의 공통적인 근거는 말할 것도 없이 둘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의 두 팔이 서로 싸운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외팔도 오른팔도 다 나입니다. 그런데 서로 싸운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이 서로 이해를 다투는 것은 그 '하나'를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싸우고 괴로워합니다. 그 근본은 아상(我相)이며, 집착입니다. 그리고 무명(無明)입니다."
- 그러니까 잎들이 자기의 근본인 잎꼭지 쪽을 향해 생각을 돌려서 마침내 뿌리에 이르고 보면 서로 다툴 일이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삶이 고통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잎은 그렇게 안으로(뿌리를 향해, 하나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을 돌이키지 않고, 밖으로 (부딪쳐 오는 잎(경계)을 행해, 둘로 보고, 물질(현상)적으로) 사량심을 뻗쳐 나갑니다. 안으로 돌이키면 결국 하나로 돌아가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며, 밖으로 둘로 보면 번뇌를 키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둘'이란 둘 이상의 모든 숫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
- 알겠습니다. 왜 우리가 안으로 경계를 되돌려 놓아야 하는지를 알겠습니다. 그것은 그 경계가 근본적으로는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해탈 - 즉 삼계와 위대한 하나됨을 체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막는 것은 너와 나는 서로 다르다는 것에 집착하여 '큰 하나'를 생각 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이 우선은 자기의 좁다란 이익을 지켜 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이익, 즉 위대한 부처님의 세계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막는 악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어떤 경계를 둘로 보지 말고 무겁고 진실하게 자기 근본 자리에 그것을 되돌려 놓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음 호에 계속)
회보4번 법문일:.. 수행의 과정 페이지: 1/3
큰스님과의 대화 2
(전호에서 계속)
- 그렇다면 이제 불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느 정도 이야기된 것 같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우리는 당연히 불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불법이란 거짓 나를 여의고 참나, 즉 주인공을 찾아 밝히는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졌습니다. 또한 그 주인공이란 나만의 근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통적 근거라는 것도 이야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인공의 차원은 영원한 세계라는 것, 우리는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불자라는 것, 그렇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체 경계를 나로 보고 되돌려 주인공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 큰스님께서 가르쳐 주신 수행법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수행입니다. 그러나 수행의 길을 멀고 먼 것입니다. 그렇게 멀다 보니 가는 도중에 많은 경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중도에서 어긋나는 수행자가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행의 과정에 대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쳐오지도 않은 것을 두고 미리 이야기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미리 알아 두게 되면 곧은 길을 두고도 되돌아가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지 않겠느냐 싶은 것입니다. 먼저 수행의 과보로부터 여쭙겠습니다. 그렇게 일체 경계를 주인공 자리에 놓아 나감으로써 수행법을 삼아 그 결과에 도달하게 되면 어떤 과보가 성취되는지요?
"자유인이 되지요. '
- 자유인이란 어떤 상태입니까?
"중생이 보고 살아가는 이 유위법 세계와, 중생에게는 보이지 않는 더 높은 차원의 세계를 단절시켜 놓고 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고를 당하는 것이 중생이라면 그는 그런 고로부터 벗어난 사람이지요.
그렇게 높은 차원을 '볼'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능력도 그에게는 있습니다. 물론 이때의 '한다'는 뜻은 중생들이 무엇을 한다는 뜻과는 다릅니다만, 아무튼 찰나찰나 부딪쳐 오는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어 주면서 세상을 제도해 나가게 됩니다. 여여한 거지요.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것이 그의 삶입니다.
- 그 차원의 세계는 일상적인 것과는 너무도 다를 터이므로, 일상적인 언어로서는 표현하기가 불가능 하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겠지요. 그렇지만 일상적인 언어로나마 주의 깊게 사용하고, 진지하게 듣다 보면 그 어떤 실마리가 잡힐지도 모릅니다. 그런 성의를 가지고 여쭈어 나가도록 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중생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사실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나'는 있기도 합니다. 조금 전에 큰스님께서는 주인공을 이야기하셨는데, 주인공은 참나이니까 결국 '나'인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중생이 생각하는 '나'는 없다 하더라도 '참나'는 있는 것이 됩니다. 결국 참나와 거짓나의 차이겠는데요, 그렇게 참나를 찾아 실현한 분들의 '나'라는 관념은 어떤 것인지요?
"'나'라는 관념이 없습니다."
- 그러나 그런 분들도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라는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중생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생과는 다른 의미의 질서가 있습니다."
- 그 점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놓아 나가는 수행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 될 때가 옵니다. 그래서 어떤 경계에 부닥쳐도 곧 주인공! 하고 되돌리게 되지요. 그게 더 계속되다 보면 이제는 구태여 주인공! 하지 않아도 마음의 바탕 자체가 크게 쉬어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소소영령하게 매사에 응하면서도, 마음의 근본은 푹 쉬어 있어 편안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살아나감에 있어서는 정확하면서도 마음은 편안한 그 다음에야 근본 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에는 벌써 내 것 네 것 하는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 구별이 생긴 다음에 그것을 되돌려 놓는 것은 최초 수행자의 과정이고, 나중에는 아예 그것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무슨 '나'가 있겠습니까?"
- 그러니까 중심점이 없는 커다란 회전 같은 것이로군요 ! 원으로 치자면 중생의 '나'라는 것은 중심점 같은 것인데, 그것이 없어져 버린 원 아닌 원-그래서 오히려 자유로운 그런 상태로군요!
"그러나 공부가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 …….
"나는 이 공부를 세 단계로 나누어서 말씀드려 오고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중생으로서의 나를 되돌려 주인공 자리에 놓음으로써 나를 알게 되는 데까지입니다. 이때 수행자는 한 번 죽는 것이고 (거짓나의 관념이), 동시에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참나로서). 이에 대해서는 금방 말씀 드린대로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렇게 참자기를 안 입장에서 다시 닦아 나가게 됩니다. 비록 자기의 참모습을 알았다고 해도 단지 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이제 번뇌의 큰 짐을 다 놓고 푹 쉬게 되었지만, 넓게 볼 때 진리란 자기 혼자서 편안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중생이 생각하는 '나'라는 관념은 없어졌으나, 아직도 삼라대천세계의 모든 생명과 일체가 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단계에는 자기 자신의 고(苦)를 넘어섰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고가 없습니다. 아주 편안합니다. 그래서 이뿐인가보다, 하고 편안한 거기에서 머물러 있기가 쉽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상태가 아주 기쁘고 반가우니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자기는 달디 단 샘물을 마시며 사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생명의 샘물이지요. 그러니 거기까지 간 것만 해도 스스로 대견스러울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이 있다는 생각을 못 하기가 쉽습니다.
더 높은 차원은 아직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니 생각도 해볼 수 가 없지만, 아래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위쪽은 어둡고, 아래쪽은 환하니, 거기에서 자기가 제일인 줄만 알기 쉽고, 그 병폐가 수행자를 그르칩니다. 그래서 남을 아래로 보면 결국 자기에게 이익될 게 없는 법이지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주인공은 '큰 하나'입니다. 모든 생명들이 다 그것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주인공을 사무치게 안 수행자가 '자기 혼자서만'기쁘고 편안할 수가 있을까요? 그 또한 '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대비심이 없는 공부는 작은 공부입니다. 자기 혼자만 편안한 것은 아직 공부가 다 익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그 다음 차원의 과제는 내가 편안한 그것을 넘어서서 '모두 함께 편안한'차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대비심이 있어야 하고, 수행자로서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너무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올바른 수행자라면 결코 어긋나지는 않을 테니까요. 부처님을 향한 이 마음의 길은 진실로써 꾸준히 나아가는 수행자를 결코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어느 정도 휴식과도 같은 기간을 지나서 자연스럽게 다음 차원에 대해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존재들이 함께 편안한 것을 염원하게 됩니다. 대비심이 일어나지요. 그리하여 이 위대한 마음의 길, 마음의 법의 다음 차원을 터득해 나가게 됩니다. 체험을 하는 것이지요. 다양한 방편을 얻게 되고, 나-너를 떠난 경지에서 크나큰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소위 신통력이라고도 하는 신묘한 능력이 옵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 - 그것이 오면 그것 또한 이미 첫번째 단계에서 그 어떤 것이든 다 놓아 버리는 공부가 완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다가오든 생각 없이 놓아지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일체 경계를 다 놓는다고 했을 때의 '일체 경계'란 그야말로 일체인 것이어서 그 어떤 고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예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나 물질 따위 세간적 가치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신통 능력까지도 놓아 버려야만 할 일체 경계 중의 하나인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 등이 오면 그대로 다 자기의 근본으로 되돌리게 됩니다. 그것이 수행자와 보통의 영통자와 다른 점입니다. 수행의 결과로서가 아니더라도 그런 영통이 오는 경우가 있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은 모든 경계가 나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그것을 되돌려 자기의 근본 자리에 놓아 버리는 것이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신비한 힘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이거야말로 보물을 가지게 되었구나! '하겠지요. 그러나 자기의 근본이 허약하거나, 신통 능력까지도 결국 나 자신의 다른 모습임을 모르는 이에게 있어서 그런 힘은 점장이가 되고, 혹은 미치광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제자는 먼저 철저하게 그 점을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점을 모르고 있다가는 끝까지 나아갈 수도 없을 뿐더러, 자유는 커녕 오히려 부자유 속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언제나 신비하고 반갑고 위대하고 찬란한 것을 조심해야만 합니다. 그 속에 나의 이기심이 숨어 있고, 그것 때문에 나의 어리석음이 덜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위대한 것을 보아도 아주 비천한 것을 볼 때와 다름없이 무겁고도 평온한 마음, 어떤 더러운 것을 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볼 때라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은 채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그런 마음 - 그것이 확고하게 되어 있지 않으면 큰 성취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행자는 그 모든 것이 결국 내 마음(自心)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닥쳐오는 신통력까지도 다 자심으로 돌려 놓다 보면 무심(無心)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어서 무심이 아니라, 있긴 있는데 스스로 고요할 뿐이기 때문에 무심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나'가 있느냐 없느냐 따위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 경지입니다.
그리고 그 무심이 점점 깊어져 가게 되지요. 무심이 제 스스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나'가 있을까요?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있다면 그것은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나'인 것이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없다는 것이 맞겠고, 없다고 하면 '나'라는 중심이 없는데 어떻게 생활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느냐는 되물을 테니 있다고 해야만 하겠지요.
그런 상태가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무심 그것도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텅텅 빈 상태 - 없어서 텅빈 게 아니라 너무나 자재(自在)로와서 텅 빈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모든 경계를 자심으로 돌리고, 그때가 되면 자심을 무심으로 돌리고, 다시 그 다음엔 그 무심조차 녹아져서 공(空)에 이르는 것입니다. 차원은 각각 다르더라도 방향은 하나지요. 마음 안으로 향하는 것, 둘로 보지 않고 일체를 나로 보는 것, 놓아 나가는 것…
그렇게 해서 두 번째 단계에서는 오신통을 벗어나게 되며,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마지막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누진통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신통과 마지막 신통인 누진통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아주 다릅니다. 오신통은 무심이 되지 않고도 간혹 얻을 수 있지만, 누진통은 무심 이후에야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또 누진통은 오신통 모두를 합친 것이면서, 그것들에게 질서를 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누진통이 성취되었을 때 오신통은 제가 있을 자리에 자리잡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때는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됩니까?
"그렇지요. 시공을 초월한 차원에 들게 됩니다. 대비심과 대지혜가 완성된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두 번째 단계에서 작게 죽은 것이라면 이번에는 크게, 아주 크게 죽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다는 말조차도 거기엔 알맞는 말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개인으로서의 나로서 죽었지만, 이번에는 전체 생명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 지금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었다는 기독교의 대속의 교리를 생각나게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크게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정작 신통력을 굴릴 수가 있어집니다. 언젠가도 이야기했었지요? 통 밖에 나와야만 통을 굴릴 수가 있다고요. 통 속에서는 통을 굴릴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신통력도 그렇습니다. 신통력 속에서는 신통력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신통력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신통력이 나를 굴리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오신통만으로는 도가 되지 못한다고요.
거기까지는 나 아닌 나가 되지를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 아닌 나, 모두의 아픔을 함께 앓는 나가 되었을 때, 그 나는 나가 아니라 '우리 다 함께'입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거기엔 이유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이기에, 불성을 지니고 있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우리 다 함께'복된 상태를 염원하는 보살만이 참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혼자서만'복된 길을 찾아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천만 가지로 뛰어다녀도 결말이 나질 않습니다. 오직 보살심, 오직 '우리 모두 함께 복된 길'만을 통해서 나의 참된 행복도, 이 세상의 참된 행복도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보살심으로, 이기심이 텅 빈 상태에서야 비로소 신통력은 부려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그 신통력이 세상을 나쁘게 하는 쪽으로는 도무지 쓰여질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자기 개인을 위해서 쓸 수 있을까요? 자기 개인만을 떼어서 생각하는 습관은 이미 아예 사라져 버렸는데 말입니다.
그는 오직 더불어 좋은 일을 위해서 살기로 철두철미 되어졌습니다. 그건 요지부동입니다. 천지가 무너져서 먼지 알갱이같이 산산조각이 나도 그건 포기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위협도, 그 어떤 유혹도 그에게는 통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위협을 두려워하고, 유혹에 넘어가는 따위의 근거인 미망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차원에서 신통력을 하나하나 점검해 나갑니다. 풀잎 하나, 벌레 하나까지 다 포함한 상태에서 하나하나 확인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십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야말로 보임이요, 만행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큰스님께서 산으로 다니시며 수행하셨던 10년이라는 기간은 그 기간이었습니까?
"……."
- 그럼 이젠 그 다음 단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수 없는 체험과 점검과 만행을 하다 보면 마침내 그것이 크게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한 보살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
"그리고 그 보살은 이제 세상을 제도하러 나서게 됩니다. 물론 색신을 지니고 있지만, 그 색신으로서가 아니라. 색신과 물질로 제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으로는 원융하게, 자연스럽게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입니다. 보살은 마음의 법리로써 세상을 건지게 됩니다."
- 큰스님께서는 그 단계를 '크게 나투는 단계'라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마음으로써 하기 때문에 나툰다고 한 것입니다."
-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해 주신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수행자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진정으로 나와 둘이 아닌 것을 알고, 이 세계와 더불어 다시 한번 크게 죽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닥쳐오는 오신통까지도 놓아 나갑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무심이 되고 마침내 공이 되어 크게 나툴 수 있는 보살로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그 보살의 상태는 어떤 것인지요? 너무나 까마득한 말씀이어서 잘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오직 참만을 보고 참만을 삽니다. 앞과 뒤가 끊어져 있습니다. 아무런 여한도 미련도 없습니다. 아무런 바램도 없습니다.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언제 어느 때나 이 세계의 수많은 중생·보살·부처와 한 몸 한 마음입니다."
- …….
"그러면서도 세상을 제도합니다. 본래 부처이면서도 온갖 고에 시달리는 중생들에게 자기 본래 모습을 보도록 여러 가지 방편을 냅니다. 오직 그것 한 가지가 보살의 모든 행위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무엇을 해도 중생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하는, 그것을 위한 일뿐입니다.
그게 단 하나의 기준이라면 기준이지요. 그러나 그 기준점에서 생각을 내서 제도가 된다기보다, 공적하게 있다가도 하나하나 일에 닥쳐서는 불이 번적 일어나듯 제도를 한다고 말하는 표현이 옳겠지요. 아니, 제도를 한다기보다 저절로 제도가 되어집니다."
-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 되어진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인위가 없는… 말하자면 두 존재가 마주치고, 어떤 일과 부딪치게 되면 진리의 법칙이 저절로 작용이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산은 푸르르고 물은 흐른다는 겁니다. 진리의 바퀴가 돌아간다고도 하지요. 닥쳐오는 대로 갖가지로 저절로 응해서 판단이 개재 될 여지도 없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저절로'요, '그냥'이지요. 이유라는 것이 없습니다."
- …….
"그렇게 해서 보이는 중생과 보이지 않는 중생, 유위법과 무위법을 모두 아우르게 됩니다."
- 여기에서 저는 유위라는 말과 무위라는 말을 잘 구별해 보았으면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위는 우리의 육안에 보이는 세계를, 무위는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영의 세계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부처님께서 처음에 유위·무위법을 구별하실 때는 조금 달랐었지요. 유위법은 생멸하는 세계의 이법을, 무위(무루)법은 열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를 일컬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쓰셨던 용어대로 따라본다면, 무위법과 유위법이 있고, 그중 유위법을 색(色) 유위법과 비색(非色) 유위법으로 나누어야 될 듯도 합니다. 그건 그렇고, 용(用)에 대해서 여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용이란 체(體) 라는 용어에 대응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용은 한편으로는 불보살의 교화방편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은 무루법을 완성하지 못한 수행자 (또는 영통자)가 삿되게 신통력을 쓰는 것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특히 선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신통력을 활용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다시피 하고 있는데요…
"이미 말씀드린 무심 이후에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그것은 꼭 필요한 제도 방편이 되겠지요. 그리고 수행 과정 중에도 점검과 체험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 근본은 절대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까지 마음 공부의 단계를 말씀드렸지만, 굳은 신심을 지닌 수행자에게는 단계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용도 그렇습니다. 불보살이 아니더라도, 또 깊은 수행을 못 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주인공을 믿는 깊은 신심으로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힘은 이 우주 법망에 속속들이 전달이 됩니다. 중생의 한 생각, 한 행위 마다 법망에 걸리고 기록되지 않는 바가 없지만, 특히 주인공을 믿는 마음에서 남을 위한 한 생각을 낸다면 그 공덕과 위덕은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가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지금 중생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그대로 신묘한 용입니다. 단지 중생들이 그걸 모르고 신기한 것을 찾는 것이 병이지요."
- 큰스님께서 보여 주시는 신비한 힘은 사실 너무나 은밀한 것이어서 거의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으려니와, 또 알려져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하나 듭니다. 예컨대 기적(신통력)에 대해서 부처님과 예수님은 아주 상이한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여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고, 물 위를 걸으셨고, 병자를 치료하셨고,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을 행하시지도 않았고, 또 원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식을 살려 달라며 울부짖던 고다미에게 대하신 태도에서 두드러져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녀에게 접시에 좁쌀을 모아오라고 하셨지요. 그 대신 그 좁쌀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에서만 모아와야 한다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고다미는 기뻐하며 부처님 앞에서 물러갔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은 없었고, 고다미는 생자는 필멸이라는 법칙을 이해하고 자식의 죽음을 조용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예수님 쪽이 아주 찬란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에 비하며 부처님의 방법은 가혹하기까지 합니다. 외아들을 잃고 비통해 하는 어머니에게 그 죽음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실로써 인정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진실은 어쩔 수 없는 진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걸 잘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사로를 살렸겠지만, 그 나사로가 영원토록 살아 있지는 못합니다. 결국 나사로에게 죽음은 잠시 연기된 것일 뿐 언젠가는 그도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육신의 죽음이, 육신의 고통이 없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육신의 죽음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나의 참 면모를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대비를 놓고 볼 때 큰스님께서는 어느 편을 택하시는지요?
"두 분 다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근본적으로는 부처님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대라는 시기상의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여러 가지 방편도 필요하겠지요."
- 가령 몸이 아픈 사람이 있을 때 병을 낫게 한다든지, 떠도는 영들을 천도 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중생계 안에서의 일이요, 불법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과는 '직접적으로는'관계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임시 조치지요. 그러나 임시 조치라는 말은 무의미하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그것 때문에 진화를 하고 차원을 높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만큼 진리 쪽으로 나아가게 되니까요."
- 그러니까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긴 안목에서 볼 때에는 그것도 구도와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군요.
"내가 전에 나 자신에게 그 문제를 얼마나 묻고 물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찌 됐든 다른 생각 아무것도 할 것 없이, 우선 당장 죽어가는 사람은 살려 놓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용이니 뭐니 이전에 ! 사실 조그만 것도 큰 것도 둘이 아니고, 내려서는 것도 올라서는 것도 둘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나는 중생들의 아픔을 보면 '그대로!'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이게 잘못이라면 나를 장구벌레로 만든다 해도 좋습니다.!'나는 그렇게 다짐했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아 아무런 두려움도 거짓도 없습니다.
남을 안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의 과보로써 얻어진 법의 힘이라면 그것이 그렇게 쓰여질 까닭은 없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얻어진 것이겠습니까? 내가 가끔씩 웃으면서 말하지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냥 갈 순 없잖아?'하고 말입니다. 그 말이 쉬운 말 같지만 참으로 소중한 말입니다. 그냥 갈 수는 없다라는 것은 진실 때문입니다. 뼈저린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걸 건져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저는 큰스님의 인격을 '전천후'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지금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예컨대 중생들의 마음은 어느 일점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사물을 보는데, 그래서 상대를 아래로 내려다 보기도 하고, 위로 치어다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그 중심점의 위치를 고집하느라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상대에 따라 응하십니다. 그리고 그 응함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상대방의 수준이랄까요, 위치랄까요, 그에 따라 저절로 스르륵 내려오시곤 합니다. 그건 수직좌표 상에서의 전천후 인격이지요. 그래서 스님 자신의 위치를 고집하지 않으시고 상대방과 한마음이 되십니다. 그건 수평좌표 상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그 대상의 특성·변화에 따라 또 그대로 응하십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노인이 오면 노인이 되어 주고, 어린이가 오면 어린이가 되어 준다'고 이르는 것이겠지요. 도 그것이야말로 상대를 위로 보지도 않고, 아래로 보지도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또 그것이 큰스님께서 항용 하시는 '높은 것은 높은 것이 아니다. 높고 낮은 것이 다 포함되는 것이 높은 것이다'는 말씀을 보여 주시는 경우겠지요.
"그러므로 자기의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되려면 일체 경계를 둘로 보지 말로 자기의 깊은 내면에 던져 버리는 수행이 꼭 필요합니다. 주인공은 뜨거운 용광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다 녹여 버립니다.
예컨대 용광로 속에 무쇠가 들어가든, 고철이 들어가든, 놋쇠 젓가락이 들어가든 다 녹아 버립니다. 일체를 다 녹이는 용광로 - 그 용광로가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남을 위해 가슴 아파하는 마음, 남을 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의 안쪽에 그 용광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광로를 거쳐 나올 때 던져넣은 모든 잡쇠 부스러기들은 순금이 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영원히 빛이 변하지 않는 순금 말입니다.
놋쇠를 넣어서 순금이 나오는 곳이 바로 '마음의 마음', '나의 나'입니다. 순금이란 물질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 변치 않는 영원성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 수행자들은 그런 순금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누누하게 말씀 드린 것처럼 수행은 방하착(放下着)을 근본으로 합니다. 이것은 수행자 자신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나,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에게나, 진리의 당체 그 자체에게나 가장 빛나는 공덕을 쌓아 나가는 첫 단계인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회보5번 법문일:.. 영원한 복락의 길 페이지: 1/1
큰스님과의 대화 3
(전호에서 계속)
- 그러면 그런 과정을 거쳐서 불과를 이루고 나면 보살은 어떻게 중생을 제도해 나가시는지요?
"보살에게는 보고 듣고 행하는 일 모두가 다 중생 제도입니다." - 그런데 그런 경지에 오르신 분이 한
시대에 한 분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예컨대 불보살이 징계를 내릴 때도 있습니다. 보통 좋은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시지만, 정
보다 못해 법의 철퇴를 들어 내리치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징계요, 철퇴라는 것은
말이니까 그렇지 그 또한 자비요, 선교 방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이는 철퇴이자 동시에
살리는 손길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중생은 죽는 것을 정해 놓고 나쁘다고만 합니다. 죽는 것이
진실에 있어서는 좋을 때도 있다는 걸 모릅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겉만 보고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
-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한 시대에 그런 보살님들이 많이 탄생되는 거야 말할 나위도 없는
복된 일이겠지만 국가나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서 그 분들이 꼭 같은 뜻을 내시게 될는지요?
"법의 세계는 넓고도 넓습니다. 한 시대, 한 국가로서는 다 포함할 수 없을 만큼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마음입니다. 육신이 죽어도 죽어질 수 없는 마음, 자기가 지은 행위로 부터는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도 없는 이 마음, 그래서 마침내 깨닫는 그때에 가서야 해탈이 되는 이 마음의
진화만이 가장 소중한 단 한가지의 일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냐 하면 목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타락시키느라고 애쓰는 못난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복되지 못하고, 남에게도 해가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얼핏 보기에는
그것이 제 육신을 살찌우니까 복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욕심이 정작 중요한 주인(마음)을 해칩니다.
비유하자면 자기 집을 짓는 사람이 집을 제법 멋지게 짓긴 했으나, 거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몸을
상하여 낙성식 날 죽었다고 할 때, 그 아름다운 집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다. 집은 주인의 것이요, 주인에
게 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집이 주인에게 봉사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집의 노예가 된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육신을 위하는 탐욕으로 마음을 타락시키는 사람은 종살이를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찬란한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그것은 집이 그럴듯해진 것일 뿐 정작 집주인은 그 사이에
다 늙어 버린 꼴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 중에는 욕심이 지나쳐서 남에게 해를 끼치기까지 합니다. 그럴 때 불보살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내려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는 화(禍)가 아니라 오히려 복인
것입니다. 그때 보살은 그의 무명(無名)을 친 것이지, 그의 참 생명을 친 것은 아니니까요. 이때의
생명은 육신을 지탱하는 그 생명이 아니라 우리의 참 생명, 육신이 수십만 번을 죽어도 결코 죽지
않는 참 생명을 말합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 참 생명입니다. 그 참 생명으로 눈뜨기 위해서 라면
육신을 몇 번 버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이치가 불보살에게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치는 의식
없이도 저절로 그렇게 살려 쓰여집니다. 그러므로 불보살의 경우에는 겉보기엔 죽이는 것도 참에서는
살리는 것이요, 살리는 것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이치가 한 국가나 한 세계에 두루 작용하므로 여러
불보살의 의지가 서로 합쳐서 빛을 발할지언정 서로 부딪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런 불보살님들이 계셨는데도 왜 세상에는 여전히 악과 불의가 남아 있는지요?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각자 각자 자신의 마음 안에서 진실을 발견해야 하고, 그것은
각자의 해야 할 몫입니다. 깨달음은 불보살로서도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꽃씨가 꽃으로 피어나는 것은
꽃씨 속에 피어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불성(佛性)이라면 불보살과 선지식은 그 씨를
위해 비를 내리고 햇빛을 비치는 등의 역할 정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가 알맞게 오고,
햇빛이 고르게 비추어도 씨앗이 자라 오르려고 하지 않는 데에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법정, 감옥,
경찰서를 가 보세요. 비어 있는 때가 없습니다. 계속 내놓지만 계속 가두어야 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불보살들이 계속해서 중생을 제도하시고, 중생도 끊임없이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이지만, 여전히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중생, 올라오다가도 다시 미끄러져 가는 중생이 있습니다."
- 그렇다면 세상 전체로 볼 때는 항상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불국토를 향해서 말씀인가요?
"이런 이치가 있지요.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존재는 마음의 차원대로의 그 수준에서 각각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 못하듯, 같은 중생간에도 더 높은 차원에서 사는 사람의 뜻을
낮은 차원에서 사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그와 마찬가지 이치로 중생은 보살의 세계를 이해 못합니다.
이 지구에서 사는 중생은 이 지구대로의 생각이 꽉 박혀서 지구식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예컨대
공기가 있어야 생명이 살 수 있다, 불은 뜨거워서 그 속에 오래 있으면 죽는다, 물은 어떻다……
등등이지요. 그런 의식의 차원을 가진 사람은 그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다 넓고, 높은 차원에
이른 이들은 다릅니다. 그러니 다른 혹성, 다른 세계에서는 여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을 수
밖에요."
- 이야기가 조금 우원(迂遠)해진 감이 있습니다. 말머리를 바꾸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대공덕을 성취하신 분들이 입멸하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지요? 육신을 벗을 때 그 분들은 어디로
가시는지요?
"육신을 버려도 버린 것이 아니지요. 깨달았다는 것은 육신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도 감이 없는 그 자리, 가고 올 것도 없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육신을 버리는 것이 그 본분 자리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 그렇지만 아무튼 중생의 눈에는 떠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육신을 지니고 활동하시던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행위는 끝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과 둘이 아니요, 모든 것이 다 나 아님이 없는 것이 깨달음의 자리라면 그는 우주에 충만한
것이므로 아무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 그러면 그런 분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십니까?
"오고 오지 않고가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그대로 그 자리입니다. 설사 이 지구를 벗어나서 수억 광년
저쪽의 다른 혹성으로 간다고 해도 결국 같은 자리입니다."
- 입멸 이후에 육신을 새로이 건설하느냐 않느냐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보살의 마음에 달렸지요."
- 그야말로 자재로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불보살님들의 위대하고 자재하신 세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된 셈이라 보고, 다시 수행자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여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큰스님의
수행법을 요약하면 다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① 수행자가 ② 안팎의 일체 경계를 ③ 주인공에
④ 맡긴다. 가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의 언어 사용은 참으로 세심한 주의를 요합니다. 위의 경우에
④는 별 문제가 없겠으나, ① ② ③은 한 번 더 살필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보통
'나'라고 하는 그 주체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주인공 또한 '나'이니까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안팎의 일체경계 또한 '둘이 아닌''나'가 아니겠습니까? 거기에서 더 생각해 보면 사실 맡긴다는 것도 '
나'의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면 틀린 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일상적인 언어 사용법으로 보자면 이 문장이
타당하지만, 도(道)의 차원에서 본다면 마치 파리채로 시속 30만 킬로미터나 되는 햇빛을 건지려는 것처럼
어림없는 문장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할 때에는 주의해야 하며, 또 듣는 편에서도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겠습니다. 그 때문에 어떤 작가는"마음으로 보아야 참된 말을 듣다"고 하였습니
다. 이때의 마음이란, 언어라는 파리채의 그물 사이로 빠져 나가려는 진짜 의미를 놓치지 않는 이심전심의
덕이요, 지혜이겠지요. 다시 그 문장으로 돌아가서, 도(道)의 차원에서 그것을 말하자면 극단적인 경우,
일체가 나이므로 ① 내가 ② 나를 ③ 나에게 ④ 나한다. 가 될 수도 있고, 모든 것이 주인공일 경우
① 주인공이 ② 주인공을 ③ 주인공에게 ④ 주인공한다. 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이르고
보면 말을 그치고 양구(良久)나 방(방)이나 할(할)로 응해야 하겠지요. 그러면서도 이 대담의 목적은
그런 양구나 방·할을 우리 범상한 수준의 불자들에게 알아 듣도록 전해 볼 뜻으로 시작된 것이니만큼,
계속해서 일상 언어로 여쭈어 보겠습니다. 위의 문장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주인공'입니다. 이 용어를
제대로만 알면 수행해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인공은 무엇입니까?
물론 주인공에 대해서는 큰스님께서 늘 설하고 계시고, 이 대담의 첫머리에서도 이야기되었습니다만,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인공이라니까 마치 내 안에 불성과도 같은 존귀한 주인이 있는
줄로 아는 것 같기도 한데, 주인공은 무엇입니까?
또한 주인이면서 공하다고 하고, 공하면서도 주인이라고 하는 데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잇도록 설명해
주십시오.
"마음에는 형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합쳐지면 그대로 하나가 됩니다. 만일 어떤 두 사람이 서로
한마음이 되어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한다면 거기에서는 너와 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경우에는 둘이
하나가 된 것인데, 그보다도 더 깊이 하나가 된다는 그 하나마저도 없게 됩니다. 분명히 주고받은 말이
있고, 앉은 사람들이 있고, 오고갈 것은 다 오고 갔으면서도 거기에는 주고받은 말도 없고, 앉은 사람도
없고, 주고받은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역력하게 있는 것입니다."
- …….
"나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어린이가 오면 어린이와 한마음이 되고, 노인이 오면
노인과 한마음이 됩니다. 병자 오면 아픈 그 심정과 하나가 되다가도 기쁜 사람이 오면 나도 함께
기쁩니다. 그런데 그 중 어느 때의 마음이 내 마음이겠습니까? 그 중 어느 때의 내가 나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렇게 순간 순간 다양하게 작용하는 그 마음이 각각 다른 데서 온 마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주인공 한자리로부터 되고 있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걸 종합한 것이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생각나기 이전도 지금으로 돌리라는 겁니다. 지금 네가 있으니까
생각도 내는 거고, 그 이전도 있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또 지금 네가 있으니까 생각이 있고, 생각이
있다면 그 이전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의 내가 중요하지요. 지금이라니까 내 육신의 지금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지요. 지금 나를 움직이고 있게 하는 그 당체를 말하는 거지요. 지금의 이
몸뚱이를 누가 주재하는 것이 겠습니까? 맡겨라, 맡겨라 해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중생은 그 뜻을 얼른
알아 듣지 못합니다. 어디 한 곳에 고정되게 딱 점을 찍어 놓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중생은
고정된 생각에 익숙해져 고정되지 않은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중생도 사실 살아가는 양태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금방 남편 앞에서는 아내가 되었던
사람이 자녀 앞에서는 어머니가 되거든요. 그렇게 며느리가 되고, 시누이가 되고, 시장에 가면 고객이
되고, 버스를 타면 승객이 되지요.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고정됨이 없이 살면서도 생각은
딱 고정되려고 하니 얼마나 억지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니 그 모든 것을 다 싸잡아서 주인공 ! 한 겁니다.
그 모든 것 속에서, 그 모든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고, 또 내가 그 모든 것 자체인 것입니다. 그렇게 턱
! 믿고 있으면 되지요. 그 믿음 일점 속에 일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 주인공이란 선가에서 말하는 생각 나기 이전이고, 부처 자리이며, 그 자리를 증득하게 되면 지금까지
이야기된 큰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생각 나기 이전을 생각하려니 생각이 될
리가 없기도 하겠지요. 생각이 나는 거기서부터는 알겠으나 그 뒤쪽이라면 도무지 답답하고 캄캄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생각에야 잡히든 안 잡히든 무조건적으로 주인공에 맡기십시오. 그때가 그대로 부처 자리입니다."
- 그러나 다같이 부처라고는 해도 깨달은 분과 중생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누구나 본성은 다 선하고, 본성 자체는 부처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아무리 나쁜 마음을
내고 있다고 해도 그 근본에는 부처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주인공으로 되돌려 놓아 나가고,
또 주인공을 믿는 굳은 힘만 있다면 조금씩 조금씩 지혜가 생깁니다. 그리고 지혜가 있으므로 차츰 차츰 너
그럽게 마음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나쁜 마음이 난다고 해도 억지로 그 마음과 싸우라고는 하지 않습
니다. 그게 나쁜 줄 아는 그 마음은 주 인공의 마음입니다. 먹구름 뒤에는 맑고 푸른 하늘이 있듯이, 나쁜
생각을 나쁜 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나쁜 마음이라는 먹구름은 생겼는가 하면
얼마 안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짙은 먹구름이라고 해도 하늘의 본성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 먹구름이 아무리 두터워도 걷히는 때가 있게 마련이고, 그때 보면 하늘은 구름 끼기 이전과 아무
다름없이 맑고 높습니다. 더 나아가서 먹구름이 끼어 비가 퍼붓듯이 내리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하늘은
비록 가려져 있었다는 것 뿐, 그 뒤에서 맑고 푸르러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오는 날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지나가 보신 분은 잘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쁜 사람을 볼
때 너무 탓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나쁜 마음이 나더라도 억지로 그와 싸우느니 보다는 시간을 두고 기다
려 보라고 나는 말하는 것입니다.
- 지금 큰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은 듣기에 따라선 생명수와 같은 말씀 같기도 하고, 아주 두렵고 위험한
말씀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내가 가르치는 대로만 따라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따르기에
앞서 잘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행과 뜻과 말이 일치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일치되는 사람의 말이라면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말을 믿고, 그 사람과 같은 길을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믿되 길을 가리켜 주는 길잡이로서만 믿지, 그것을 받아들여 행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주인공)에 비추어서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자기 주인공 안에
일체제불이 함께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식의 말을 듣되, 듣는 그때가지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말이 너무나 감미로와서 그 말에 빠지게 되어 정작 수행(자기 주인공
에 비추어 보는)은 뒷전이 되는 경우 라면 도움은 커녕 그르칠 수도 있겠지요. 어디까지나 선지식의
가르침을 배워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일입니다. 선지식이 걸어온 전화를 그 쪽에 가서 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전화는 내 쪽에서 받아야 합니다. 나의 전화기, 그것은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선지식의 말씀이
훌륭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 내 마음 안에서 그 메아리가 울릴 때, 그 말씀은 그대로 산 법문이 될
것입니다."
- 지금 해주신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습니다. 선사들의 어록에는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종교치고 이런 과격한 말씀이 허용된 경우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전통
속에서는 그것이 당당하게 선언되었고, 또 사실 부처님께서도 자등명(自燈明)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스승의 아무리 위대한 법문을 듣는다 하더라도 부처를 이루는 첫 출발점은 단 하나 내
마음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내 마음 속의 넓고 평온한 부처 자리, 조금 전에 푸른 하늘이라 말했던 그 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일컬어 우리는 주인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주인공은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일체를
종합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인공을 증득한 수행자가 마음을 거두어 들이면 깊이 가라앉아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입도 뗄 것이 없고, 생각을 일으킬 바도 없습니다.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고,
물결 한 줄기 흔적도 없습니다. 이때를 일컬어서 '가만히 있으면 부처'라고 합니다."
- …….
"세상을 몽땅 병 하나에 집어넣을 수도 있고, 그 속에서 온 우주를 다 꺼낼 수도 있는 것이 부처의
마음자리입니다."
- 그런 위대한 자리가 만중생에게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너무나 미묘하고 감격스러운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그걸 믿고, 그 자리를 증득하고자 나아가는 이들입니다. 다만
그런 자리가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내 속에 그런 어마어마한 불성이 있다고 믿기지 않는 무언지 두려운
중생도 있는 것 같습니다. 좋게 보면 자기의 못나고 어리석고 욕심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는 겸손한
중생인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진리를 못 믿는 못난 사람이겠지요.
"그게 문젭니다. 내가 그토록 자세히, 누누히 일러 주어도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또 밖으로 돌거든요 !
신이다, 부처다, 뭐다… 하면서 모두 밖으로만 빌고 있으니 이것이 기복입니다."
- 그러나 그런 일은 세간적으로 보자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뻔히 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점을 알기 때
문이지요. 그러니 자기 안에 부처가 있다고 믿기보다는 밖의 어디 저 먼 곳에 부처님이, 극락국토가,
천국이,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차원도 가지가지입니다. 대개 선원에 처음 오는 분들은
자기 자신보다는 나에게 매달리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비록 자기 자신을 밝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믿음만은 일단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나중에 자기가 원하던 일이 잘되어 오게 되면 나는
그것은 당신 자신의 믿음의 힘이라고 일러 줍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당신과 내가 하나라고 말해주지요.
그렇게 해서 그런 분들은 조금씩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보다 조금 진전된 분들은 매달리지는
않고, 말씀만 드리고 간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도 고개만 끄덕거리지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멀리서 보며 싱긋 웃기만 합니다. 그리고 한마디쯤 하는 경우도 있지요. 바로 그 순간 벌써 둘이 아니기
때문에 생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지가지의 경우가 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조금씩 조금씩
자기 힘으로 일어서는 것이지요."
- 그러면 특별한 경계에 부딪치지 않을 평소 때, 어떤 식으로 주인공 공부를 해야 하는지요?
"계속해서 주인공! 주인공! 하고 부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관하라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과 관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요? "기도란 둘로 보고 낮은 자의 입장에서 비는
것이고, 또 밖으로 찾는 것을 말하지요. 관한다는 것은 평등한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마음
안쪽을 향해서 주인공은 무엇인가? 하고 관합니다. 그때 큰 믿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은 놓아져 있게 마련이지요."
- 그렇다면 경계에 부딪쳤을 때는 그 경계를 둘로 보지 말고 즉각 주인공 자리에 놓은 것, 특별한 경계가
없을 때는 관하는 것, 평상적인 생활을 할 때에는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나 금방 말씀 드린 것처럼 큰 믿음이 있으면 이미 놓아진 것이므로 따로이 놓는다
안놓는다가 없겠지요."
-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어떤 경계에 닥쳤을 때, 즉 몸이 아프다든가 할 경우에 병이 낫는
상태 쪽에 믿음을 두고 놓아야 합니까? 아니면 그 결과와는 관계없이 그냥 놓는 건지요? 보통의 경우 좋은 쪽으로
희망을 두는 것이 중생의 속성입니다만……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무엇이 참으로 좋고 참으로 좋지 않은지 중생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모든 걸 한다고 굳게 믿고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그러면 결과에 대해서는 미리 바라거나 예측하지 말라는 겁니까?
"오직 믿을 뿐이지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보다는 놓게 되면 (병이) 나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거든요
.
"그게 그렇습니다. 놓는다는 것은 앞뒤가 없이 그냥! 놓는 겁니다. 거기에 지저분한 꼬리가 붙을 수가
없습니다. 큰 믿음을 가졌다면 그럴 수가 없지요. 나(生)도 죽어도 이 자리인데 뭐가 붙을 게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아직은 주인공 자리를 확연히 알지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한마디 더 해주는 것입니
다. 만약 아주 급해서 안 될 때에는 '그대가 한 일이니 그대가 해결해야 할 것 아닌가?'하고 관하라는 것입
니다.
"
- 그럴 경우 조금 전에 이야기한 '기도'와 비슷해 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르지요 ! '이것을 낫게 해주십시오!'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때는 나와 기도 받는 상대가 따로
있습니다(예컨대 2촌간). 그런데 이 경우는 '내가 지금 아프잖아? 아프면 돼?'뭐라고 할까요? 내가
나에게, 같이 아픈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기심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뭐라 말 할 수 없이
진하고 아픈 심정에서 말 아닌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말이라지만 거울에 사물이 비치듯이 비쳐지는 그런
마음의 말이지요. 그러니 그것은 기도와는 다릅니다(1촌간, 무촌간). 왜 이런 법을 가르치느냐 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복된 길에 들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중생이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
-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과정을 넘어서면 떳떳하고 의연한 자세를 갖춘 수행자로서 오직 믿고, 놓고,
관할 뿐이고, 묵묵히 자기 발 밑만 보고 걸을 뿐이겠군요.
"주인공을 본 사람이야 이를 나위도 없는 일이지요. 그런 사람은 아무 관념이 없이 '그냥'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삶이란 얼마나 힘든 여정이겠습니까? 그래서 그 힘든 짐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마음을 가지다 보면 우선 자기 자신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게 되며 화목할 수밖에요.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세상은 행복해질 테니 이 또한 부처님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곧 보살도가
아니겠습니까?"
- 부처님께서는 불도를 가리켜 초중종(初中終)의 선(善)이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그 끝도 좋은 가르침이라는 뜻이지요. 또한 불도의 요체를 일러 흔히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고 말합니다. 이때의 상구 보리는 자리(自利)로, 하화중생은 이타(利他)의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불법은 내게도 좋고 세상(他)에게도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불법은 시간적으로: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좋은 가르침 공간적으로: 나와 이 세계가 함께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좋은 불법을 마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진감래(苦盡甘來)라든가
흥진비래(興盡悲來)라는 말이 있듯이, 언젠가 좋기 위해서는 언젠가 힘들어야 하는 것이 세간법입니다.
그리고 또한 네가 좋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누군가가 좋기 위해서는 내가 손해를 보아야 하는 세간법이지요
. 이런 세간법에 비추어 초중종의 선이요, 자리이타의 길인 불법이야말로 그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길이겠습니까? 바로 그런 점을 큰스님께서는 긴 시간 동안 아주 세세하게 일러 주셨습니다. 이번 대담에
응해 주신 큰스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 대담 내용이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쁜 빛이 되고, 확실한
삶의 나침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끝으로 결론 한 말씀만 부탁 드립니다.
"……"(미소)
첫댓글 ()()() 성불하십시요...........
감사합니다()()()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나무서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