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비판 (칸트와 유가를 중심으로)
2019101241 철학과 박석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지각 구조를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것으로 물자체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또한 그는 실천이성 비판에서 ‘양심’과 ‘선의지’를 이야기하며 우리 내면의 도덕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칸트의 도덕 법칙은 다음과 같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나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고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하라”. 인간성을 중요시하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근대 보편적 인권 개념의 기초가 되었으며, 양심과 인간성을 존엄하게 여기는 점에서 양명학과 주자학 및 성리학의 ‘인’과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선하다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간다움이 선하다는 전제에 대한 의문과 칸트가 선의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사용했던 논리적 비약을 짚어보려고 한다.
우선 칸트의 선의지에 대한 비판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물자체를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물자체는 서양 전통 철학에서 말하는 실체를 이야기한다. 또한 존재론적으로 신에 대한 담론 역시 이성의 월권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에서 신 존재가 필요에 의해 요청된다고 이야기한다. 이성을 통해서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최고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신’과 ‘자유’와 ‘영혼 불멸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는 최고선을 실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자유’, ‘영혼 불멸성’과 ‘신’의 개념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최고선이 있다는 가정하에 ‘신’과 ‘자유’와 ‘영혼 불멸성’이 있다는 논리로 논리학에서 후건 긍정의 오류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선의지가 있으니 고정불변하는 ‘자아’, ‘신’과 같은 ‘실체’가 있다는 것은 후건긍정의 오류라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한 가지 오류를 더 범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선의지가 있다고 가정한 것과 개개인의 선의지가 “너는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나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고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하라”는 도덕 법칙에 부합할 것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 내면의 도덕법칙을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또는 ‘적용되어야 한다’라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성리학에도 적용될 뿐만 아니라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도덕법칙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성즉리’를 기본전제로 삼으며 성을 선한 것으로 가정한다. 유교에서의 선의 기준은 서양 전통철학과 다르게 ‘신’에 의한 것이 아닌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토대로 판단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성)이고 인성이 곧 (원리)리와 같기 때문에 성과 리는 선한 것이어야 된다. 이러한 구조는 형식 논리학의 관점에서는 동일률에 근거한 순환논법의 오류이다. 하지만 유가의 학문은 태극도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생성과 변화와 소멸에 관한 내용을 담기 때문에 단순히 동일률을 통한 순환논증이라 평가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무극이 태극이고 태극은 음과 양이며 음과 양은 오행이라는 구조는 형식 논리학에서 ∞ = 1 = 2 = 5 = U(전체집합)의 구조가 되겠지만 태극도설에는 ‘움직임’을 이야기함으로써 형식논리학으로 포착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구조를 나타낸다. 이는 헤겔의 논리학인 변증법과 가까운 형태이다. 하지만 주자학이 변증법적 구조를 통해 순환논증의 오류를 피한다고 하더라도 ‘인간다움’을 가정하고 ‘인간다움’에 벗어난 사람을 인간도 아니라고 치부한다는 점에서 일반화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오류는 성리학과 칸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덕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기에 도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범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은 일반화의 오류와 후건긍정의 오류에 벗어나지 못하며 이것이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도덕의 한계이다. 하지만 이는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지은 것처럼 도덕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는 뜻이지 도덕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현대철학자 레비나스는 현상학을 바탕으로 한 타자 철학을 통해 자신의 일반화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형태의 윤리학을 시도하였으나, 이글의 내용은 전통 윤리학에 대한 한계를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전통 윤리학을 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윤리학을 세워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라는 것은 촘촘한 관계성으로 이루어진 그물과 같아서 그 위에 쌓인 가치들은 마치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존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지는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도덕은 우리의 삶 속에 여러 형태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도덕이 불변하는 가치를 드러낸다고 확정 짓기 어렵지만, 작용하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 글을 통해 ‘본문과 공자의 입장을 비교하는 것’, ‘실체로서의 도덕과 실체가 아닌 것으로서의 도덕’, ‘도덕이 가능하기 위한 가정들’ 및 ‘칸트와 성리학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의들은 도덕비판을 기반으로 한 부수적인 논의라 생각하여 이 글은 여기서 마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