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3: 12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 고전 13: 13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 12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진리의 지식에 있어서 매우 제한적이고 부분적이고 불명료하였다. 그것은 마치 놋쇠로 만든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관해 온전하게, 충족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 27권의 완성된 계시가 초자연적 은사들보다 온전하고 명확하고 충족한 말씀일 것을 암시하였다고 본다. 오늘날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완성된 특별계시이며 그의 명료하고 충족한 말씀이다.
1]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옛날의 거울은 사람의 얼굴을 희미하게 나타냈다. 이 말씀은, 존재(存在)에 있어서 확실하나 그 정체(正體)는 전적(全的)으로 알기 어려울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밤에 하늘을 보면 별들이 많이 보이는데 어떤 별들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내세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내세를 깨닫고도 또 다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약 1: 23-24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는데 건망증(健忘症)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더러운 못과 같다. 더러운 못에는 고기는 다 죽어 버리고 개구리만 성한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림에 있어서 셀바리우스(Cervurius)란 짐승과 같이 건망증이 있다. 셀바리우스는, 무엇을 먹다가도 머리를 뒤로 돌이키면 자기 앞에 놓은 식물(食物)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식물을 찾기 위하여 달아난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건망증이 있는 원인은 하나님 말씀과 반대되는 죄악과 이 세상 생명을 좋아하는 애욕(愛慾)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힘써야 된다. 그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야 될 것이다.
* 벧전 2: 2 -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그 이유는 그는 희미하지만 참된 내세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도는 캄캄한 때에 더욱 빛을 사모하여야 될 자이다. 잎 속에 감추인 꽃을 더욱 보고 싶어함과 같은 심리(心理)로, 그는 희미한 중에 가리운 내세를 사모하여 들어가고자 하여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야 된다.
요일 3: 2-3에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 고후 3: 18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2]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조금 맛만 보고 전체는 소유되어지지 않는 그 심리는 얼마나 안타까운 심리일까? 감옥에 갇힌 사람이 그 좁은 창문을 통하여 바깥 세계를 내다볼 때에 그 마음이 얼마나 바깥 세계를 사모하게 될까?
진실한 성도들은 모두 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9-10절의 해석 참조.)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기억하여야 될 일이 있다. 그것은 현세에 우리의 아는 것이 부분적인 것이지만 믿기에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본문에 바울이 "부분적으로 아는것"의 가치(價値)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주석가 슐라테르(A.Schlatt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현세에 우리가 아는 바를 바울이 무가치하고 무용하다고 말함이 아니다. 그것이 멸절된다는 것뿐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Was wir jetzt erkennen, heisst Paulus nicht und unnutz; es erfallt aber der Verganglichkeit, weil es nie etwas ganzes und vollendetes ist.-Erlauterungen zum Neuen Testament, 1909, Zweiter Band p.117).
우리가 정신만 차리면, 이런 부분적인 진리 지식에 의하여도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분은 전체를 증거하는 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예화를 하나 들면, 이태리 사람 콜룸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역사가 타당할 것같다. 그가 1492년 8월 3일 아침 여덟시에 88명을 실은 세배(Sante Maria,Pinta, Nina)를 가지고 대서양(大西洋)을 건너가던 중 8월 17일엔 선원들이 콜롬부스를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을 안정시켜 항해를 계속하던 중, 10월 7일에 철물(鐵物)에 붙였던 작대기 한 개와 판자 조각 한개와 또 나뭇가지를 물에서 건졌다. 그것이 그들에게 큰 소망을 주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육지가 가까운 줄 알아 힘을 얻고 기뻐하였다.
과연 그날 밤 11시에 콜롬부스는 멀리 있는 불빛을 보았고, 12일 오전 2시에 그들은 신대륙(新大陸)을 발견하였다. 그때에는 전에 콜럼부스의 발 밑에 엎드리어 자복하며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다 흙에 입맞추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한다(Encyclopaedia Britanica VI, 742-743).
그러면 우리는 이들의 여행에 있어서 부분적인 지식, 곧 나무 조각 같은 것을 보고서 전체(곧 大陸)의 존재를 확신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내세에 대한 현재 우리의 지식이 희미하다고 하여, 내세에 대한 확신을 못 가질 수는 없다.
고전 13: 13 제일은 사랑이라.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본 절은 13장의 결론이다.
1]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 말씀은, 신 망 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성도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 셋은 늘 함께 있어야 되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믿음은 우리의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모든 진리와 약속의 말씀들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을 믿는 것이다.
* 요 20: 30-31 –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의 동료들은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고 말했다(요 21: 24).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심문받을 때 “[나는]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증거했다(행 24: 14). 우리는 신구약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믿어야 한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 특히 성도들의 영광스런 부활과 영광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안에서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세상의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필수적 덕목들이다. 성도에게는 믿음도 꼭 필요하고 소망도 꼭 필요하고 사랑도 꼭 필요하다. 믿음은 사람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 방법이며, 소망은 고난과 수고가 많은 세상을 사는 동안 성도에게 계속적인 힘과 위로의 원천이며, 사랑은 구원 얻은 성도들의 삶의 열매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성도들의 필수적 덕목들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그 까닭은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천국 소망의 결과요 열매요 증거이기 때문이다.
(1) 소망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소망을 가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아니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진정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지하고야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어지는 믿음이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명 없는 사물(事物)의 사정(事情)이나 이치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 이치는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 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그가 상주시는 사실은 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믿음 정도이다.
* 약 2: 19 -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특별히 우리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이다.
왜 구원은 믿어야 받도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2)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성경이 말하여 주는 믿음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하고 일어나는 믿음이 왜 사랑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 개인(個人)과의 관계는 어떻게 나의 의식(意識) 속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을 뿐이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형제)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강화(强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형제애(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된다.
* 요일 4: 20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