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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계 “노동의 기준 바꾸겠다. 2022년은 ‘노동세계 대전환의 해’” 선포
“권리중심일자리로 장애인도 일할 수 있다는 것 이미 증명했다”
가짜 장애등급제 폐지로 근로능력평가 기준, ‘4급→3급’으로 후퇴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적힌 노란 손깃발을 흔들며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 강혜민
노동절인 5월 1일, ‘전 세계 노동자의 노래’ 인터네셔널가에 맞춰 ‘이것도 노동이다’ 깃발이 푸른 하늘에 펄럭였다.
깃발 아래에선 200여 명의 장애인 노동자들 또한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적힌 작은 노란색 손깃발을 흔들고 종을 울리며 행진했다. 이들은 1일 오후 3시경,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부터 혜화로터리까지 1시간 30분가량 행진하며 시민들에게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알렸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는 2022년을 ‘노동세계 대전환의 해’로 선포하고 ‘제1회 장애인 노동절’을 열었다.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래패 ‘영오’와 몸짓패 ‘야수’의 공연이 흥을 더했다.
몸짓패 ‘야수’가 빨간 깃발을 흔들며 공연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공연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 사진 강혜민
- 제1회 장애인 노동절, “2022년은 ‘노동세계 대전환의 해’”
전장연은 “그동안 장애인은 ‘자본주의적 생산성에 기반한 경쟁노동’ 이념에 따라, 노동불가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쟁노동은 이미 한계에 봉착했고 더이상 안정된 노동의 기회를 보장하지 않는다”면서 “장애인이 노동불가능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깨고 ‘경쟁 중심 노동’에서 ‘권리 중심 노동’으로의 노동세계의 대전환을 위하여, 132주년의 세계노동절에 맞춰 ‘제1회 장애인 노동절’ 대행진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이 시행된 지 31년이 됐지만 아직 장애인 노동권은 보장되지 않고 있다. ‘장애인 최저임금 적용 제외’로 인해 장애인 노동자 9000여 명은 여전히 월 37만 원가량의 월급을 받으며 노동하고 있다. 장애인의무고용제도 또한 기업들이 장애인 고용 대신 고용부담금을 납부하는 방법을 택하는 문제 등으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전장연은 2020년 7월부터 노동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위해 서울을 시작으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시행하고 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성,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경쟁노동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능력이 가장 낮다고 치부되는 최중증장애인을 우선 고용한다. 이들은 한국 정부가 비준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시민사회에 알림으로써 협약의 실질화를 위한 노동을 수행한다. 권익옹호활동, 문화예술활동, 장애인식개선강사 활동을 통해 ‘권리를 생산’하며 ‘세상을 바꾸는 노동’을 하는 것이다.
공연을 보면서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작은 종을 흔들고 있다. 사진 강혜민
이러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이미 시민사회 곳곳에서 일자리 보장제, 참여 소득, 국가책임일자리를 부분적으로 실현한 일자리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장애인 노동을 넘어 향후 이 세상이 나아가야 할 노동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실현한 일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아래 인수위)는 “공공일자리 정책을 민간 위주로 대수술”하겠다고 밝혀 커다란 우려를 낳고 있다. 전장연 측은 “윤석열 인수위의 입장, 그리고 일부 지자체가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대한 소극적 지원을 하는 상황에서 이 의미 있는 일자리는 향후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라면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입법부와 행정부를 향해 3대 중증장애인 노동권 정책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3대 정책요구안으로 △최저임금법에서 중증장애인 최저임금 적용 제외 조항 삭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전국 제도화 △의무고용제도 전면 개혁 등을 제시했다.
정창조 전장연 노동권위원회 간사는 “노동절 132주년이 됐지만 여전히 노동해방 세상은 오지 않았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자본이 요구하는 경쟁 중심, 생산성 중심의 노동으로 억압받고 있다. 그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올해를 ‘노동세계 대전환의 해’로 명명하고 장애인 노동절 원년을 기념하고자 한다”고 외쳤다.
“장애인도 노동자다. 장애인 의무고용제도 전면 개혁하라”고 적힌 피켓을 걸고 행진하는 장애인 노동자. 사진 강혜민
- 가짜 장애등급제 폐지로 근로능력평가 기준, ‘기존 4급→3급’으로 후퇴
이날 참여자들은 장애인 노동정책과 함께 맞물려 있는 기초생활수급제도도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할 수 없는 빈곤한 장애인 상당수는 기초생활수급자다. 그러나 생계급여 월 58만 3444원(2022년 1인가구 기준)으로는 사실상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일을 해도 소득이 발생하면 그만큼 수급비에서 깎는다. 기초생활수급제도가 정작 수급자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는 장벽이 되는 것이다.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 이희영 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 이희영 씨 또한 최근 이러한 일을 겪었다. 지난 4월 중순, 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소득이 발생했으니 그만큼 수급비에서 차감한다는 것이다. 더 황당한 일은 구청이 그의 소득 발생을 늦게 알았다며 지난 1월부터 발생한 소득분까지 합산하여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끝나는 12월까지 매달 삭감한다고 한 것이다.
이 씨는 “구청 담당자가 ‘월급 받으니깐 생활하는 데는 괜찮으시죠?’라고 말했다”면서 “소득이 발생했으니 그만큼 빼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전까지 소급 적용해서 뺀다는 것은 어이없다. (기초생활수급비는) 소급해서 주지 않으면서 빼는 것은 왜 소급 적용해서 빼냐.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이번 달부터 생계급여가 삭감된 이 씨는 “원래 52만 5000원 정도 받았던 것 같은데 이번 달은 생계비가 5만 원밖에 안 들어왔다”고 말했다. 현재 권리중심공공일자리로 받는 월급은 71만 원 가량된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이 ‘이것도 노동이다’ 손깃발을 흔들며 행진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가짜 장애등급제 폐지’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근로능력평가에 미친 영향에 관해 이야기했다.
정 사무국장은 “기존에는 1~4급까지 근로능력평가를 받지 않아도 일반 수급권을 보장했다. 그러나 장애등급제 개편 후, 근로능력 안 받아도 되는 기준이 4급이 아닌 ‘장애정도가 심한 장애인(1~3급)’으로 변경됐다. 후퇴한 것이다”면서 “기존 4급이 일반수급을 유지할 수 있는 기한이 올해 6월까지로 유예됐었다. 현재 이들에게 근로능력평가 받으라는 용지가 날아오고 있다”고 전했다.
근로능력평가를 받아 일할 능력이 있으면 자활사업에 참여해야만 수급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자활사업 또한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아 최저임금을 주지 않으며, 참여할 수 있는 기간은 제한되어 있고 일자리 종류도 많지 않다.
정 사무국장은 “일자리를 만들지도 않고 이들이 실제 노동할 수 있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로 ‘무조건 근로능력평가 받아라, 노동능력 있으면 노동해야 한다, 노동하지 않으면 수급권 박탈한다’는 것이 현재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제1회 장애인 노동절을 맞아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 강혜민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그의 뒤로 “이것도 노동이다. 권리중심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5000개 보장하라!”고 적힌 피켓이 보인다. 사진 강혜민
- “권리중심일자리로 장애인도 일할 수 있다는 것 이미 증명했다”
장애계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동 기준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외쳤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이 사회가 우리의 몸에 맞지 않는 일을 주었을 뿐이지, 장애인도 당당하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권리중심공공일자리로 장애인도 일할 수 있음을 증명해왔다. 이를 통해 최중증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며 제도의 확장을 촉구했다.
실제 이날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가 함께했다. 김포장애인야학에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로 일하는 김희선 씨는 남양주에 있는 장애인거주시설 신애원에서 23년 살다가 탈시설했다.
김 씨는 “커다란 방에서 많은 사람이 같이 지내고, 글도 모르는데 성경 외우기를 시킨 시설 생활은 정말 끔찍했다. 수급비도 시설이 다 가져가서 탈시설할 땐 마지막 달에 받은 수급비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포장애인야학에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로 일하는 김희선 씨가 AAC(보완대체의사소통)로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탈시설 후, 일하려고 했지만 중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없었다. 시에서 하는 장애인일자리 면접에선 컴퓨터로 문서 작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급비 받아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수급비는 말 그대로 최저생활을 할 수 있는 비용이다.
작년부터 시작한 경기도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참여해서 지금은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식개선 캠페인을 하고 있다. 이 일자리는 장애인에게 최저임금을 준다. 덕분에 가끔 탈시설한 후배들에게 맛있는 걸 사주는 멋진 선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하다. 경기도는 올해 3월에야 사업을 시작했는데 12월이 되면 끝난다. 매년 사업기관을 새로 선발해서 내년에 제가 일하는 곳이 사업기관이 될 거라는 보장도 없다. 탈시설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시설 나오면 일 할 수 있어’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일자리 확대를 위해 열심히 투쟁하겠다.” (김희선)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이것도 노동이다. 권리중심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5000개 보장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이제 노동의 기준이 변해야 한다. 그 기준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장애인은 노동할 기회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더는 이대로 당할 수 없다”면서 “최중증장애인을 최우선으로 고용해서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 제1회 장애인 노동절을 시작으로 이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하겠다. 노동의 기준이 변할 때까지 투쟁하자”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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