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고통
2019101241 철학과 박석윤
우리는 왜 고통스러운 것일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고통이 실존의 구조 틀이라고 이야기하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유로움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일까?
에히리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을수록 더 많은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한 기회비용은 선택하는 주체에 있어서 피로함을 더하고 만족감을 저하시킨다. 만약 선택의 대상이 물건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가 얽힌 문제나 자신의 내면의 문제로 향할 때 선택의 문제는 단순히 피로감이 증가하고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표현할 수 없다. 수많은 관계 속에 얽혀있는 한 인간 내부에서 여러 가치 기준이 상충함은 그 자체로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는 문제이다. 이를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표현했고 키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포착하였듯이 어떠한 선택지를 원하든, 그 어떤 선택지도 원하지 않든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 차라리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었다면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을, 자유가 시지프의 바위처럼 나의 존재를 짓누르며, 나의 숨통을 옥죄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지가 적은 것이 더 나을까? 선택지가 적다는 것은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과 이어지며 이는 삶의 양식의 획일화를 야기한다. 교체 부품과 같이 규격의 통일화는 호환성을 높여 인류에게 편리함과 경제력을 가져다주었지만, 기술 발전을 통해 거의 모든 과정의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술이 그 기술의 주체인 인간을 사물화하였으며, 더 나아가 부품화에 이르게 하였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 없음이 존재를 더 강렬하게 드러나게 한다고 포착한 것처럼 자유를 선고받은 인간은 그 스스로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적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결국 현존재는 존재의 틀 안에서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운명과도 같은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니체는 그러한 운명을 사랑하라 하였지만, 자신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그는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아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카뮈처럼 실존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명을 사랑하거나, 절망할 수 있는 ‘자유’조차 희망을 위한 비약이었다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무엇을 딛고 설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발을 딛을 수 있는 지반이 필요하다. 너에게는 사랑과 도덕가 자유가 필요하고 나에게는 평생 닿을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죽인 신이 필요하다. 내가 바라보는 인간은 너무나 위태로워서 ‘그것’이 논리의 비약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필요로하며, ‘그것’은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
선택지가 많든 적든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선택지가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맞는 ‘중’을 이루면 되지 않을까? 이러한 유학의 방법론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겸손의 정신으로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일본의 식민사관에서는 조선 성리학이 파벌싸움을 통해 나라를 망하게 한 주요인이라 하지만 조선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동양의 순환적 세계관과 유가의 철학을 통해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사람들을 대동하게(조화로이 공존하게) 하였다. 유가의 순환론적 세계관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극에 달한 어떤 현상이 정반대라고 인식되는 현상의 시작과 이어지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주역의 관계론적 세계관에서 ‘중’은 불변하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관계 안에서 찾아가는 역동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어떠한 선택이 유교의 가치 표준인 ‘인의예지신’에 딱 들어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치 표준에 가까워지기 위한 과정으로 더 성숙한 결과를 선택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있다.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조화로움’과 ‘적당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조선 성리학 정신이 조선왕조 500년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조선 성리학의 바탕이 되는 중국 유학 또한 인간 사회에 ‘선’의 가치를 선사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인류 역사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현시대의 모습에서 선조들의 조화로움과 적당함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의 왜곡 과정에서 소실된 민족 철학이 원인이라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았던 유교의 낙관주의가 역설적으로 인권사상을 기반하여 신분제가 폐지된 현시대의 인간상과 맞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유가에서는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을 하거나 자기 일 밖의 것을 하는 것 또한 ‘적당함’에서 먼 행동인데, 과거 자신의 그릇과 역할이 태어나자마자 정해지는 신분제와 다르게 현시대에서는 자신의 그릇과 역할을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하여 ‘적당함’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알랭드 보통의 저서 <불안>을 통해 해석한 인간은 관계성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만약 비슷한 조건의 집단에서 어떠한 인물이 자신보다 조금 앞선다면, ‘내 그릇은 이 정도까지니 열심히 한 걸로 난 만족해’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불안의 구조는 비교를 부추기기 때문에 자신은 비교의 대상보다 뒤처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경쟁은 결과의 상향평준화를 일으킨다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불안의 구조가 개인에게 일으키는 감정은 일반적으로 질투, 혐오와 같은 시기심이다. 만약 어떠한 학생이 불안의 구조에서 벗어나 성적보다는 그 과정에 만족하고 자신의 그릇의 크기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부모가 ‘너 그릇이 이것밖에 안 돼?’라고 닦달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불안은 경쟁에 참여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경쟁을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구조를 확장한다. 이러한 예시처럼 유가의 방법론은 관계성 속에서 선의 지향성을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가의 가치 표준 자체를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나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 앞에서는 유가의 방법론은 다른 형태의 고통을 가져온다. 아무리 유가에서는 ‘인간다움’을 져버린 이들을 짐승과 다름이 없다고 볼지라도, 이 시대는 유가의 가치를 보편적 가치로 삼을 수 있을까? 정말로 유가에서 말한 선한 사람은 경쟁에서 벗어나 자족하며 살 수 있는가? 반대로 자족할 수 있어야만 선한 사람이라면 유가가 제시하는 선의 기준에 현대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인가? -문장에서 쓰인 자족의 의미는 자신의 그릇을 인정하고 그것에 맞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과 자유의 문제에서 불교는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 방식을 제시한다. 오온이 공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의 무의의성과도 연결해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세계의 무의의성에 자신의 실존을 기투하여 의미를 창조하는 ‘자유’에 대해서 말하였다. 카뮈는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가 세계의 부조리함을 초월하려는 비약이라 치부하였으나 본인도 역시도 세계는 부조리하니 질적 가치를 찾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부조리한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그것이 질적이든 양적이든) 자유에 의하여 고통스럽고 또한 자유를 위하여 고통스럽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고통에 벗어나기 위해서 자유조차 포기한다. 출가한 스님들은 살생할 자유도, 가정을 꾸릴 자유도 스스로 포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스님들이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부처를 따르는 길을 가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자유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오온이 공한것처럼 ‘자유’라는 것 또한 실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자유를 위해 고통을 감내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불교에서도 자유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통해 모든 것은 인식의 문제라고 깨달은 것처럼 자유가 있다고 인식한 자에게는 자유가 실재하는 것이고 자유가 허상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자유가 실재하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닌 믿는 대로 보이는 것이 된다. 이러한 불교의 인식론을 통하여 형이상학적 장치를 제거하는 동시에 자신의 욕망도 걷어낸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간단한 문제이다. 그것은 고통스럽거나 더 고통스럽거나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모두에게 덜 고통스러운 행위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이 우리에게 쉽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도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시로 우리는 배고픈 이웃보다 더 먼저 가족을 부양해야할 의무가 주어진다. 애인이 있다면 선의를 베풀 때 성별을 신경 써야 하며, 자신과 친한 사람의 편에 서주는 것을 의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넓은 범위에서의 공리주의 관점에서는 선한 행위가 아니지만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관계성 안에서 이러한 선의가 자신에게 향할 것을 요구하고 관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선의가 자신에게 향할 것을 요구하지 못하기에 박애보다 별애가 선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에서 성경을 따라 박애를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연인이 되는 것이 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연인은 별애 중 더 차별적인 별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공동체성을 강조하며 박애를 위해 헤어짐을 택하는 것 보다 별애 또한 박애의 형태로 사랑하라 주장한다. 반면에 불교의 방법론은 더욱 간단하다. 출가하면서 기존의 관계가 끊어지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스님들은 선택의 자유를 떠나 더욱 자유로운 실천을 하는 것으로 비친다.
첫댓글 제출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용을 구상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