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게 눈을 꿈뻑이다가 부스스 일어난다.
앞에는 자혜가 체중계 위에서 가벼운 균형을 잡고섰다.
널부러져 있었던 플스는 아침일찍 일어난 자혜가 정리했는지 모두 제자리를 찾아있고,
막 잠에서 깬 자신만이 소파밑에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자혜는 나무상을 폈다.
그앞에 선비다리를 하고 앉아서, 준승을 향해 '밥 차려와, 주인장!' 했다.
준승은 그러자, 울상을 해가지고 그 자리에 다시 누워버린다.
"아, 참! 지금 몇시지?"
누웠던 준승은 다시금 벌떡 일어났다.
"12시 넘었어."
"낮?"
"그럼 낮이지. 야, 왜. 우리 점심먹자."
"야, 상접어. 삼각김밥 사줄께. 우리 오늘부터 돈 벌어야돼, 그것도 지금 당장."
*
"석주형."
"어? 보컬은 저녁부터 새벽타임인데. 일찍나왔네."
"형, 그럼 나는요."
"넌 서빙이니까 하루죙일이고. 보컬은 저녁 여섯시부터, 어쩔래."
자혜는 벗으려던 자켓을 주섬주섬 다시 챙겨입고,
'저녁에 뵐께요.' 라는 말로 서둘러 가게를 나갔다.
"쟤 어디가"
"몰라요, 자기 비밀에 너무 많은 녀석이라. DVD방 갈라나? 영화 좋아하거든요."
"친한가보다?"
"그럼요, 아주 닮은 소꿉친군데요. 형, 저 뭐부터 해요?"
석주는 멀뚱하게 선 준승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저 애는 그렇다치고, 지낼만한 집도 있는 넌 왜 굳이 여기 있겠다는거야."
"말했잖아요, 친하다니깐요."
"네 형이 알면 참 좋아하겠다."
"형한테 말하지마요. 형은 이해심 별로 없으니까."
"몰라, 네 형 여기오면, 나 말 안한다고 장담 못해."
"쳇, 우리말을 왜 영어식으루 쓰고그래. 나도 유니폼이나 줘요. 빨랑 일하게."
"카운터 옆이야, 옷장."
웃음기없는 석주의 입술에서 재밌다는 투의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말수 적고 무뚝뚝한 제 형과는 닮은 구석이 개미 콧구멍만큼도 없는 녀석이다.
잘 나가는 동시통역사 형을 둔 덕에,
잘다니던 대학도 갑자기 뛰쳐나올 만한 경제력을 가졌다.
다만 학교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한학기 휴학계를 써버렸을 만큼 철도 없다.
좀처럼 남자다움도 없고, 학구열도 없는.
놀기 좋아하는 그냥 장난꾸러기이다.
뭐, 그여자에 측면에서 보면 의리하나는 봐줄만한 것도 같다.
"형, 나 멋지죠."
별로 근사하지도 않은 유니폼이 마음에 들어나보다.
준승은 어느샌가 웃으면서 석주에게 다가왔다.
석주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뭐, 별로' 그런다.
*
"학생, 여긴 또 왠일이야?"
"아줌마, 나 집 구했거든요."
자혜는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청소중이던 주인 아주머니는 자혜를 보고, 대번에 그런 물음만 내놓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혜는 그저 활발한 목소리를 낸다.
"응, 그거 잘됐네. 그럼 짐 가지러 온건가?"
"네, 그래서 왔어요."
"오늘은 어쩐일로 그렇게 고분고분해?"
"헤헤, 오늘 아줌마랑 마지막으로 보는 거니까, 나 지금 착한척 하는 거예요.
나 가면 아줌마 혼자 외로우니까."
"됐어, 하숙생이 너 하나뿐일까봐 그러냐. 빨리 짐 챙겨서 나가.
난 너 없어도 돈만 있음 잘 살거니께."
그리고 자혜는 침묵했다.
방바닥을 훔치다가 주인 아주머니는 자혜를 올려다본다.
"내가 돈 땜에 학생 내보내는 거 잘하는 짓은 아니지만,
난 정없고 돈 있어서 산 사람이여. 세월이 날 그렇게 만들었어."
자혜는 주인 아주머니의 주름진 뒷목을 잠자코 쳐다만 보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세월이 사람사는 맛도 만들었지요.
아줌마 뒷목이 그렇게 말해주네요, 그 주름이요.
그래서 우리 이렇게 살아있는 거라구."
아주머니는 이제 걸레질을 멈추었다.
자혜는 한구석에 쌓아뒀던 가방두개를 힘겹게 들어올렸다.
"밀린 방세는요. 조만간 드리러 다시 올께요. 그땐, 걸레질 말구 차라도 좀 줘요, 아줌마."
"그럼... 그러든지. 아이, 얼른가."
"네, 갈께요."
한적하던 마당에서 가방 바닥 끌리는 소리가 가득찼다.
자혜는 읏차, 하며 가방손잡이들에 힘을 꽉 주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담배가게가 있다.
자혜는 씨익 웃었다.
"할아버지, 저 담배 한갑요."
"어이, 학생왔구만. 어디가는가?"
"네, 해외여행가요."
"여행? 어디로 가는데? 학교는 어떡허구?"
"음, 땡땡이치구요. 히히, 프랑스 갈거예요."
"자, 받아. 오늘은 할멈 몰래 공짜로 줄께, 여행간다니까."
"고맙습니다! 선물 사올께용."
"그랴그랴, 얼른가봐."
자혜는 가방을 양 옆에 끼고 처마밑에 쪼그려 앉았다.
공짜로 얻은 담뱃갑 뚜껑을 열고, 한 개피를 뽑아드니까 별별 웃음소리가 다 새어나온다.
요게 그립긴 그리웠나보다.
'아, 고놈 잘 빠졌다' 중얼거리며, 자혜는 그것을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고 그 불을 이놈에게 갖다대고 한번 빨고 내쉬고.
그 연기가 되게 뿌옇게 흩어졌지만, 그래도 자혜는 마냥 웃었다.
..그저께는 엄마 전화를 받았다.
많이 웃고 있었던 엄마 목소리에서 그 표정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그려졌다.
같이 헤헤거리고 있었는데, 엄마는 속상하다면서 일하다 잘렸어.. 라고 하더라.
자혜는 속상해하지마라. 그러고, 다시 일 구할때까지 좀 쉬어라. 그러고,
사랑해. 그러고 전화를 그만 끊었다.
그리고 생각난 얼굴이 준승이 그녀석이었다.
그래서 자혜는 준승이 그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살 데가 없어지게 생겼다, 그러니까 준승이 녀석은 지방식으로 자혜를 도왔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말도 안되는 화를 내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못됐다."
자혜는 담뱃갑을 주머니에 잘 챙겨놓고, 벌떡 일어섰다.
별로 할짓도 없었다.
담배가게 안의 낡은 시계는 겨우 오후 두시반 정도를 지나고 있었다.
별 수 없이 자혜는 가방을 들고 DVD방으로 향했다.
*
"야, 이준승! 러브콜이다."
"뭐 어째?"
"저기저기."
준승이 돌아보니, 두 명의 여자, 두 명의 남자중에 한 여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준승이 조용히 다가가보니까, 그 여자는 같은 과였던 어떤 애였다.
짜증을 잘 부리고, 달리기를 잘했던.
"여기서 일해?"
"응, 돈이 궁해서."
"휴학했다며."
대답하기 전에, 앞의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어서,
준승은 '안녕하세요 이준승입니다' 했다.
그제서야 그 여자애는 제 친구들이라며 준승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준승은 그들에게 고개를 꾸벅하고,
자신을 유심히 훑어보는 여자애 옆의 한 남자와, 갑자기 눈을 맞췄다.
그러자, 여자애는 다시 물었다.
"휴학했다면서?"
"응, 사정이 있어서."
남자는 이제 준승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혜는 학교 계속 나오는 거 같던데."
"응, 걔는 휴학안했으니까."
여자애는 계속 미소하며,
"그래도 자혜 너 없이 혼자 다니니깐 안 어울려. 요즘 힘도 없단 말이야."
"응, 그런데 너 남자친구니?"
준승은 결국, 그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여자애는 말했고,
"뭐, 그럼말구."
그러자, 남자는 입을 씰룩거렸다.
여자애는 여전히 준승에게 시선하며,
"자혜는 같이 일 안해?"
"좀 있음 노래하러 올거야. 자혜 노래하는 거 보구가."
"응! 그럴께."
여자애는 웃었다.
남자는 갑자기 인상을 썼다.
준승은 그 남자가 참 이상하구나, 생각하며 뒤돌았다.
그 여자애의 이름은 유수영이었다.
사교성도 있고, 과 일은 도맡아서 하는 뭐 그런류의 착실하고 예쁜 여자애.
수영은 친하지 않지만, 자신에게 쉽게 말을 건다. 꼭 방금처럼.
준승은 씨익 웃었다.
친하지 않은 그 여자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계는 벌써 다섯시를 넘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