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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속죄일까지 참회의 10일을 갖는다
참조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716871?sid=103
탈무드에 따르면 ‘로쉬 하샤나’는 ‘여호와께서 심판을 시작하시는 날’이다. 여호와는 그날에 각 사람의 행실에 따라 책 세 권에 기록한다고 한다. 세 책이란, ‘의로운 자, 악한 자, 중간에 속한 자’를 기록하는 책이다. 의로운 자는 ‘생명책에 옮겨 적혀 영원히 살 것이라’ 기록되어 봉인되고, 악한 자는 사망록에 기록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책에도 기록되지 못한 어중간한 사람들에게 10일의 유예 기간을 준다. 10일 뒤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해와 욤 키푸르(대속죄일) 사이의 열흘을 “참회의 10일”이라고 부른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은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다.
2 이 기간에 지켜야 할 계명과 전통이 있다
첫째, 새해에는 나 자신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묵상한다. 이를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을 따로 정해 놓는다. 둘째, 나팔절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죄를 자백한다. 이후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가족, 친지, 친구들을 찾아가 구체적으로 용서를 구한다. 마음의 빚뿐 아니라 빌린 돈이나 물건도 이 기간에 다 갚거나 돌려주어야 한다. 셋째, 잘못한 사람이 찾아와 용서를 빌면 받아줘야 한다. 탈무드는 “용서할 때 삼나무처럼 뻣뻣하게 굴지 말고 갈대처럼 부드러워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남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중세의 유명 랍비 마이모니데스도 “율법은 사람이 고집이 세거나 완고해서 화해하지 못하는 것을 금한다"고 가르쳤다. 넷째, 대속죄일 전에 구제(자선)금을 따로 떼어놓는 전통이 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여호와와 맺은 관계가 단절된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구제는 이를 위한 선행 조건이 된다.
3 대속죄일은 1년 중 가장 엄숙하고 거룩한 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과 화해를 이룬 다음에야 비로서 대속죄일에 여호와께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탈무드는 ‘여호와께서 사랑과 용서로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에게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라고 요청하신다’고 가르친다.
또한 대속죄일은 성회를 열고 스스로 자신의 죄를 괴로워 하며 회개함으로 돌이키고 여호와께 용서를 받는 날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괴로워하지 않고 일함으로써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즉 유업에서 끊어질 거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1년 중 가장 엄숙하고 거룩한 날이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업을 얻을 수 없다. (레23:27-31)
4 용서하면 용서를 받는다.
예슈아께서 우리에게 용서에 대해 가르치셨다. 우리는 "저의 죄를 용서해주세요"가 아니라 "제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준 거 처럼 저를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한다. 그게 용서받는 방법이고 아버지의 뜻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신다. 그 말은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만큼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 이것이야 말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어쩌면 굉장히 쉽다. 내가 사랑받고 싶으면 이웃을 사랑하면 되고 내가 용서받고 싶으면 이웃을 용서하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어렵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하기 어려운 성품을 가졌다면 그도 하나님께 용서받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우리의 옛 사람은 죽어야하고 예슈아로 살아야 한다. (마6:9-15)
5 우리에게 매고 푸는 권세가 있다.
만약 형제 중 하나가 죄를 범하면 개인적으로 권고하고 그 권고를 들으면 형제를 얻겠지만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예슈아께서 가르치신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더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범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끊어지고 유업이 없다는 말과 같다. 교회에서 나가면 모두 지옥간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죄를 범한 자가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은 이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는 말씀이다. 이처럼 회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업을 얻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이것을 용서의 개념으로 보자. 죄를 범한 사람이 권고를 듣고 돌이키면 용서하지만 돌이키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즉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가 버린 것이 아니라 이들이 먼저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이처럼 우린 용서를 통해 땅에서 관계를 맬수도 있고 풀수도 있다. 동시에 하늘에서도 매고 풀수 있다는 말과 같다. (마18:15-18)
마찬가지로 예슈아께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성령의 일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용서를 받고 그대로 두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땅에서 매고 푸는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다. 모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자를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을 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이것을 분별할 책임이 성도들에게 있다. 풀어야 하는 관계가 있다면 매야하는 관계도 있다. (요20:22,23)
우린 항상 용서에 대해서만 가르친다. 그러나 매고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을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6 가정 폭력을 한 엄마를 어떻게 용서해야 하나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네이버에서 가지고 왔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폭력을 휘두르고 발로 밟고 따귀를 때리고 손에 잡히는 모든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후라이팬을 휘두르고 손톱으로 할퀴고 폭언과 욕설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린 그러한 부모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성경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 말은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 사람도 용서하려고 심한 가정 폭력에도 저항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려고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더욱 심한 괴롭힘이었다.
이 사람도 지옥가는 것이 싫어서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동학대와 가정 폭력에 대해 회개했느냐고 부모에게 물어보니 하나님께 수도 없이 했다고 말한다. 다만 당사자에게는 진심어린 사과가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도 부모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면 언제든지 용서할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는 아동 학대와 가정 폭력은 이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므로 정당한 폭력이었고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말한다고 한다. 오히려 못난 아이를 낳은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신세 한탄을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사람이라면 부모를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해야 할까?
여기서 이 사람은 한가지 의문을 제시한다. 분명 잘못은 부모가 했는데 피해자인 자신이 용서를 안하면 처벌을 받고 지옥에 간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잘못했는데 피해자가 용서를 못하면 지옥에 간다? 가해자인 부모를 용서 못해서 지옥에 갈거면 처음부터 그런 부모에게 안태어났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애초에 가정 폭력을 당할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억울하게 당하고 용서를 못해 지옥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너무 피해자들에게 가혹한 일이 아닌가?
이 사람은 용서의 문제를 두고 너무나 힘들어하고 있지만 정작 교회에 나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부모가 48년 교회를 섬기며 많은 봉사를 하지만 집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때 우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먼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용서는 회개한 자에게 해당된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킨 자가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시는 분이 시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는다면 용서받지 못할 뿐 아니라 거룩한 산에서 뽑힐 것이다. 용서할 수도 없다. 거룩한 산에 부패한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거룩하시다. 용서는 용서를 구하며 거룩함으로 돌이킨 자가 받을 수 있다. 돌이키지 않으면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 공의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하7:14-20)
그런 의미로 보면 이 부모는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고 아직도 딸을 탓할 뿐 아니라 아동학대가 정당한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용서를 구하는 자도 회개한 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용서할 방법은 없다. 다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뿐이다. 그가 한 악한 행동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이다 이것을 피해자가 갚을 필요는 없다. 당사자인 가해자가 갚는 것이 공의이다. 이처럼 용서는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어야 한다. 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해주는 것이 토라이다. 또한 자신이 잘못했다면 반드시 용서를 구하여 용서를 받는 것이 땅에 매인 것이 풀어지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스스로 낮추고 지혜롭게 용서를 구해야하며 그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달될 때 용서를 받을 수 있다. 만약 상대방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오히려 이 부모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 소자라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다. 그만큼 형벌이 크기에 그런 죄를 짓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게 나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지 않아서 용서를 하지 못할 지라도 미워하는 것이 허용된 것은 아니다. 죄를 혐오하나 영혼은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죄를 혐오하고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벌이 있는 것이다. 육체는 망할지라도 영은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르기 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막9:42)
7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갚다라는 말은 그만큼의 가치로만 보상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은 손해사정법에 사용하고 있다. 손해를 끼친 만큼 보상하는 것은 당연한 공의이다.(출21:23-25)
요즘 인권이라고 해서 3~4명을 죽여도 심지어 연쇄 살인을 해도 사형시키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왜냐하면 살 권리를 감히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 범죄자라 할지라도 살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인권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3~4명을 죽여도 그 가치가 감옥 25년정도라면(우리 나라 최고형이 무기징역이다 무기징역이면 20년이 지나면 슬슬 나오기 시작한다. 기한이 없을 뿐 20년이 지나면 가석방 절차를 대부분 받는다.) 인권이 없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4명이 25년이라면 한 사람의 인권이 6년정도라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진짜 인권 국가라면 인간을 죽이는 자에게 죽음으로 갚게 하는 것이 진짜 인권을 중시하는 인권 국가가 아닌가?
우린 환상에 젖어있다. 법의 처벌이 가벼워질 수록 사랑이라고 보는가? 법은 악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법의 처벌이 가벼워 질수록 범죄자들만 기쁘게 할 뿐이다. 어차피 법없이 사는 사람들은 처벌이 무겁든 가볍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죄에 대한 형벌을 낮추면 낯출 수록 강력 범죄만 늘어날 뿐이다. 법은 범죄자들 때문에 존재함으로 죄를 두려워하게 하여 예방하는데 집중해야한다.
진짜 회개는 기꺼이 형벌을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거기서 용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합당한 형벌을 받게 도와주어야 용서할 힘이 생기고 결국 용서받는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8 우리가 죄인인데 누구를 처벌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슈아께서 음행한 여자를 심판하지 않으신 거 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율법을 폐하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모든 범죄자들을 처벌하지 말고 풀어주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오히려 간음에대해 율법의 깊은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고 간음이 죽을 죄이나 회개에 목적을 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간음하는 모두를 돌로 쳐 죽인다면 인류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앞에 영적 간음의 문제, 우상 숭배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이 죄에 대해 싸워야 할 것이다. 물론 성범죄자를 풀어주라는 말은 아니다. 죄의 경중에 따라 법의 적용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어쨋든 이 말씀은 율법의 깊은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지 범죄자를 처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이므로 동성애를 한들 뭐라할 수 있겠느냐는 말은 듣기에는 그럴 듯 하나 공의를 무너뜨리는 불의한 자의 말일 뿐이다.(요8:5-11)
9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시고 의로우시다.
회개의 마지막 날인 대속죄일이 지나면 심판이 시작된다. 이는 일곱 대접 심판이다. 첫째 심판은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한 종기(궤양)가 난다. 둘째 심판은 바다가 피같이 되어 모든 바다 생물이 죽는다. 셋째 심판은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된다. 그러면서 물을 차지한 천사가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시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에 이들이 피를 마시는 것은 합당하기 때문이다. 심판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불려지자 대부분의 성도들이 목베임을 당해 순교했다. 하늘 제단도 말하기를 여호와의 심판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다라며 화답하고 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원수를 갚아주시는 공의가 있기에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숨 쉴 수 있는 것이다. 북한 성도들이 끔찍한 고문과 학대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순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선행을 보상해 주실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많은 성도를 죽이고 있는 김정은 정권에게 원수를 갚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참되시다.(계16:2-7)
10 비방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
넷째 심판은 해에서 불이 나와 사람을 심하게 태운다. 이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섯째 심판은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고 표를 받은 사람들이 종기로 인해 아파서 혀를 깨물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악행을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여섯째 심판은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배되어 아마겟돈 전쟁이 예비될 것이다.(계16:8-16)
11 마지막 7번째 심판은 바벨론의 멸망이다.
일곱째 심판은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사람이 땅에 있어온 이래로 이같은 지진이 없을 것이다. 바벨론 큰 성이 세갈래로 찢어질 것이며 섬도 없어지고 산도 없어질 것이다. 또한 한 달란트나 되는 우박이 내림으로 그 재앙이 심히 커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방할 것이다. 이 심판을 받는 자는 음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들의 어미로서 비밀이며 큰 바벨론이다.(계16:17-21 계17:1,5)
12 바벨론에서 나와라
놀라운 사실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을 때 음성이 들리기를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백성이 바벨론에 참여하여 음란하게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도 교회중에 성도중에 음녀 바벨론에 참여하여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두려운 것은 바벨론이 지은 불의한 일을 기억하시고 갑절로 갚게 하신다는 것이다. 음녀 바벨론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가톨릭이며 교황청이다. 음녀 바벨론과 함께 연합한다면 그 죄에 참여한 자가 되어 함께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 마지막 때는 음녀 바벨론을 분별하고 그들에게서 나와야 하는 때이다.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은 그들의 왜곡된 가르침을 거절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계18:2-6)
13 심판과 함께 예슈아의 결혼식이 준비되다.
하늘로 부터 백마를 타고 오신 예슈아께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짐승 곧 적그리스도가 잡히고 거짓 선지자도 잡혀 산채로 유황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이때 옳은 행실로 옷을 입은 신부들과 예슈아께서 마침내 혼인할 때가 이르게 된다. 즉 대속죄일 이후의 심판이 집행되고 예슈아와 혼인하고 대관식을 하는 초막절 시즌으로 접어들게 된다. (계19:7-21)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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