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커다란 대만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북한의 대남(對南) 방송을 받아적던 청년이 있었다. '김영삼 독재 정부의 국민에 대한 탄압이 거세다. 타도 투쟁을 벌여라.' 당시 북한의 남한 내 지하당인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산하 RO(혁명조직)의 교육선전국장이었던 그는 남한 사회를 선동하는 내용이나 김일성 회고록, 주체사상 강좌 등이 담긴 대남방송을 기록해 자료로 만들고 자신이 속한 RO에 배포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그는 정반대의 일을 한다. 북한 주민에게 바깥소식을 전하고 김씨 세습왕조 체제의 부당함 등을 일깨우는 대북(對北)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한다. 주사파에서 북한 민주화 운동가로 반전(反轉)의 인생을 살고 있는 이광백(45) 국민통일방송 대표다. 국민통일방송은 자유조선방송·열린북한방송 등 기존의 대북 방송국과 북한 관련 정보를 전하는 인터넷 매체 데일리NK가 작년에 통합해 출범했다.
14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국민통일방송 스튜디오에서 만난 이 대표는 "북한 사회를 바꿀 최적의 수단이 방송이라는 믿음으로 대북 방송 송출을 시작한 지 올해로 만 10년"이라며 "인권이나 저항 같은 개념을 모르는 북한 사람들에게 시민 의식을 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1997년 민혁당에서 빠져나왔다. 1989년 원광대 법학과에 입학해 9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칠 때쯤이었다. 수도권·전북·영남 등 민혁당 3개 지부 중 '강철서신'을 쓴 김영환씨가 관리한 전북 지부에 속했던 그는 김씨의 전향(轉向)에 영향을 받았다. "사람이 이념에 눈이 멀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이데올로기의 맹인(盲人)'이 되는 거지요. 제가 그랬어요. 김일성이 잔인한 독재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거죠."
이 대표는 "잘못된 일을 해왔고, 믿었던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허무함이 밀려왔다"고 했다. 전주에서 시민운동가로서 예산 감시 활동 등을 폈지만 신명이 일지 않았다. 자신이 잠시 홀렸던 북의 정체를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기 위해 2005년 열린북한방송에 송출 담당으로 들어갔다. "독재와 폭력, 가난에 고통받는 북한 동포를 위해 일하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처음의 내 각오에 부합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북한 인권과 민주화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만드는 콘텐츠는 다양하다. 국제사회와 남한의 뉴스를 전하고 북한 내 강제수용소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사연을 담은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한다. 황장엽 회고록을 낭독하고 아이돌 가수들이 부르는 케이팝이나 드라마 OST도 들려준다. 최근 1년 내 탈북한 젊은 탈북자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도 했다.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가장 많이 본 TV프로그램 순위를 뽑았는데 1위가 '미생', 2위가 '응답하라 1994', 3위가 '꽃보다 할배'였어요. 예전에는 남북한 간 유행에 시차가 있었는데 이젠 그게 무너진 거죠. 이런 게 다 대북 방송의 힘인 거죠."
운영은 쉽지 않다. 직원은 이 대표와 기자·PD·작가 등을 포함해 30여명에 불과하다. 전파는 가장 큰 문제다. 정부에서 전파를 할당받지 못해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 송신소에 연간 약 3억원을 내고 방송을 송출한다. 이 대표는 "남한에서 송출하면 출력을 끌어올릴 수 있어 북한 주민들이 더 크고 선명한 음질로 들을 수 있다"며 "통일 시대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정부와 정치권이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간 운영비 약 12억원 가운데 송출비·인건비·유지비 등을 제하고 나면 제작비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루 3~4시간밖에 방송하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지원은 없다. 미국 의회가 예산 지원을 하는 민주주의진흥기금이 지금으로선 생명줄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지난해 말'통일방송친구들' 후원 캠페인을 시작했다. "아직은 후원자가 370명에 불과합니다. 제 목표는 1만명을 모으는 거예요. 시민 모금으로 제작한 방송이 북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뜻깊겠습니까. 많은 분이 취지에 동참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