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서 소녀의 파란 눈이 특히 빛나는 사진을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마치 깊고 푸른 바다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 깊은 곳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깊은 바다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일일이 알 수는 없어도 짐작은 합니다. 소녀의 눈빛을 보며 그런 상상을 합니다. 도대체 저 속에 무슨 생각들이 들어있을까? 그런데 소녀의 그 깊은 속을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가족도 이웃도 잠시 함께 해주던 친척 가족도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 자식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냥 하루하루 살기 바쁩니다.
‘통 말이 없는 아이로군요.’ ‘그래도 할 말은 해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디에서도 정말 말이 없습니다. 하기는 그다지 말할 필요가 없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때로 질문에 대답은 합니다. 말을 못하고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서서 말을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대사 중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침묵할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었단다.’ 우리네 대화 중에 꼭 필요한 대화는 몇 %나 될까요? 물론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대화만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꽤나 삭막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를 하며 친분도 쌓고 서로를 알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로 인하여 화를 당하는 경우도 봅니다.
때로 세상 참 불공평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원하는 가정에는 없고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싶은 가정에는 계속 생깁니다. 거참! ‘코오트’의 집에는 코오트의 형제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또 임신하여 출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줄줄이 있으니 엄마 혼자서 가정을 꾸려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도와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말썽이나 부리고 술이나 마시고 도박에 빠져 있습니다. 그야말로 도움은커녕 해나 끼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식들을 아끼고 잘 돌봐주는가? 아닙니다. 어찌 보면 귀찮아하는 모습입니다. 코오트를 맡기러 가면서도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원하면 계속 데리고 있으라고 그래.
아무리 가족이 따돌리며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아도 그래도 가족입니다. 그중 엄마는 자식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합니다. 환경이 따르지 않아서 방학 동안만 맡기는 일이지만 마음이 아픕니다. 두 부부만 살고 가정형편도 한결 나으니 코오트가 잘 지내리라 믿습니다. 기꺼이 승낙해준 것만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코오트는 낯선 집으로 옮겨옵니다. 자기가 원한 것도 미리 안 것도 아닙니다. 어느 날 방학과 함께 맡겨져서 이사(?)온 것입니다. 부모와 비슷한 연배의 두 부부가 사는 곳입니다. 처음 보는 부인이지만 매우 반갑게 맞아줍니다. 그런데 남자는 아빠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습니다. 말이 없고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표정도 없습니다.
가지고 온 옷은 입고 있는 것뿐입니다. 부인은 가지고 있던 옷을 찾아줍니다. 그런 대로 입을 만합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얼마 전에 사고로 죽은 자신의 아들 옷입니다. 그만한 때야 남녀 구분 없이 입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처음으로 바지를 입어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일하기는 그게 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갑니다. 아주머니는 이야기도 해주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코오트는 집에서보다 말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아마도 아저씨 ‘션’이 ‘그래도 할 말은 하는 아이’라고 동네 사람에게 대답한 근거이기도 합니다. 코오트의 표정이 한결 밝아집니다. 아주머니 따라 요리도 돕고 아저씨를 따라 농장 일을 돕기도 합니다. 그리고 두 어른에게서 자기 엄마 아빠와는 사뭇 다른 부부의 모습도 봅니다.
말이 없던 아저씨도 말을 붙입니다. 농장 일을 하면서 같이 있는데 말이 없을 수는 없지요. 때로는 아주머니가 볼 일 보러 외출한 사이 두 사람만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뚝뚝하지만 션이 먼저 나가면서 주머니에 감추어 두었던 과자를 식탁에 남겨줍니다. 코오트가 얼른 집어 듭니다. 두 사람의 정이 나타나는 증표이지요. 그렇게 농장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면서 시간은 흐릅니다. 주일미사에 가야하는데 입고 온 그대로 교회에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해서 시내에 함께 나가 새 옷도 사줍니다. 가게 주인은 딸로 착각을 합니다. 아주머니의 마음이 싱숭생숭할 것입니다. 어쩌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이미 출산도 하여 코오트에게 또 남동생이 생겼답니다. 아무튼 곧 개학이니 집에 돌아가야 합니다. 뜻하지 않게 감기가 걸린 코오트를 보며 아빠는 감사는 고사하고 불만을 토합니다. 그런 아빠의 눈을 피합니다. 션 부부는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코오트와도 작별 인사를 하고 차를 타고 돌아갑니다. 그 뒤를 갑자기 코오트가 뜀박질하며 쫓아갑니다. 차에서 잠시 내려 울타리 문을 열고 있는 션에게로 달려가 안깁니다. 뒤에서 아빠가 쫓아옵니다. 그런데 코오트가 션에 품에 안겨 가만히 부릅니다. ‘아빠!’ 누구를 부르는 소리일까요? 영화 ‘말 없는 소녀’(The Quiet Girl)를 보았습니다. 2021년 아일랜드 작품입니다. 누가 가족인지, 누가 가족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