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운철 마르첼리노 신부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루카 8,19-21
‘생뚱맞다.’라는 말은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에 쓰이는 우리 고유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생뚱맞은 말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는 말 이제 지겹습니다. 좀 고만 좀 하이소.’ 그래도 ‘사랑하라.’였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가르침을 늘 주시던 예수님께서 생뚱맞은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루카복음 12장 51절에서 53절까지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사랑과 분열은 서로 반대되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정말 생뚱맞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본당에서 한번은 이런 신자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매님이셨는데 애 아빠는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매님이 성당 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은 미사에도 남편 몰래 나오고 집에 머슴애가 둘 있는데
아빠는 아이들이 성당에 나가는 것도 싫어해서 그 아이들도 아버지 몰래 미사에 나왔었습니다.
근데 큰애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니까 그제야 첫영성체를 시키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것도 그 자매님이 첫영성체가 너무 늦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데려 오셨고
하는 김에 3학년인 동생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 하면서 두 형제를 같이 데려왔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애 아빠 모르게 하는 겁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지도 못 하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지요.
그러면 어느 쪽이든 한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신앙도 그런 면이 있는 모양입니다.
선택이라는 것 말이지요.
우리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은 버린 다는 것을 함께 뜻 합니다.
신앙을 선택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버렸습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을 버렸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가족까지도 신앙 앞에서는 무감각하게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에 대한 애정까지 버린 것은 아닙니다.
가족도 물론 사랑하지만 하느님을 가족 위에 계신 분으로 섬겼다는 것이겠지요.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그 자매님은 신앙과 남편이 모두 소중했기 때문에
그렇게 남편 몰래 신앙생활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신앙을 남편보다는 더 위에 두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 누가 찾아오셨습니까?
당신의 어머니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곧장 달려 나가는 것이 도리일 텐데. 이번에 예수님은 또 생뚱맞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위에 두셨습니다.
당신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보다도 위에 두셨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실 때
성모님의 슬픈 모습을 뒤로 하고 골고타로 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선택 때문에 우리가 희생도 치르고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으로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선택 이전에 당연한 것이지요.
여러분들의 삶 안에서도 많은 갈림길에 서서 어느 쪽을 가야하나 고민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선택하고 싶지만 언제나 망설입니다. 우리 욕심 때문에요.
그때 내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아마 그 순간에는 아쉽고 서글플지라도 그 시간이 지나면
큰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올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장운철 마르첼리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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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에즈라 6,7-8.12ㄴ.14-20 루카 8,19-21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된 계약의 궤는 다윗 왕조를 지켜 주는 표징이었지만,
이스라엘이 하느님 말씀보다 우상 숭배에 빠지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아
바빌론 유배의 아픔을 겪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되찾아 주고 성전을 재건하는 기쁨을 줍니다.
파스카 축제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약과 말씀을 되찾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을 때,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속마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고 선언하시어 선택과 혈연이 아닌 믿음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누군가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단순히 혈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신 신앙의 모범이심을 암묵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태중에 모시고,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고 곰곰이 숙고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옵니다.
나는 얼마나 성경 말씀을 듣고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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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에즈라기 6,7-8.12ㄴ.14-20 루카 8,19-21
"안에" 머물러야...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범주에 넣어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시는 내용이다.
복음의 같은 내용을 마태오와 마르코도 보도하고 있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그런데 이 병행대목들의 배치(配置)가 루카복음과는 다르다.
마르코복음은 이 대목을 전하기에 앞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3,21)고 함으로써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예수가 미쳤다는 말은 예수께서 혹시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모함에 의한 것이다.(마태 12,24; 마르 3,22)
루카복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범주에 넣기 위해서
루카가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보도한 하늘나라의 신비에 관한 비유,
즉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가 "하느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11절)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되는 것이다.(15.18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서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므로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가족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과의 가족관계는 이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시하는 가족관계는 혈통이나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점을 나자렛에서 온 예수의 형제들은 배워야 했던 것이다.
성모님은 예외이다. 성모님은 벌써부터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자렛의 형제들은 예수를 만나보기 위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일찍이 예수를 눈으로 보았으나(4,20),
예수의 실체를 보지 못한(4,22-23) 사람들이 아니던가?
예수 당대의 사람들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밖에"(20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으신다.
보려는 사람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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