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정보
1)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鼎立)하여 서로 항쟁하던 시대. 대략 4세기 초∼7세기 중반까지를 말한다. 삼국이 고대왕권의 기반을 형성한 것은 고구려는 6대 태조왕대(53∼145)이며, 백제는 8대 고이왕대(234∼285)이고, 신라는 17대 내물마립간대(356∼401)부터이다. 이전의 족장세력들의 지배가 계속되던 시기인 서력기원 전후부터 300년 무렵까지를 <원삼국시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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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鼎立)하여 서로 항쟁하던 시대. 대략 4세기 초∼7세기 중반까지를 말한다. 삼국이 고대왕권의 기반을 형성한 것은 고구려는 6대 태조왕대(53∼145)이며, 백제는 8대 고이왕대(234∼285)이고, 신라는 17대 내물마립간대(356∼401)부터이다. 이전의 족장세력들의 지배가 계속되던 시기인 서력기원 전후부터 300년 무렵까지를 <원삼국시대>라고 한다.
1 삼국의 성장
원삼국시대부터 철기문화의 급속한 보급으로 생산력이 증대되고 새로운 전술인 기병전(騎兵戰)의 등장으로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고대왕권이 성립되었으며 강력한 지배체제가 마련되었다. 고구려는 교통요충지대인 동가강유역과 압록강본류의 중류지역 통구(通溝) 일대에서 성장하여 중국세력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발전하였다. 태조왕 때에는 옥저(沃沮)를 정벌하여 동해안으로 진출하였고 요동지방을 계속 위협하였으며, 311년(미천왕 12)에는 서안평(西安平;지금의 鳳凰城)을 확보하고 313년에 낙랑군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세력을 몰아내고 영토를 넓혀 나갔다. 백제는 한강유역에 터를 잡고 출발하여 마한세력을 통합하면서 발전하였다. 고이왕 때에 한강유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고, 근초고왕 때에는 마한을 정복하고 남해안으로 진출하였으며, 밖으로는 동진(東晉) 및 왜(倭)와 교섭하였다. 신라는 3세기 초 부족연맹체를 이루어 낙랑군과 연결된 부족들이나 가야·백제 등과 자주 충돌하면서 성장하였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사회발전은 다소 늦었으나 내물마립간 때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기 시작하고, 고구려를 통해 전진(前秦)과 교섭하면서 성장하였다.
2 대외관계의 전개
삼국이 발전해가던 시기의 중국은 위(魏)·촉(蜀)·오(吳)의 삼국 및 남북조(南北朝)의 분열기를 거쳐 수(隋)·당(唐)의 통일왕조에 이르는 시기였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중국의 침략세력에 맞서 항쟁하였다. 고구려는 낙랑군을 멸망시켜 한(漢)나라의 식민지세력을 몰아냈으나, 4세기에 강력한 5호16국(五胡十六國)의 정복사업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연(燕)나라를 멸망시킨 전진과 친교를 맺고 난국을 면한 뒤 내치에 힘을 써,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에는 많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백제는 그 발전과정에서 랴오시[遼西]·산둥[山東]지방까지 진출하여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였으며, 웅진(熊津)으로 천도한 뒤에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중국이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는 동안 고구려는 북조(北朝)의 위나라와, 백제는 남조(南朝)의 송(宋)·양(梁)나라 등과 연결되어 동양의 국제관계는 북위·고구려·신라를 연결하는 세력과 송·백제·왜의 연결세력이 대립하였다. 이러한 국제관계에서 전개되는 삼국의 관계사는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 기는 고구려가 소수림왕 때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삼국항쟁의 주도권을 잡은 5세기이고, 제 2 기는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고 한강유역까지 진출하는 6세기이며, 제 3 기는 신라가 수·당나라와 연결하여 삼국을 통일하기까지의 7세기이다. 중국의 왕조는 통일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여 여·수전쟁과 여·당전쟁이 70년간 계속되었다. 그 파동은 한강유역에까지 미쳐 삼국의 세력다툼이 치열하였는데, 신라가 당나라와의 외교에 성공, 나·당연합군을 이루어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3 삼국의 사회
고대 삼국사회는 왕족을 비롯한 귀족세력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인 특권을 누렸다. 귀족들은 농지·목장·광산·산림 등을 소유하였고, 일반 평민과 천민인 노비 등은 생산활동에 종사하였다. 고구려는 왕족인 고씨와 5부 출신의 귀족들이 지배계층으로서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하였다. 귀족계층인 족장이나 성주들은 모두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율령을 제정하였다. 일반 백성은 대개 농민들로서, 이들의 대부분은 자영농민이었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고, 일반 백성은 대부분 농민이었으며, 그 밖에 천민이나 노비도 다수 존재하였다. 신라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김씨왕족이 왕위를 세습하였는데, 김씨왕족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폐쇄적인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를 마련하여 통치기반을 구축하였다. 골품제도는 각 족장세력을 통합·편제한 것으로, 그 세력의 정도에 따라 4·5·6두품의 신분을 주었으며, 진골과 성골은 왕족이었다. 한편 족장세력의 통합과 이에 상응하는 수취체계의 재정비과정을 통하여 성립된 삼국의 지배체제는 주로 회의제도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고구려에는 초기에 대가(大加)의 모임인 제가회의(諸加會議) 전통이 후기까지 계속되었고, 신라에는 화백제도(和白制度)·남당제도(南堂制度)·사령지회의(四靈地會議) 등이 있어 회의제도의 비중이 컸다.
4 삼국의 문화
삼국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문화의 폭이 넓어졌고, 국민사상이 통합되어 국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삼국의 불교는 토착신앙을 포섭하는 방향에서 전파되었으며, 고구려의 낭법사(朗法師), 백제의 겸익(謙益), 신라의 원광(圓光)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한편 삼국시대 한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한문이 사용되어 사서 《유기(留記)》가 있었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하였으며, 신라는 545년(진흥왕 6)에 《국사》를 편찬하였다. 금석문으로서는 고구려의 것으로 광개토대왕비·고구려중원비 등이 있고, 신라의 것으로는 단양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순수비 등의 비문이 남아 있으며, 백제의 것으로는 말기의 것으로 보이는 사택지적비문이 있다. 삼국시대의 예술, 특히 미술활동은 주로 고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은 석총과 토총이 있는데, 석총으로는 장군총이 유명하며, 토총의 대표적인 것의 하나로는 내부에 사신그림[四神圖]이 그려져 있는 강서고분이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도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사신그림 외에 당시의 생활풍속이나 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고, 수렵이나 전쟁의 모습을 그린 것도 있다. 백제의 고분으로는 서울 석촌동(石村洞)에 있는 한성시대의 고분인 돌무지무덤[積石塚], 웅진시대의 고분인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과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塼築墳]이 있다. 석탑으로는 목조탑의 건축양식을 모방한 초기형식의 익산(益山)미륵사지 석탑이 있고, 균형이 잡힌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부여(扶餘)정림사지 5 층석탑 등이 유명하다. 신라의 고분양식으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독무덤[甕棺墓]·돌방무덤[石室墳] 등이 있으며, 건축물로는 분황사(芬皇寺)석탑과 첨성대(瞻星臺), 황룡사(皇龍寺) 9층목탑 등이 있다.
2) 중국 3세기에 위(魏)·오(吳)·촉(蜀) 등 세 나라가 정립(鼎立)했던 약 40년간의 시기. 후한(後漢)의 혼란기에 각지방의 독립적인 세력 가운데 조조(曹操)는 후한의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허베이[河北] 통일에 성공했으며, 208년 남하(南下)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유비(劉備)·손권(孫權)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북으로 돌아갔다. 한편, 적벽의 싸움 뒤 유비와 손권은 형주(荊州;湖北·湖南) 및 익주(益州;四川)의 영유(領有)를 둘러싸고 싸웠는데, 결국은 유비가 익주를, 손권이 형주를 수중에 넣었고, 손권은 원래의 지배지였던 양저우[揚州;江蘇·浙江]와 함께 양쯔강[揚子江] 이남을 영토로 확보함으로써 삼국정립이 완성되었다. 220년 11월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뤄양[洛陽]에서 헌제의 양위로 위나라를 개국했는데, 유비도 이듬해 4월 청두[成都]에서 즉위함으로써 촉한(蜀漢)이 성립되었다. 손권도 별도로 연호를 정했으며, 229년 건업(建業;南京)에서 즉위하였다. 이 세 나라는 초기에는 위·오와 촉이, 225년 이후에는 위와 오·촉이라고 하는 대립을 주축으로 해서 움직여 나갔으나, 234년 제갈량(諸葛亮)이 죽은 뒤에는 큰 대립이 없었다. 263년 위나라는 촉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정립시대는 끝났으나, 265년 위나라도 진(晉)나라 무제(武帝)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280년 무렵 오나라도 멸망하였다. 삼국시대를 끼고, 한과 진·남북조(南北朝)를 비교해 보면, 사회나 경제·문화 등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볼 수가 있다. 먼저, 한나라에 의한 통일지배가 붕괴되고 복수의 왕조가 존재하는 분열시대가 생겼고, 중앙의 관제(官制)로는 상서성(尙書省)·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이 형성되어서 발전했다. 또한 관리등용법에서는 위나라 성립시기에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이 시행되어 한나라 때의 향거리선(鄕擧里選)으로 바뀌었으며, 또한 그 운영면에 있어서 귀족제를 완성하였다. 토지제도에서는 조조가 본거지인 허(許;河南省許昌)에서 민둔(民屯)을 열고, 주인이 없는 토지를 백성에게 경작시켜서 소작형태를 취하였는데, 그것이 위나라 일대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진나라 때의 점전(占田)·과전제(課田制)로 전개되어 나갔다. 또한, 병제(兵制)에서 위나라는 병호제(兵戶制)를 단행해서 병사들을 일반 호적에서 분리하고 그 신분을 세습시켰다. 오나라에서는 봉읍제(奉邑制)를 채택해서, 여러 장군들에게 군대를 양성하는 봉읍을 주었다. 문화면을 보면, 유교(儒敎)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노장사상(老莊思想)이 중시되어 청담(淸談)이 이루어졌다. 오두미도(五斗米道)나 불교도 차츰 교세를 넓혔으며, 문학과 그 밖의 예술도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
5 연표
BC 57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거서간 즉위. 국호 서나벌, 왕호 거서간
37 신라 금성 축조. 고구려 건국. 시조 동명성왕 즉위
19 고구려 유리왕 즉위. 석탈해 탄생
BC 18 백제 건국. 시조 온조 즉위
AD 3 고구려 국내성 천도. 위나암성 축조
4 신라 남해차차웅 즉위
32 신라 6부 이름 새로 정하고 성을 내림. 17관등 제정. 백제, 남쪽지방에 처음으로 쌀농사를 짓도록 함
42 금관가야 건국. 시조 수로왕 즉위
56 고구려 동옥저 점령
65 신라 김알지 탄생. 국호를 계림으로 고침
67 신라 전국을 주·군으로 나누고 주주와 군주 설치
85 백제 신라 변경 침공
96 가야 신라 남부지역 침공
101 신라 금성 동남쪽에 월성 축조
105 고구려 한의 요동 6현 공격
106 신라 가야 공격
121 신라 왜구 침입
124 고구려 후한에 사신 파견
132 백제 북한산성 축조
138 신라 금성에 정사당 건립
191 고구려 을파소를 국상(國相)으로 삼음
194 고구려 진대법 실시
198 고구려 국내성(환도성) 축조
199 금관가야 거등왕 즉위
208 백제 병충해와 가뭄으로 흉년이 들고 도적떼가 일어남
209 고구려 국내성 천도
239 고구려 위나라의 요동지방 공격
242 고구려 요동 서안평 공격
246 고구려 위의 관구검 등이 침공해 크게 패함
247 고구려 평양성 축조
249 신라 궁궐 남쪽에 남당 건립
259 가야 마품왕 즉위
260 백제 율령 반포. 6좌평·16관품·공복제도 제정
285 백제 박사 왕인이 왜에《논어》《천자》를 전함
291 금관가야 거질미왕 즉위
311 고구려 서안평 점령
313 신라 가뭄과 병충해로 기근이 심하여 구휼. 고구려, 낙랑군 점령
346 금관가야 이시품왕 즉위
371 백제 고구려 평양성 공격. 고구려, 고국원왕 전사.
372 고구려 태학 설립. 중국 전진의 승려 순도, 고구려에 불교 전래.
373 고구려 율령 반포
375 고구려 불교 공인. 백제,《서기》편찬
377 신라 중국 전진에 독자적으로 사신 파견
384 백제 중국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 전래
391 고구려 광개토왕 즉위. 처음으로 연호(永樂) 사용
407 금관가야 좌지왕 즉위
414 고구려 광개토왕비 건립
421 금관가야 취희왕 즉위
427 고구려 평양 천도
433 신라·백제 나제동맹 체결
449 고구려 중원고구려비 건립
451 금관가야 질지왕 즉위
470 신라 삼년산성(三年山城) 축조
475 고구려 백제 수도 함락시키고 개로왕 죽임. 백제, 문주왕 즉위. 웅진 천도.
492 금관가야 겸지왕 즉위
502 신라 주군에 농업을 권하고 처음으로 우경(牛耕) 실시
503 신라 국호 신라, 왕호를 왕으로 고침
512 신라 이사부, 우산국 정벌
520 신라 율령 반포·공복 제정
521 금관가야 구형왕 즉위
527 신라 이차돈 순교. 불교 공인
532 금관가야 구형왕, 신라에 항복
536 신라 처음으로 연호(建元) 사용
538 백제 사비 천도, 국호 남부여. 관부를 내관 12부·외관 10부 등 22부로 정비
545 신라 거칠부 등이《국사》 편찬
551 나제연합군 고구려를 공격해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 차지하고, 신라는 죽령 이북 10개 군 점령.
신라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침. 단양적성비 건립
552 백제 노리사치계, 왜에 불교를 전함
553 신라·백제 나제동맹 결렬
555 신라 진흥왕, 북한산에 북한산순수비 건립
561 신라 진흥왕, 창녕에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신라 이사부 등이 대가야 정벌
568 신라 진흥왕, 황초령순수비와 마운령순수비 건립
576 신라 원화제도(화랑제의 전신) 실시
586 고구려 평양 대성산에서 장안성으로 천도
598 고구려 요하에서 수나라 1차 침입 격퇴
600 고구려 이문진, 국초의《유기》100권을 개수하여《신집》5권 편찬
612 고구려 을지문덕, 살수에서 수나라 2차 침입 격퇴(살수대첩)
613 고구려 수나라 3차 침입 격퇴
631 고구려 천리장성 축조
632 신라 선덕여왕 즉위
634 신라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침
642 백제 신라 대야성 점령
645 고구려 안시성 싸움에서 당군 격멸
647 신라 비담과 염종의 반란. 세계 최고(最古)의 천문대 첨성대 건립
651 신라 집사부 설치
654 신라 태종무열왕 즉위(최초의 진골 출신 왕)
659 신라 백제를 치기 위해서 중국의 당나라에 원병 요청
660 백제 나당연합군에 항복. 백제 멸망
661 백제 복신·도침·흑치상지, 왜국에 있던 왕자 부여풍을 맞이하기로 하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백제부흥운동 펼침.
662 고구려 연개소문, 사수에서 당군 격퇴. 탐라, 신라에 항복. 복신, 당군에게 패배.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고 고구려와 왜에 원병 요청
663 신라 남산신성 축조. 백제 유민, 신라와 당 침략군에 항거하여 웅진성·임존성 등에서 항쟁. 나당연합군, 백강구싸움에서 왜군 대파. 부여풍, 고구려로 도망
664 백제 유민, 사비성을 근거지로 백제부흥운동을 펼쳤으나 웅진도독군에게 패함
665 백제 백제부흥운동, 임존성 함락으로 소멸
666 고구려 연개소문 죽음. 연정토, 신라에 투항
668 고구려 나당연합군에 항복. 고구려 멸망. 신라, 대동강 이남 지역 통합
669 당 평양에 안동대도호부 설치
670 고구려 유민 검모잠, 왕족 고안승을 추대하고 부흥운동을 펼쳤으나 실패.
신라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
671 신라 죽지 등, 석성에서 당군 격파.
672 신라 고구려군과 함께 백수성 근처에서 당군 격파.
674 신라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땅을 점령.
당 신라 침공.
675 신라 매초성 싸움에서 20만 당군 격파
676 당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철수시킴.
신라 기벌포 등지에서 당군 격파. 대동강 이남 지역에서 당군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실질적인 지배권 획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