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영화 붐과 함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이 각광받고 있다. 영화의 무드와 분위기를 결정하고 감동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음악. 영화음악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에게 내가 사랑한 OST는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히사이시 조와 마이클 니먼, 프린스, 복숭아 프로젝트까지 그 목록은 다양하다. 각 OST의 선정 이유는 개개인의 내밀한 기억들과 관련이 돼 있다. 영화음악을 통해 삶의 투지를 확인한다는 팝 칼럼니스트부터 유학시절 과제 때문에 듣게 된 OST로 생활이 풍요로워졌다는 음악감독, 영화음악이 좋아 지루하고 형편없는 영화를 여태껏 기억한다는 영화음악 프로그램 진행자까지 사연도 다양하다. 12인의 감식안이 고른 영화보다 영화음악이 좋은 열두 가지 사연을 소개한다.

사춘기를 점령한 사나이 <퍼플 레인>
감독 앨버트 매그놀리 | 음악 프린스, 미첼 콜롬비어 | 출시 1984년
80년대 초. 나는 모든 팝 차트와 뮤직비디오 내용을 외우고 다니는 사춘기 소년이었다. 그 당시 가장 독보적인 스타일을 자랑했던 팝 아티스트는 프린스였다. 음악도 색달랐지만 외모나 의상이 독특했다. 흑인이지만 그렇지 않아 보였고 레이스가 치렁한 셔츠에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 남자일까 여자일까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 우연히 발견한 영화가 프린스 주연의 <퍼플 레인>이다. 내용은 지금 생각해도 참 삼류다. 가족 그리고 연인과의 문제들을 음악의 힘으로 해결하고 희망을 찾는다는 내용. 하지만 난 정말 그 영화가 좋았다. 프린스의 밴드가 출연해 연주하는 부분에서 그만, 홀딱 반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프린스의 노래를 위한 제법 길고 비싼 뮤직비디오라 할 수 있다. OST에는 Let’s go Crazy, When doves cry, Purple Rain 등 당시 프린스의 히트곡들이 들어 있다. 특히 영화의 타이틀 트랙인 Purple Rain은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다. 영화로서 추천할 만하지는 않지만, 음악들은 지금 들어도 여전히 감각적이다. 프린스는 음반회사와의 문제 때문에 한동안 자신의 이름 대신 The artist formely known as Prince 프린스라 불리던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그가 얼마나 괴짜인지 말해주는 대목일 것이다. 그것이 프린스를 흥미롭게 하는 것이고, 그의 음악적 독창성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도 같지만 그는 전설로 남을 아티스트다. 이 음반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천재인지를 증명하려 든다. 얄미울 정도로 흠 잡을 곳 없는 훌륭한 음악들이다.
방준석 (음악감독 <즐거운 인생> <라디오스타> <너는 내 운명>)

난생 처음 느껴본 격정 <피아노>
감독 제인 캠피온 | 음악 마이클 니먼 | 출시 1993년
스크린보다 무대의 매력에 사로잡혔던 스무 살 무렵 어떤 연극을 보기 위해 대학로를 찾았다가 시간이 남아 극장에 들렀다. 그때 본 영화가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였다. 아름다운 뉴질랜드 자연을 배경으로 초기 이민자들과 정착민 사이에 벌어지는 가슴 시린 이야기도 좋았지만, 대사보다 배우들의 묵묵한 표정과 눈빛으로만 끌고 가는 이 영화의 음악은 경이였다. 자연과 인물, 남자와 여자 사이에 흐르던 안타까운 공기의 질감을 피아노 한 대의 선율로 어루만지는 마이클 니먼의 음악은 놀랍도록 위력적이었다. 뉴질랜드로 시집오면서 멀리 영국에서 가져왔지만, 남편의 무관심으로 바닷가에 버려진 자신의 피아노를 보러 세찬 바람 부는 바닷가를 찾은 에이다(홀리 헌터)가 격정적으로 피아노를 두드리고 딸 플로라(안나 파킨)가 바닷가를 뛰어다니며 치마가 뒤집어지도록 춤을 추던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 그리고 분노한 남편에 의해 손가락이 도끼로 잘리고 휘청휘청 베인즈(하비 카이틀)가 머물던 숲을 향하던 에이다의 뒷모습에 스며들던 음악을 들으며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지하에 있었던 비디오/OST 숍에서 <피아노>의 OST를 샀다. 처음 사보는 OST였다. 한 달여 동안 매일 밤마다 OST를 들으며 그 감정의 정체를 고민했다. 이전까지 연극에 비해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영화에 대한 생각이 <피아노>를 보고 난 이후부터 바뀌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영화에 하나의 차원을 더하는 마이클 니먼의 음악은 아직도 내게 영화음악의 전범이 되고 있다.
전계수 (영화감독 <삼거리극장>)

도망치고 싶어도 브레이크를 밟아! <8마일>
감독 커티스 핸슨 | 음악 에미넴 | 출시 2002년
<8마일>은 잔인한 영화다. 애써 잊으려 했던 것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영화가 은유하는 바를 한 방에 드러내는 에미넴의 대사는 어딘가를 베인 것처럼 아프기까지 하다. <8마일>을 처음 봤을 때 내 삶은 영화 속 에미넴보다 나을 게 없었다. 사랑은 지겨웠고, 미래나 희망 따위엔 구역질이 났다. 영화 보는 내내 에미넴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고막에 화살 꽂히듯 날아들었다. <8마일>은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에미넴이 부른 주제곡 Lose yourself와 함께 뮤직비디오가 먼저 공개된데다 영화는 에미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기초로 어느 백인 정키의 절망적인 삶을 담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잔상이 너무 무거워 한동안 앨범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술기운에 찾은 OST에서 에미넴은 소리쳤다. “가끔 난 도망치고 싶고 지금도 그래. 왜 내가 싸워야 하고 왜 내가 작사하는 걸까? 가끔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조차 힘들어. 가끔 난 삶이 싫어. 뭔가 잘못됐어. 브레이크를 밟아… 난 남자야. 새 계획을 세워야 해. 다시 일어서야 할 시간, 새로운 곳에 가야 해.” 에미넴이 부르는 ‘8 mile’은 영화의 주인공 지미가 보여주지 못한 것을 들려주고 있었다. 좌절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싸우라고 윽박지른다. 지미는 패배자였다. 그러나 앨범 속 에미넴은 투사처럼 토해낸다. “다시 일어서야 할 시간, 새로운 곳에 가야 해!” 한잔 술이 계시를 준 그날부터 삶이 퍽퍽해질 때면 <8마일> OST를 집는다. 때론 로또 한 장의 기적보다 투지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 위해서.
김태훈(팝 컬럼니스트)

따뜻한 선율로 기억되는 어색한 슈워제네거 <유치원에 간 사나이>
감독 이반 라이트먼 | 음악 랜디 에델먼 | 출시 1990년
나이를 먹으면서 초등학교 시절 열광하던 가족영화에 대한 애정을 접었지만 대신 OST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중 가족영화계의 거물인 이반 라이트먼 감독과 아놀드 슈워제네거 콤비가 함께한 <트윈스>(1988), <유치원에 간 사나이>(1990), <쥬니어>(1994)의 팬이다. 영화의 음악을 작곡한 이는 랜디 에델먼이다. 뉴저지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신시내티 음악학교에 입학하면서 무대음악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입성 후 <라스트 모히칸>(1992)이나 <트리플 X>(2002) 같은 액션영화 음악을 맡기도 했지만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 같은 로맨틱영화에서 피아노 중심의 서정적인 곡들을 훌륭하게 뽑아냈다. 그 능력은 <유치원에 간 사나이>의 코믹한 요소와 결합해 시너지를 뿜어낸다. 차분하고 우수 어린 멜로디의 향연이라 할 수 있는 OST는 아련한 감수성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그중 천진난만한 클라리넷 인트로가 인상적인 Dominic’s Theme과 Love Theme(Joyce)는 단연 백미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참여한 1960년대 영화음악을 좋아하지만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공허한 마음이 남아 있다. <유치원에 간 사나이>의 음악에 더 많은 공감대를 찾을 수 있었던 건 음악과 함께 영화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당시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기에 전부 떠올리지 못하지만 음악을 들을 때마다 어린 날의 희미한 기억이 떠오른다. 어색한 연기가 정이 가는 아놀드 슈워제네거,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페넬로프 앤 밀러의 기억을 불러오는 건 확실히 랜디 에델먼의 차분하고 아름다운 스코어다.
한상철(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어처구니없던 영화음악의 추억 <졸업>
감독 맷 리브스 | 음악 피터 애프터먼 | 출시 1996년
기네스 펠트로. 기품 있고 지적인 이미지로 영화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녀의 영화가 개봉한다기에 시사회에 갔다. 그런데 웬걸. 영화는 도무지 집중이 안 될 정도로 지루하고 형편없었다. 제목부터가 기네스 펠트로의 졸업이라니. 원제는 The Pallbearer로 장례식장에서 관을 드는 사람이란다. 당연히 더스틴 호프먼의 <졸업>(1967)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더 기가 막혔던 건 영화에 쓰인 음악이다. 세상에! 저 곡이 왜 저 장면에서 튀어나오는 거지? 그것도 잠깐 깔리다 말아버리네. 저렇게 멋진 곡도 엉뚱하게 쓰이니까 정말 우스워지는구나. 영화를 보는 내내 신기할 정도로 어긋나는 음악을 들으며 어처구니없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OST에 어떤 곡들이 들어 있기에?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알 그린의 Love is a Beautiful Thing, 질베르토 부부와 루이스 본파, 카를로스 조빔 등과 보사노바의 대표로 불리는 스탄게츠의 Sambolero,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성의 가수 중 한 명인 페리 코모의 Papa Loves Mambo, 재즈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거장 허비 행콕의 Cantaloupe Island, 기타의 명인 장고 라인하르트의 I Surrender Dear 등 OST 목록만 보면 굉장하다. 영화를 관람하기 전 이런 음악들의 목록만 본다면 궁금하고 보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OST만의 매력에 끌려 혹시라도 영화를 찾아본다면 후회막급. 그만큼 영화와 음악 간의 간극이 크다. 말 그대로 영화음악이 영화보다 좋은 OST의 대표격이다.
신지혜(CBS 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진행자)

내 청춘에게 고함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감독 길 정거 | 음악 리처드 깁스 | 출시 1999년
참 이상하다. 청춘영화에 사족을 못 쓰는 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지만, 절대적으로 편애했던 청춘물의 주인공 연령대는 나이를 먹을수록 낮아졌으니. 고등학교 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청춘스케치>로, 대학생이 돼선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로 그것이 바뀌었다. 카페에 죽치고 앉아 세상만사를 씹어대는 일상 속에선 느낄 수 없는 절대 낭만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특히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하이틴 로맨스로 바꿔버린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는 그중에서 가장 중독 증세를 보였던 영화다. 내용은 흔해 빠진 고딩 연애담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처음 얼굴을 알렸던 풋풋한 얼굴의 히스 레저와 긴 웨이브 금발을 출렁이며 빼어난 댄스 실력을 뽐내던 똑똑한 여학생 줄리아 스타일즈의 싱그러운 에너지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줄리아 스타일즈를 꼬시기 위해 히스 레저가 학교 운동장에서 부르던 Can’t Take My Eyes Off you를 다시 들을까 싶어 샀던 OST엔 유독 그 곡만 빠져 있어 얼마나 아쉽던지. 그러나 음악을 총괄한 리처드 깁스가 모은 록, 힙합, 발라드에 이르는 14곡의 음악들은 들을수록 감칠맛이 났다. 특히 영화에 직접 등장해 볼륨 있는 몸을 신나게 흔들어 젖히던 스카밴드 세이브 페리스의 보컬 모니크 파월의 파워풀한 음성이 일품인 I Know, 역시 영화에 등장해 클럽 장면에서 부르던 얼터너티브 밴드 레터스 투 클레오의 Cruel to be kind에는 인디 록 밴드 특유의 숨길 수 없는 활력이 가득하다. 최고로 신나게, 좋아하는 음악을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노래하는 느낌, 청춘 송가로 가득 찬 OST다.
유지영 기자

고아성 양이 선물한 OST <숏버스>
감독 존 카메론 미첼 | 음악 욜 라 탱고 | 출시 2006년
캐스팅과 스탭 구성이 끝났지만 투자는 원활치 못했다. 우울함이 극에 달했다. 그때 고아성 양(<괴물>)이 사무실을 방문했다. 지난 미팅 때 선물한 최민식 사진집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우리는 꼭 사춘기 소년소녀 같았다. 그런 꽤 괜찮은 공기가 흐르고 있을 때 아성 양이 물었다. “감독님 혹시 <숏버스> 갖고 계세요?” 나는 아성 양에게 <숏버스> DVD를 건넸다. “엄마한테 들키면 큰일 난다.” 30대 싱글남의 외로움을 달래주기에 <숏버스>는 충분치 못하다(?). 첫 장면부터 아무렇지 않게 까고 꺾지만 그리고 그냥 하지만 성적인 뭔가를 바라고 본 내 마음이 쪽팔릴 정도다. 왜 이 영화를 잊고 있었을까? 마지막 8분여 동안 In The End가 흐를 때 숨죽여 눈물을 훔쳤다.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지. 찔끔거리던 와중에 위로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과 영화는 조용히 어깨를 두드리며 우울증에 빠진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투자가 완료되어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장을 오가는 내 귀엔 이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숏버스 클럽 안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결핍의 무리들, 그들의 마지막 축제가 떠오른다. 외롭고 힘들고 웃음을 가장하고 살아가야 하지만 언젠가는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는 가사는 촬영 내내 힘들 때마다 위로가 돼주었다. <숏버스>를 본 아성 양은 나에게 영화의 OST를 선물했다. “아직은 이해되지 않는 영화보다 음악이 더 좋다”고 말했다. 캐릭터를 잘 모르겠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온 오정세 군에게 <숏버스>의 첫 장면을 보여주었다. 오정세는 촬영 내내 요즘 꺾고 있다고 농담했다. 우리는 시시덕거리며 서로의 결핍을 이해하며 <라듸오 데이즈>를 찍었다. <숏버스>의 인물들과 너희는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 결국 너희 영화를 다 찍고야 말 것이라고. Justin Bond와 Hungry March Band가 노래하고 있었다.
하기호(영화감독 <라듸오 데이즈>)

쿵푸와 힙합의 파이팅 <로미오 머스트 다이>
감독 안제이 바르코비악 | 음악 스탠리 클락, 베리 행커슨 | 출시 2000년
영화음악은 무조건 영화에 맞아야 하고, 아무리 음악이 좋아도 영화가 꽝이면 음악도 덩달아 꽝이 된다. 이 원칙을 위배하는 영화도 있다. 영화는 꽝인데 음악은 들을 만한 영화. 그런 음악은 영화의 수갑을 풀고 음악만으로 존재한다. <로미오 머스트 다이>는 그렇게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이연걸이 나와서 흑인들, 백인들 사이에서 열연한다. 그게 기분이 좋긴 하다. 아시안, 아프리칸 같은 소수민족들이 할리우드에서 의젓하게 주역을 맡고 있는 게 대견하다. 그러나 부두를 분할하고 있는 중국계 깡패와 흑인 깡패의 알력이 그려내는 갱스터는 섬세하지 않고, 그 와중에 꽃피는 이연걸과 흑인 R&B 스타 알리야와의 로맨스를 빚어내는 솜씨는 그저 그렇다. 음악은 압권이다. 일단 쿵푸와 힙합의 만남이 그럴듯하다. 흑인음악과 쿵푸의 만남은 역사가 제법 있다. <쿵푸 파이팅> 앨범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쿵푸 액션의 유연함과 펑키한 리듬감은 묘하게 어울리는 데가 있다. 힙합의 대가 우탕 클랜을 연상하면 쉽다. 그들의 걸작 앨범 제목이 <36 Chambers> 번역하면 삼십육방이다. 사운드 전반에 현재까지 최고로 군림하고 있는 흑인음악 프로듀서 팀벌랜드의 색채가 진하게 흐른다. 팀벌랜드는 리듬의 인상파다. 이 사람은 리듬에도 색깔이 있고 음정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리듬 파트를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로 처리함으로써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사운드의 그림을 그린다. 요절한 여성 힙합 스타 알리야의 음악을 만날 수 있는 것도 행운. 너무나 반짝거릴 때 알리야는 저세상으로 갔다. 게다가 스탠리 클락의 베이스 사운드까지도 맛볼 수 있다. 이 전설적인 전광석화 베이시스트의 손맛과 팀벌랜드식 전자 사운드의 조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구경거리다.
성기완(시인,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 성기완의 세계음악기행 진행)

카메론 크로 영화를 싫어할 수 없는 이유 <바닐라 스카이>
감독 카메론 크로 | 음악 낸시 윌슨 | 출시 2001년
카메론 크로의 <올모스트 페이머스>(2000)는 걸작이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의 작품 중 추천할 만한 영화는 별로 없다. 특히 <오픈 유어 아이즈>(1997)를 재미있게 본 나로서는 이를 리메이크한 <바닐라 스카이>(2001)는 내 인생 최악의 영화 중 하나다. 하지만 음악 팬 입장에서라면 다르다. 여기엔 음악으로 소통하고, 음악으로 삶을 드러내는 뮤직라이프가 깔려 있다. 열다섯 살에 롤링 스톤에 음악 칼럼을 썼을 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카메론 크로는 음악 팬들만이 눈치 챌 수 있는 요소들로 영화의 디테일을 구성했다. 영화 시작과 함께 미래의 재생기계로 연주되는 존 콜트레인의 음악을 들려주고, 모드그룹 더후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센드가 부순 깁슨 기타의 산산조각난 부품들을 그대로 모아놓은 장식장을 극중 데이빗(톰 크루즈)의 집에 진열해둘 뿐 아니라 밥 딜런의 명반 앨범 커버를 포스터에 차용하는 등 자신이 동경하는 음악과 뮤지션을 교묘하게 배치했다. <클럽 싱글즈>(1992)에서 증명됐듯 카메론 크로는 연출보다 음악에 더 큰 재능을 보였다. <클럽 싱글즈> OST가 시애틀 그런지 록의 출발을 알린 상징적인 앨범이었다면, <바닐라 스카이> OST는 재즈, 록, 포크에서부터 일렉트로닉, 인디까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미국 팝 신의 건재를 보여준다. REM, 라디오헤드, 팻 매스니, 밥 딜런, 케미컬 브러더스, 시규어 로스, 롤링 스톤스 등 시대와 장르를 초월한 뮤지션들이 컴필레이션 음반에 대거 참여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음악을 사랑하고 생활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선곡임이 절감된다.
허남웅 기자

히사이시의 절대 경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고마츠바라 가즈오 | 음악 히사이시 조 | 출시 1984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 최고는 <천공의 성 라퓨타>(1986)라고 믿는다. 하야오의 오랜 지음(知音)인 히사이시 조의 작업물 또한 마찬가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의 스코어도 빼어나지만 너무 말끔하게 양식화된 최근작들은 묘하게 소화불량을 일으킨다. 형식미가 내적 호소력을 가두는 느낌이랄까? <천공의 성 라퓨타>까지만 해도 히사이시 조의 음악에는 생생하게 날것으로 숨쉬는 그만의 정서가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OST는 무척 흥미롭다. 사실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열광하기란 쉽지 않다. 하야오의 전매특허인 비행 신은 <붉은 돼지>(1992), <마녀배달부 키키>(1989)보다 떨어지고, 스케일 또한 <천공의 성 라퓨타>에 미치지 못하며, 캐릭터의 강렬함도 <모노노케 히메>(1997),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사운드트랙만큼은 이후의 히사이시 조 스코어들에서 만나기 힘든 전무후무의 아우라를 지녔다. 그 아우라는 심포니 트랙들보다도 효과음에 가까운 소품들에서 두드러진다. 그 대부분은 뉴웨이브라 불리는 80년대 초중반의 전자음악/신디사이저 팝의 자장하에 놓여 있다. 80년대 초반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YMO를 필두로 한 전자음악의 조류가 일본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음악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한철 장사였던 뉴웨이브를 세련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더구나 후기작으로 갈수록 자연주의적 어레인지에 충실해지고 있는 히사이시인 만큼 공명감 큰 인공의 음향을 직조했던 그의 과거와 조우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앨범은 가치가 있다.
조민준(월간 드라마틱 편집장)

제임스 뉴튼 하워드, 내 강력한 라이벌 <워터월드>
감독 케빈 레이놀즈 | 음악 제임스 뉴튼 하워드 | 출시 1995년
1999년 미국 유학 당시 영화음악 편집 강의를 하던 교수가 <다이하드>의 음악을 다른 영화음악을 사용해 완전히 바꿔보라는 황당한 과제를 내줬다. 학교 미디어 도서관에서 며칠 밤을 새며 씨름하던 중, 멋있는 CD 재킷이 눈에 띄었다. <워터월드> OST였다. 냉큼 들어보니 클래식과 팝을 적절히 믹스시킨 화성과 멜로디에 낭만적인 감성을 잘 살려 편곡한 수작이었다. 한스 짐머의 음악이 지나치게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다소 거부감을 준다면 <워터월드>는 음향과 음악이 잘 융화된 오케스트라 악기뿐 아니라 다른 음색도 최상의 조화를 이루는 물건이었다. 약간 짜증도 났다. 그 시절 개인적으로 오케스트라와 전자악기 그리고 타악기를 결합시킨 편곡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이 음반에서 벌써 그걸 해버린 거다. 이건 또 누구야? 내 경쟁자가 또 한 명 늘었구나, 하는 심정으로 재킷을 보니 음악감독은 제임스 뉴튼 하워드였다. 그 이름을 단단히 머리에 새기며 영화를 봤다. 극지대의 얼음이 녹아 세계가 멸망 직전이고,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온 것 같은 주인공이 해상에서 악당과 싸우는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였다. 역대 최고의 제작비를 들였으나 욕만 엄청 먹고 흥행에 참패한 영화. 그러나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멋진 음악과 압도적인 스케일이 내겐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이듬해 대학원에 진학한 후, LA의 한 중고 음반가게에서 단돈 4.99달러에 <워터월드> OST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런 횡재가! 들으면 들을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 덕분에 내 유학생활은 풍요로웠다.
정용진(음악감독 <극장전>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해변의 여인>)
비주류음악이 주류영화와 만났을 때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감독 이무영 | 음악 이병훈, 복숭아 프로젝트 | 출시 2002년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이하 <철파태>)는 골 때리는 영화다. 달기지에서 열리는 결혼식에서 시작해 지구를 몇 바퀴 돌아 다시 달기지 결혼식에서 끝나는 이 이야기를 컬트로, 저예산 비주류영화로 완벽한 실패작으로 분류하든 몇 번을 봐도 이해가 안 되는 어쨌든 이상한 영화였다. 하지만 이 괴상한 영화의 OST는 단박에 매혹당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혁신적이었던 이 사운드트랙은 강기영, 장영규, 방준석이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는 복숭아 프로젝트라는 음악 창작집단의 성향을 드러낸 초기 음반이었고, 기괴하면서도 절박한 혹은 동물적 감각이 가득한 사운드에는 키치적인 방법론과 날것의 감수성이 공존하고 있었다. 해괴한 영화만큼 해괴한 사운드로 가득했지만 음악적으로는 당대 어느 사운드트랙보다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가득했다. 비슷한 시기 <고양이를 부탁해>(2001)와 같은 영화의 음악을 만든 조성우 음악감독의 작업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었다. 그것은 복숭아 프로젝트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어어부 프로젝트(장영규), 유앤미블루(방준석), 삐삐밴드와 달파란(강기영)이라는 멤버들이 몸담았던 그리고 그들의 음악적 토대가 조화를 이룬 것이 복숭아 프로젝트였다면 이들의 키치적이면서도 절박한 멜로디는 이병우가 작업한 <괴물>(2006)의 사운드트랙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철파태>의 OST는 한국 영화음악의 다른 경향을 만들어냈고, 주류영화에 비주류감수성을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영화의 부속물로 여겨졌던 사운드트랙을 개성적인 창작물로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