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선린야구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원준영(73)
고교야구 열전을 회상하며
(선린 73회 졸업 30주년 기념행사에 다녀와서)
선린밴드부 ( 청파윈드오케스트라 )단원 , 김현숙님의 회고록
"Home Coming Day"
영문표기의 경축! 현수막이 무척 의미있어 보인다.
이 영광된 자리에 청파윈드오케스트라가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다.
먼저, 73회 졸업 3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해주셔서 고맙게 여긴다. 그리고 73회 이전과 이후의 졸업생들과 기타 동문님들까지 행운이 있기를 빌면서 또한 그들의 모교의 발전을 기원해본다.
사람들은 "선린상고" 하면 가슴속에 화석처럼 "야구로 유명한 학교" 라고 말하고 있다.
1970년 후반~80년이후 그 기간동안 거쳐간 선수만해보 박노준,김건우,유지홍,나성국,이경재,조영일,이바오로 등 등 그 중에서 제가 본 1번 타자 중의 1번 타자인 김웅대선수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선린상고의 공격루트는 언제나 김웅대선수의 타격에서 시작되었다.
요즘 프로야구 1번타자중에선 빠른발을 주특기로 번트 내야안타가를 주무기로 삼는선수가 종종 있긴 하지만 제가 본 김웅대 선수는 정교한 타격을 갖춘 초특급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연대 진학이후 성장세가 더뎌지면서 야구팬들의 뇌리속에서 사라지고 말던데....., 부상에 따른 기량퇴보인지 아니면 천재성을 너무나 믿은 나머지 게으름에 따른 기량퇴보인진 몰라도 제 기억속에 남는 너무나 아까운 1번타자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드넓은 운동장에는 늘 늠름한 포부를 가진 신체 건강한 사나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 늘 눈에 띄곤한다. 그곳에서 뛰었던 사내들이 야구계의 주름을 잡았던 빛나던 이름들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대략 떠오려보면서 이름없는 선수까지 그 그림자들을 상상하면서 여유있게 황토빛의 흙을 본다.
가을하늘이 선린운동장에 눈부시도록 비춘 햇살은 지금도 야구의 꿈을 새록새록 피워올려 달라는 듯 철조망담장을 타고 장미꽃이 응원하듯 웃고 있다.
무슨 운동이나 최고가 되고 프로가 되기위해서는 피와 땀과 그들이 흘린 눈물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를 것이다. 아마 야구선수들이 뛰는 걸 보면 숨쉬고 있는 그들의 존재가 고마울 뿐이다
이름있게, 또는 이름없이 사라진 야구계의 발자국들로 다져진 운동장을 보면서
1980년 클린업 트리오였던 박노준, 유지홍, 김건우는 각각 화랑기, 황금사자기, 청룡기 타격1위에 올랐던 생각이 난다. 김건우는 그 해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다. 이들은 정말 공포의 스타들이었다며, 여학생들은 매일 그들의 이름들을 놓고 수다를 떨어서 귀가 아플 지경이었고 각인될 것 같았다. 여학생들은 공부가 좀 방해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만화책도 홈럼왕, 까치,그 정도였다.
동네의 커다란 평상에서 마을분들하고 함께 라디오와 TV로 보던 선린상고와 경복고등학교의 환회도 생각나고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갓만들어진 한국최초의 내외야 잔디구장인 잠실구장에서 일본과의 결승에서 김재박선수의 개구리번트와 한대화의 3점홈런은 지난 20년동안 아니 25년 이상을 회자되었다.
82년은 온나라가 야구에 미쳤다. 김재박선수의 개구리 번트는 CF장면으로도 나오면서 국민들에게 끊임없는 감동을 주었다. 82년 세계야구선수권우승의 또 하나의 견인차는 선동열선수였다.
1980년 고교야구는 광주의 양강 광주일고(선동열)와 광주상고(김태업)로 대표되고 그들보다 한해 아래였던 선린상고(김건우, 박노준)와 군산상고(조계현)가 패권을 다툰 해였다. 1981년 대통령배가 열릴 때 당연히 야구팬들은 선동열과 김태업이 빠진 광주일고와 광주상고 보다는 선린상고의 독주를 예상했다.
이미 조계현선수는 2학년 때 연투로 인한 부상으로 전국대회에서 보기가 힘든 투수가 되었다. 하지만 선린상고는 시즌 개막대회였던 대통령기에서 의외로 김정수가 뛰던 진흥고에게 패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경북고는 예선에서 탈락해서 코빼기도 안보였다. 그 다음 대회였던 청룡기에서 선린상고는 승승장구했고, 결승에서 맞붙은 팀은 3학년 투수로 박춘식, 성준, 1학년 언더 문병권 유격수 2학년 유중일이 버틴 경북고였다.
누구나가 선린상고의 압승을 예상했지만 결과는 경북고의 승리...그 결승전을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동대문 구장 3루측에서 지켜봤다. 그때부터 선린상고의 비운을 누군가가 말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전국최강팀으로 선린상고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에 전국고교팀이 총 출전하는 봉황대기가 열렸고, 뚜렷한 적수가 보이지 않았던 선린상고와 경북고는 승승장구, 역시 결승에서 만나게 된다.
31년이나 지난 지금.
청파윈드오케스트라 연습이 선린고등학교 강당에서 있단다. 그 일 때문에 선린상고(현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오게 되었다. 비록 모교는 아니지만 어쩌다 단원이란 인연이 되어버린 이상, 선린교정과 무관치 않다는 점을 염치없이 밝히면서 글을 쓴 점을 양해 바란다.
그것은 이 청파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출발은 선린교정의 모교출신 위주로 구성되면서 점차 확대하겠다는 연주단측의 계획으로인해 구성원들을 활동할 수 있는 자들로 더 모집을 허용하면서부터 그 인연은 시작된 것이었기에 나같은 타동문이 은혜스럽게 내 땅처럼 밟고 다니면서 오늘 초대까지받게 되어 선린동문님들께 어떻게 고마움과 영광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제 30년 전의 시간속으로 돌아가본다.
불운! 불운해도 1981년의 선린상고만큼 불운했던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악의 불운이었다. 전해에 4번이나 결승에 진출해 2번 우승(청룡기, 황금사자기), 2번 준우승한 선린상고는 멤버들이 초호화였다. 박노준, 김건우같은 고교야구 투수의 원투펀치......휴.
81년에는 고교야구무대를 휩쓸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했으나, 탄탄한 팀웤의 경북고에 밀리며 준우승만 3차례 기록하는 불운을 기록했다. 특히 경북고와의 봉황기 결승에서 박노준 선수의 발목부상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기도 했었다.
당시 두 팀이 보여줬던 득점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해에는 경북고의 구윤이 이영민 타격상을 받았다) 초반 선린상고는 성준을 공략해서 점수를 뽑기 시작했는데 아뿔사! 박노준이 홈으로 귀루하다가 발이 꺽여지면서 골절상을 입게 된다.
이미 김건우가 어깨부상으로 여의찮았던 선린상고는 언더핸드 투수였던 이바오로를 내세우지만 결국 후반 경북고의 타력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또다시 준우승팀이 된다. 반면 경북고 1학년 언더핸드 투수였던 문병권은 선린상고의 타선을 적절히 막아냈다.
당시 선린상고가 우승문턱에서 번번히 주저앉았던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허약한 포수-내야진이었는데, 80년에도 다소 허술했던 이 부분은 3학년인 포수 김현성, 2루수 한두영, 유격수 이정철 선수가 졸업하며 더더욱 문제가 심각해져 결정적인 순간마다 실책으로 팀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내 주변(여학교에서는)에서는 선린고교야구 팬학생들에게 보내줄 응원마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며 궁시렁거리기 일쑤였던 수다쟁이 철없던 여학생팬들을 사로잡기는 힘드나 싶었다.
마지막 대회였던 황금사자기에서 경북고는 역시 예선을 가볍게 통과하고 4강에 진출했지만 선린상고는 김건우, 박노준의 공백을 매꾸지못해 대구상고에게 치욕적인 콜드게임패를 당하게 된다.
대구상고는 이후 군산상고마저 콜드게임으로 누르고 4강에 올라 훗날 가을까치로 이름을 날리게되는 김정수가 버티는 진흥고와 준결승전을 치루고, 경북고는 김종석이 있던 부산고와 치열한 접전끝에(1:0승리로 기억) 결승에 오른다.
결국 결승은 경북고와 진흥고. 결승은 싱겁게 경북고의 승리. 이해 경북고는 출전 전국대회 전대회 우승이라는(전국체전까지 우승) 두번째 대기록을 세웠다.
이해 가장 불운했던 팀은 선린상고였기에 선수를 보면 호빵 한개라도 사주면서 그만 뛰라고 하고 싶을 정도었고 , 가장 행운을 따랐던 팀은 역시 경북고였기다.
경북고는 문병권이라는 성준의 후계투수와 류중일이라는 불세출의 유격수가 있어서 다음해에도 기대를 모았지만 1982년 청룡기에선가 박준태가 치고 던진 광주일고에게 창단이래 첫 콜드게임이라는 치욕을 겪게된다. 경북고 전성시대를 풍문으로만 들었던 저는 이해 경북고의 승리를 지켜보며 그 시절이 어떠했을지 막연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 광주는 민중항쟁 고통의 흔적으로 인해 그 후유증은 여러 지역으로 점점 번져 나가 결국,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닌 젊은 청년들의 가슴까지도 뜨겁게 서서히 민주화의 열풍은 달궈지고 있을 때 그해 바로, 10월 3일 제34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가 열린 서울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주말을 맞아 선린상고와 세광고가 맞붙은 준결승 경기를 보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눈물겨운 학창시절
그때 그무렵 나는 저너머에서 다니는 여학생이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광주일고 편에 서서 응원을 할까 선린상고 편에 서서 응원을 할까 고민도 하지않는 야구에는 무관심 했었다.
왜냐하면 그해 5월에 광주에는 무슨일이 일어났었는지 잘 몰랐었는데 7~8월경 방학휴가를 계기로 고향(강진)을 찾아 가는 도중에 광주상황을 목격했는데 5월에 이미 끝나버릴 사건들이 7~8월에도 전쟁같은 풍경이 끝나지 않고 내 눈속에 들어와 자리잡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꺼멓게 타버린 젊은이들은 흑인들처럼 되어 쫓겨다니고 정경들은 마구 달려다니고 여기저기 질질 땅바닥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대강 몇 개월이나 지나버린 여름날에도 감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바른 말을 하는 이들은 모두가 용공, 좌경, 빨갱이라 매도 당하기 일쑤였던 군부독재연속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했던 말들이 입조심하라는 것이었으며, 진실을 말하면 왕따라는 것이었다. 그런 시기에 속시원하게 서울 시민들을 열광시켰던 것이 바로 고교야구였다.
1981년 10월 3일 제34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어느 날, 스승님께서 "선린상고에서 시무한 선생 중 친분이 있는 분을 만나기로 했다" 며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을 가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싫다고 했더니 맛있는 것도 사준신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그 선생님은 그당시 선린상고 교사라는 친구분를 만나시더니 얼싸안고 펄떨 뛰시며 기뻐하셨는데 "오늘만은 우리 선한 싸움 하세! 오늘만은 선한 싸움 하세!" 하시며 광주사태를 대강 대강 조심스럽게 말씀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경기가 끝나자, 광주일고도, 선린상고도 서로 악수를 하면서 정중한 정리를 했었는데 그때, 한 선생님께서 "너희들! 광주일고야! 선린상고야! 여기 온 내 제자들아, 너희들이 공부 열심히 하여서 서울대, 연대, 고대, ...등 등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이 나라의 주류가 되거라 꼭!" 하시며 우셨다.
무슨 이야기인지 대강 알아들은 분위기였지만 침묵을 왜 해야 하는지도 아는 시대였기에 그냥 눈물만 흘린이들이 많았다.
하긴 그 후 1980년 이후 서울에서는 그때 그말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대학가에서는 광주문제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야 했는데 바로 그 학생들이 386세대라 불리우는 지금에는 전환이 된 486세대들이 된 그때 고교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그 대회 선린상고와 광주일고의 결승전은 고교야구 전성기의 명승부였다. 8회 3-3 동점 상황에서 선린상고 박노준은 당시 최고의 고교 투수로 꼽히던 광주일고 선동열을 상대로 2점 홈런을 때려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후 선린은 다시 후배여학생들에게 부활되어 떴다.
선린상고 시절 김건우는 항상 그림자 혹은 2인자란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했는데 바로, 초-중-고를 함께 다니던 또래의 슈퍼스타 야구천재 박노준의 존재1 때문이었겠다.영원한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그 들도 세월을 비켜갈 수 없었다.
박노준은 고려대로 김건우는 한양대로 입학을 했을 때야 헤어지게 되고, 여학생들도 대학도 가게 되고 또는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세월이 조금 더 지나고 그런데
"김건우!!김건우!!""박노준!!박노준!!" 을 연호하는 아저씨들의 함성과....성인이 되었고. 선동열은 광주 출생으로 광주제일고교(광주일고)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선동열 또한 아저씨같은 성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명이 가장 먼저 떠오르른다.
예전 해태가 광주를 홈으로 썼는데.....,운동장 근처에 무등산이라는 산이 있었고.....,매우 빠른 공을 선보인 동시에 방어율도 0점대.....,그래서 붙여진 별명으로 알고 있는 그를 이겼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인 것이다.
참다운 선한 싸움이었다
고교야구는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짜릿한 역전 드라마가 펼쳐지곤 했다. 짜임새가 있는 요즘 프로야구와 달리 어딘지 어설프고 설익어 보이지만 경기 분위기에 따라 흐름이 뒤바뀌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고교야구 회상 선린상고/광주일고/경북고/
임신근과 남우식이 각각 활약했던 그 시기의 경북고와 성준과 유중일이 활약했던 1981년의 경북고... 아마 1982년 이후 고교야구에서 한팀이 출전한 전대회를 우승한 예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하얀 유니폼에 세줄이 그려진 경북고 유니폼을 보면 그때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앞서 기술했던 경기들을 제가 모두 봤다는 것에서 아마 죽을 때까지 제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것 같다.
고교야구 열전을 회상하며 청파윈드오케스트라 향연이 울려퍼지는 오늘. 아름다운 저녁이었음을 기억하리라.
|
첫댓글 80년 10월 3일 제 34회 황금사자기 고교 야구 대회... 나도 잊고 있었던 그당시에 날들를 오랜 세월이 흘러도 기억 하는 한분이 있네요...이글을 읽으며..31년전 그때 그당시에 기억들이 가물가물 떠올라서 마음 한쪽이 뭉클한것을 느낀네... 뒤돌아 보면 힘든시기도 많었지만 ..그래도 절대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지난날이 그리 사막하지만 않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