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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 표준화의 문제점
자신의 언어로 법을 설명하는 것을 허용한 부처님
현재 한국불교학회(회장 이평래 교수)의 주도 아래 불교용어 표준화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필자는 불교용어 표준화작업이 지닌 문제점과 번역의 어려움을 중심으로 문제제기를 해보고자 한다. 불교도들의 언어사용에 대한 입장을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율장에 나온다. 그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그 때 바라문 출신 야멜루와 떼꿀라라는 두 형제 비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목소리는 아름다웠고 발음도 좋았다. 그들은 세존이 계신 곳에 가서 말했다. “가지각색의 이름들, 가지각색의 씨족들, 가지각색의 출신들, 가지각색의 가문의 비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붓다의 말씀을 자신들의 표현방식으로 낭송하면서 그것을 왜곡합니다.(te sakkya niruttiy buddhavacanam dsenti) 붓다의 말씀을 ‘(베다의) 운율에 맞게(chandas)’ 옮깁시다.
buddhavacanam chandaso ropema) 붓다는 대답했다. “붓다의 말을 ‘(베다의) 운율에 맞게(chandas)’ 옮겨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죄를 짓게 된다. 나는 붓다의 말을 각자 자신의 표현방식으로[언어로] 배울 것을 명한다. (sakkya niruttiy pariypunitum) (Vinaya II 139, 『인도불교사』 2, 에띠엔 라모뜨 지음 / 호진스님 옮김, 서울 : 시공사, 2006, 239쪽 이하 참조. 밑 줄 그은 부분은 필자가 번역하였음.)
라모뜨 박사는 위의 문장을 소개하면서, ‘chandas’와 ‘sakkya nirutti’라는 말에 대한 해석으로 주석서 및 여러 율장, 그리고 현대의 학문적인 연구 성과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Chandas는 “베다(Veda) 같은 훌륭한 언어의 표현방식”(vedam viya sakkatabhsya vcanamaggo)를 의미한다.(팔리 율장주석서 Sammantapsdika VI 1214) 그리고 현대의 학자들은 “산스크리트어 운문”, “운문”, “불교문헌의 산스크리트어화”, “베다식 운문화”, “베다어”, 후대에 정비된 “산스크리트 언어가 아니라 중기 인도 방언들을 제외하고, 이 시대에 알려진 방언의 유일한 형태인 찬다스(chandas)”라고 현대의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Sakkya niruttiy(각자 자신의 표현방식으로[언어로])를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각자는 그 자신의 방언으로”, “각자는 자신의 말하는 방식대로”, “각자는 그 자신의 발음으로”, “그 자신의 문법으로”, “각자는 자신의 방언으로”, “자신의 구술적인 설명으로”, “각자는 자신의 표현방식으로, 즉 자신의 방언으로” 라고 해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라모뜨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붓다는 심사숙고 끝에 베다를 암송할 때 사용하는 억양으로 불교성전들을 낭송하는 것을 금지하고, 각 제자는 붓다의 말씀을 그 자신의 방언으로 가르치라고 지시했던 것 같다.”
니룻띠(nirutti)라는 말은 단지 발음만이 아니고 방언 전체를 가리킨다는 내용이 맛지마 니까야(MN III 234~235)에 나오는데, 그곳에서 붓다는 모든 편견과 속어에 대한 모든 과장을 피하도록 권고했다. 예를 들면, 하나의 동일한 도구(그릇)을 지방에 따라 빠띠(pti), 빳따(patta), 빗따(vitta), 사라바(sarva), 다로빠(dhripa), 뽀나(pona), 삐실라(pisla)) 등으로 부르는데, 그 어느 용어라도 어떤 한 지방의 언어(janapada-nirutti)만을 고집해서, “이것만이 진실이며, 다른 말은 잘못이다.”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며, 그 사람이 현재 살고 있는 지방에서 통용되는 말(sama뼎a)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만일 이렇게 자신의 지방에서 쓰는 말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다툼이 있다고 하여 유익함이 없다고 하였다.
율장과 맛지마 니까야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현재 한국 사람들이 붓다의 말씀을 어떻게 배우고 가르쳐야 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붓다 당시부터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고 불교가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대중 교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 사용의 유연성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각 지역의 언어로 붓다의 가르침을 전할 때에 그 지역 사람들에게 불교가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에 불교전래의 역사는 번역의 역사가 되었다. 중국이 기원2세기부터 약 1000년 동안 번역을 해왔고, 그 한역된 불교문헌은 중국을 위시로 하여 한국, 일본, 베트남 지역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불교전통의 근간이 되어왔다.
한국불교의 전승이 중국불교의 영향 하에 있었기에 당연히 중국어로 번역된 문헌을 통해 불교를 접할 수 밖에 없었고, 아직도 그 영향 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문자인 한문은 중국의 글이지만, 최근 100여 년 전까지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 문화어였던 중국어를 무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시대의 청소년들과 한자교육을 받지 않은 한글전용 세대들을 위해 경전을 알기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말로 굳어진 한자어를 모두 버린다는 것은 현재의 한국어 사용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현재 역경원에서는 한글로 번역한 불교 용어를 다시 한역음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애써 한글로 번역한 용어가 불교인들 사이에 거의 통용되지 않아 보편화되지 못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용어를 역자마다 다르게 번역하여 현실적으로 적용되지 않은 것도 다시 한역음으로 되돌아간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불교 용어를 한역음으로 사용할 경우, 그 개념의 특수성을 살리는 일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말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에 문제가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이 될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 용어의 한역음 사용 시에는 주를 달아주는 방법을 써서 독자들에게 그 의미를 알게 해주고 쉽게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1)
우리가 사용하는 불교한자는 이미 우리말이 되어 버린 것이 많다. 이는 스리랑카나 태국 미얀마의 현대어에는 남방불교의 문헌 언어인 팔리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고급 정신문화인 불교가 각 지역에 전해지면서 기존의 언어 체계 속에 불교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어 온 것이며, 이것이 언어가 가지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인용한 맛지마 니까야에서 “그 어느 용어라도 어떤 한 지방의 언어만을 고집해서, “이것만이 진실이며, 다른 말은 잘못이다.”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며, 그 사람이 현재 살고 있는 지방에서 통용되는 말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만일 이렇게 자신의 지방에서 쓰는 말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다툼이 있다고 하여 유익함이 없다”고 한 말씀은 현재 불교용어 표준화를 시행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한자어를 우리말로 고친다거나 산스크리트 발음이나 팔리어 발음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현재까지 사용되어 온 한자용어를 그와 같이 번역한다고 하는 최소한의 설명이 제시 되어야 할 것이며, 결국은 불교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정착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교용어 번역의 어려움
불교가 전래된 이후, 한국에서는 1700년이 넘는 동안 동아시아 대승불교 전통에서 한문을 의사소통의 언어로 사용해왔다. 16세기 한글이 창제되어 우리말로 경전 번역을 시도했지만, 한글을 통해 불교경전이 제대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동국역경원을 중심으로 한글대장경이 번역되기 시작한 최근 40년 전부터이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을 방문한 수행자들을 통해 초기경전인 팔리어 경전에 대한 관심이 고요한소리, 경전연구소 등의 단체를 통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최근 들어 한국빠알리성전협회(전재성)와 초기불전연구원(대림스님, 각묵스님)에서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대승경전이나 아비달마 논서 등과 같은 산스크리트 불전을 한문이 아닌 산스크리트 원전을 통해서 연구하고 번역하려는 시도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필자도 경전연구소에서 팔리어 경전의 번역을 위한 공동번역 모임을 1년 이상 팔리어와 산스크리트 원전 해독능력이 있는 전문가들, 한문 번역의 경험이 있는 분, 번역에 관심이 있는 분들 10여명과 함께 번역작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나의 전문적인 불교용어를 적절한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서 3~4시간을 함께 토론한 적도 많았다.
그 논의가 된 용어를 예로 들면 ‘지음’이라고 번역한 行, sakhra이다. 이 용어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주석을 첨가하여 이 용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 쉽지 않음을 여러 방면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行(sakhra)은 힘, 세력, 심신을 유지하는 힘, 생명력, 의지력, 형성력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심신을 포함하는, 조건에 의해 지어진 모든 현상(有爲法, sakhra-dhamma)을 의미하기도 된다. 이 용어는 기본적으로 만드는 행동(the act of forming) 또는 만들어진 수동적 상태(the passive state of ‘having been formed’) 또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Nyanatiloka, Buddhist Dictionary, 199ff.)
“비구들이여, 지어진 것(有爲)을 만들어 낸다는 이유에서 지음(行)이라고 한다. 그러면 어떤 지어진 것(有爲)을 만들어 내는가? 물질(色)을 물질인 상태의 지어진 것으로 만들어 낸다. 느낌(수(受)을, … 지각(想)을, … 지음(行)을, … 의식(識)을 의식인 상태의 지어진 것으로 만들어 낸다. 비구들이여 지어진 것을 만들어낸다는 이유에서 지음(行)이라고 한다.”
sakhata abhisakharontti bhikkhave tasm sakhr ti vuccati. Ki뻙a sakhatam abhisakharonti. Rpa rpattya sakhatam abhisakharonti, vedana vedanattya sakhatam abhisakharonti, sa뼎a sa뼎attya sakhatam abhisakharonti, sakhre sakhrattya sakhatam abhisakharonti, vi뼎.na vi뼎.natthya sakhatam abhisakharonti, sakhatam abhisakharontti kho bhikkhave, tasm sakhr ti vuccanti (SN III 87; Vism 462. s. v. T. Vetter, The ‘Khandha Passages in the Vinayapiaka and the four main Nikyas, p. 27ff.).
업(kamma)은 바로 의지작용(cetan)로 설명되어 있으므로(cetanhabhikkhave kamma vadmi cetayitv kamma karoti kyena vcya manas AN III 415)
sakhra와 cetan와 kamma는 같은 의미를 지니는 용어로도 쓰인다.
제행무상의 경우에는 조건 지워진 현상 일반을 의미하는 유위법(有爲法, sankhta dhamma)으로 사용된다.
Sakhra(行)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성과는 일본의 무라카미 신칸(村上完)교수의 논문 <諸行?gt;(I)(『佛敎硏究』16, 1987), <諸行考>(II)(『佛敎硏究』17, 1988), <諸行考>(III)(『佛敎硏究』18, 1989), <諸行考>(IV)(『佛敎硏究』19, 1990)가 있고, 프랑스어 연구로 Lakshni Kapani, La Notion De Saskra I, II (Paris, 1992)가 있고 번역의 문제를 다룬 논문으로 K. N. Jayatilleke, ‘Some Problems of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I)’(University of Ceylon Review, Vol. 7 No. 3, pp.208~224)가 있다.
모든 전문적인 불교용어를 번역하면서 이와 같은 학문적인 설명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여러 가지 번역이나 해석을 참고해 가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한 예를 들어보았다. 이렇게 몇 사람이 모여서 sakhra(行)를 ‘지음’이라는 용어로 번역한 것과 실제로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과연 이 글을 읽는 독자들과 불교경전을 보시는 분들이 sakhra(行)를 ‘지음’이라고 사용할 것인지는 문제가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번역용어의 선정의 어려움을 우리는 중국의 역경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唐)의 현장삼장의 번역입장에 대한 한 예를 다섯 가지 번역하지 않는 원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현장의 오종불번(五種不飜)2)
현장은 인도어를 중국어로 번역하지 않는 경우 낱말을 번역하지 않고 소리나는 대로 적는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오종불번(五種不)’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비밀스러운 까닭이니 다라니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다라니나 진언은 간단한 어구에 갖가지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역하지 않고 범문대로 음역한다는 것이다.
둘째, “많은 뜻을 포함하기 때문이니 薄伽梵이 여섯 가지 뜻을 갖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범어 한 단어가 많은 의미를 지닐 경우에 한 가지 의미로 한역하면 다른 의미는 잃게 되므로 의역을 피하여 음역한다는 것이다. 薄伽梵이라는 말은 具祥者(상서로움을 갖춘 사람), 破壞者(번뇌와 과오를 파괴하는 자), 具瑞德者(상서로운 덕을 갖춘 자), 分別者(사성제를 분별하여 환히 깨달은 자), 修習者(갖가지 뛰어나 행법을 수지하여 익힌 자), 彷徨棄捨者(윤회의 방황을 버린 자)라는 여섯 가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이곳에 없기 때문이니 閻浮樹와 같은 것이다.” 중국에 없는 식물이나 동물, 광물, 지명들은 음역할 수밖에 없다. 염부수, 琉璃, 獅子, 摩竭陀國, 舍衛城 등이 그러하다.
넷째, “과거의 예를 따르기 때문이니 阿多羅三三菩提와 같이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도 가섭마등 이래 항상 범음을 남겨두었다.” 이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도 無上道·無上覺 등으로 의역할 수 있지만, 예로부터 습관적으로 음역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관습에 따라서 음역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善이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니 般若와 같은 경우이다.” 반야란 지혜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지혜라고 번역하는 것은 경솔하고 천박하게 들리기 때문에 반야라고 음역함으로써 뛰어난 지혜라는 존중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飜譯名義集序』 “一秘密故 如陀羅尼 二含多義故 如薄伽梵具六義 三此無故 如閻浮樹 中夏實無此木 四順古故 如阿菩提 非不加而摩騰以來常存梵音 五生善故 如般若 尊重知慧輕淺而七迷之作 乃謂釋迦牟尼.” (중화대장경 84, p.303)
인도에서 20년 가까이 산스크리트 원전을 공부하고 중국으로 돌아와서 국가적인 지원을 받아가면서 역경불사를 한 현장 삼장의 오종불번 원칙은 우리말 불교용어 표준화작업과도 무관하지 않은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전도 선언’에서 보이는 언어사용의 목적
붓다는 초전법륜의 땅에서 5비구와 야사의 친구 55명을 포함해 60명의 제자들이 아라한이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유익함을 위해서 법을 전하라는 전도의 선언을 한다. (SN I 105~106, Vin I 20~21)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든 결박에서 해방 되었다. 그대들도 역시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든 결박으로부터 해방 되었다. 비구들이여! 이제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들과 인간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편력하라.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같이 가지 말라. 그래서 시작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이 법을, 의미와 표현을 구족한 가르침을 설하라. 청정한 삶, 완전하고 순결한 이 성스런 삶(梵行)을 드러내라. 세상에는 더러움에 의해 눈이 그다지 때 묻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법을 듣지 못하면 [바른 길을 벗어나] 타락하고 말 것이다. [법을 들으면] 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법을 설하기 위하여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로 갈 것이다.”
법을 설하는 기준으로 붓다가 제시한 원칙은 많은 사람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의미와 표현을 갖춘 가르침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성스런 삶을 보여주고 법을 듣는 이들이 경험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불교용어 표준화 사업은 필요하지만 앞서 지적한 문제점들을 좀 더 깊이 생각하면서 불교계 전체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할 것이다. 조급하게, 몇 몇 학자들이 진행시킬 때 빠뜨릴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마라집 삼장의 금강경 번역이 현장 삼장의 번역보다 더 많이 읽혀온 이유는 번역의 정확성 보다는 번역문장의 유려함에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불교용어들은 고대 인도인이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 우리에게 낯익은 용어로 어떻게 살려내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낯익은 용어가 한자어라 하더라도 아니면 산스크리트 문법에 전혀 맞지 않는 발음으로 전해진 다라니라 하더라도 한국불교의 전통에서 각 사찰의 조석예불과 기도 시간에 정착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맺는 말
붓다는 언어로 표현되는 교법의 도구성을 강조하였다. 거친 윤회의 물살을 건너는 뗏목과 같이 법을 보라고 하신 초기경전의 말씀이 『금강경』으로 계승되었고,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말하는 선(禪)으로도 전해졌다. 이러한 전통은 무시할 수도 무시 되어서도 안 된다. 붓다의 전법 목적이 가장 잘 전달 될 수 있는 용어의 선택은 사실 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 용어를 사용하는 이 시대의 일반 대중들이 결정할 일인지도 모른다. 몇 몇 불교 전문가들이 모여서 불교용어의 표준화 안을 내놓을 수는 있겠지만, 그 선택은 한국 불교도와 그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불교학을 전공한 불교학자로서 필자도 용어를 선택할 때에는 조심스럽다. 특히 불교 전문용어를 불교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명하거나 글을 쓸 때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말하는 도중에 청중들에게 묻는다, 제가 쓰는 말을 알아 들으시냐고.
용어 표준화작업이 쉽지 않다는 점만을 부각해서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이야기 했지만,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동안 한국불교학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해 온 작업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있어, 표준화 작업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점이 있었기에 그 문제점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이 글을 적어본다. 표준화 작업의 결과가 자유로운 불교학연구 풍토와 기존의 불교신앙에 누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며, 현재의 표준화 작업이 공개된 후에 불교학계와 불교신행을 담당하는 한국불교 종단들이 함께 진지하게 검토할 장이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