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11시쯤 아내가 돌아왔다. 신나게 놀다 온 표정이다. 모임 멤버 모두 200% 만족했다며, 단풍철에 한 번 더 가기로 했단다. 아내가 오니 부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여행 이모저모를 물어보니 신이 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나도 잘 아는 풍경이라 머릿속에 그림이 절로 그려진다.
노부부가 12만 평의 산을 관리하는 곳인데, 남편분의 모습이 2년 전 보았을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거의 도인이 다 되었다고. 아침 산책을 함께하며 풀과 꽃,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놀라울 정도였단다. 나도 갑자기 그분을 만나보고 싶어진다.
새벽에 문득 시상이 떠올랐다. 보통은 이럴 때 바로 일어나 글을 쓰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이불을 꼭 쥐고 뭉개고 있었다. 옆 침대를 보니 아내가 없다. 또 무슨 일을 하고 있겠지.
7시 반쯤 일어나 떠올랐던 시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창문 너머로 아내가 보인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마당의 풀을 뽑고 있다. 다녀왔으면 쉴 법도 한데, 몸이 무쇠도 아니고 참 부지런하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내가 내 속을 살짝 긁는다. 뭐가 어질러져 있으면 좀 정리나 해두지 그냥 두었냐고. 밤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내 눈엔 딱히 어질러진 게 없는데, 아내 눈에는 잘도 보이나 보다.
들어오자마자 청소를 시작한다. 소파에 앉아 글을 쓰는데 청소기 소리가 여간 귀가 따가운 게 아니다.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금세 서재까지 따라와 또 잔소리를 건넨다. 이번엔 내 발 각질이다.
아내 발은 반질반질한데 내 발은 갈수록 각질이 심해진다. 수시로 돌로 문질러도 소용이 없다. 아내는 늘 발 크림을 바르고 양말을 신은 채 며칠만 자면 깨끗해진다며 해보라 권한다. 하지만 미끈거리는 발에 양말을 신고 자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계속 거부하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내 발에서 각질 조각들이 조금씩 떨어져 나간다.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조각들이다. 나도 보이는 대로 돌돌이 테이프로 밀어보는데, 돌아서면 또 보인다. 어제는 행사가 있어 나갔다 오느라 돌돌이를 못 밀었는데, 아침에 아내 눈에 단번에 띄었나 보다.
아내의 청소 소음을 피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빨리 내려오라며 깔고 자던 이불을 털란다. 이불을 털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또 부른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쓰레기통의 쓰레기를 한곳으로 모으란다.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드디어 청소가 끝났다. 밥 먹을 준비를 하란다. 그냥 한가롭게 빈둥거리고 있었다면 이까짓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한창 필을 받아서 글을 쓰고 있던 중이었다는 점이다. 자꾸 맥이 끊기다 보니, 쓰려던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아침 밥상머리.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도대체 혼자 있을 때 뭘 먹은 거예요?"
반찬이 그대로라며 닭볶음탕은 누구랑 나누어 먹었냐고 추궁한다. 먹고 나서 뼈는 쓰레기 봉지에 버리라고 했는데 뼈가 안 보이니 의심부터 하는 것이다. 어제저녁 그 닭볶음탕을 혼자서 다 처리하느라 죽을 뻔했는데 말이다.
아내가 없을 때는 그 잔소리마저 사랑으로 느껴졌건만, 막상 현장에서 잔소리가 시작되니 이건 완전 공해다.
언제 다시 여행을 가냐고 물으니 10월 중순쯤 간단다. 그때까지 또 이 잔소리를 들으며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아득해진다.
생각해 보면 삶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아내가 들려준 산속 도인의 깊은 철학도 훌륭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잡초를 뽑고 청소기를 돌리며 내 발각질을 타박하는 잔소리 역시 엄연한 '삶의 구도(求道)'일지도 모르겠다. 도인이 산의 아침을 가꾸듯, 아내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일상의 구석구석을 쉼 없이 쓸고 닦으며 지켜내고 있는 셈이다.
비록 내 고요한 시상(詩想)은 청소기 소리에 흔적도 없이 날아갔지만, 흩어진 발각질을 줍고 이불을 털며 티격태격하는 이 소란스러운 일상이야말로 진짜 구도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으로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간절하게 외쳐본다.
"자네, 10월 중순엔 잊지 말고 꼭 다시 여행을 떠나소."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ㅎ
건강 잘 챙기시고 즐거운 나날 보내세요.
ㅋㅋ 제가 속이 없는 남편이기도 해요
문우님 수필 즐감했습니다
심플 라이프 추천드립니다
네 ㅎㅎ
道를 닦는 일은 멀리 있지 않고 거창하지도 않다고 한 어느 도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건필하세요.
감사합니다
아내 분과 티격태격하는 즐거운 일상이 눈에 잘 그려집니다.
마당도 있는 이층집이라면 구도 생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