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사람의 이름은 왜 부르기 꺼렸을까
단군 신화를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 고조선 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고 불렀다. 이는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
“단군 왕검은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고(高)’와 ‘당고(唐高)’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이 ‘高’ 자는 ‘堯’ 자를 피하여 대신 쓴 글자다. 고조선이 중국의 가장 오랜 나라인 요(堯)와 같은 시대에 건국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근거로 하여, 고조선이 서기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확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堯’ 자를 직접 쓰지 않고 ‘高’ 자를 대신 쓴 것은, 고려의 임금인 정종의 이름이 ‘堯’였기 때문에, 이를 피하여 음이 비슷한 다른 글자로 대신한 것이다. 즉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에 그 글자를 피한 것이다.
학생 시절에 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어떤 책에는 안유(安裕)라 하고, 또 다른 책에서는 안향(安珦)이라 하고 있어서 잠시나마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조선 때 문종의 이름이 ‘향(珦)’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여 ‘유(裕)’로 고쳐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높은 사람의 이름자를 함부로 쓰지 않고 피하는 것을 피휘(避諱)라 한다.
휘(諱)란 원래 제왕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후에 성인, 존경받는 사람, 부모, 윗사람 등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피(避)는 피한다는 뜻이니, 피휘는 제왕이나 성인, 존경받는 사람, 부모, 윗사람 등의 이름을 부르거나 이름자를 함부로 쓰지 않는 법을 말한다.
사전에는 휘를 죽은 어른의 이름이라 풀이하고 있으나, 이는 완전한 풀이가 아니다. 원래는 산 사람에 대하여도 썼는데 이를 생휘(生諱)라 한다. 그런데 시대를 내려오면서,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명(名)이라 함에 대하여, 죽은 후에 그 사람이 쓰던 생전의 이름을 휘라고 불렀다. 산 사람에 대한 휘, 즉 생휘(生諱)의 풍습은 진(秦)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의 이름인 ‘정(政)’ 자와 음이 같은 ‘정(正)’을 피하려고 정월(正月)을 단월(端月)로 바꾸었다.
이처럼 중국에서 피휘법을 쓰게 된 때는 진나라 때부터다. 중국의 유교사상에서는 정명(正名)이라 하여 이름을 중히 여기는 사상이 본디부터 있었지만, 제왕에 대한 피휘는 군주의 권위를 높이고 전제 군주권을 확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피휘의 대상은 처음에 천자, 제후 등에 국한되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점차 그 범위가 넓어져 일반인에게까지 확대되고, 이름뿐만 아니라 자(字), 시호(諡號), 연호도 피휘하게 되었다.
왕의 휘를 피하는 것을 공휘(公諱) 또는 국휘(國諱)라 하고, 조상의 휘를 피하는 것을 사휘(私諱) 또는 가휘(家諱)라 한다. 피휘의 방법으로는 이름에 쓰인 글자와 유사한 다른 글자를 쓰는 대자(代字), 그 글자와 다른 글자를 쓰는 개자(改字), 아예 그 글자를 빼 버리는 결자(缺字), 글자의 한 획을 빼 버리고 쓰는 결획(缺劃) 등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몇 가지 예를 살펴본다.
24절기 중의 경칩(驚蟄)은 원래는 계칩(啓蟄)이었으나, 한나라 경제의 이름이 유계(劉啓)였기 때문에, 계(啓) 자를 피휘하여 경(驚) 자로 바꾸었다. 삼국사기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적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서에서 당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천(泉)으로 적은 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피휘는 점점 더 그 정도가 심해져, 다른 글자라도 음이 같거나 심지어 글자의 모양이 비슷하다 하여 피휘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또한 당나라 때에 와서 수서(隋書)를 편찬할 때,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에 들어 있는 ‘세(世)’를 피하기 위하여, 왕세충(王世充)이란 인물을 기록하면서 ‘세(世)’ 자를 빼고 ‘왕 충(王 充)’으로만 적었다. 결자로 피휘를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피휘법은 고려 때 가장 성행하였다.
혜종의 휘자인 ‘무(武)’를 피하기 위하여, ‘홍무(洪武: 명나라 태조의 연호)’를 ‘홍호(洪虎)’로, 후한 무제(武帝)를 ‘호제(虎帝)’로 바꾸어 썼다. 또한 문경의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靜眞大師圓悟塔碑)에 ‘무반(武班)’이라는 관직을 ‘호반(虎班)’으로 바꾸어 적었다. ‘무(武)’ 자를 그 뜻과 연결되는 ‘호(虎)’ 자로 바꾼 것이다.
성종의 휘자인 ‘치(治)’를 피휘하기 위하여 ‘지치(至治: 원나라 영종의 연호)’를 ‘지리(至理)’로, ‘혁거세 치(治) 육십 년’을 ‘혁거세 이(理) 육십 년’으로 각각 바꾸어 썼다. ‘치(治)’와 ‘이(理)’는 뜻이 서로 통하는 대자(代字) 피휘를 한 것이다.
또한 신종 때는 왕의 이름인 ‘탁(晫)’과 같은 음을 가진 ‘탁(卓)’씨 성을 가진 자는 외가의 성을 따르도록 하였다.
국휘의 범위가 점차 넓어져 왕의 이름만이 아닌 태자의 이름도 피휘하는 경우가 생겼다. 인종이 원자인 철(徹)을 태자에 책봉하자, 문신 김부철(金富轍)은 ‘철(轍)’ 자를 피휘하여 김부의(金富儀)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다.
선종 때는 피휘법에 대한 공식적인 법령이 발표되었는데, 이 조처에 의하여 개인의 이름이나 사원, 주, 부, 군현의 이름이나, 건물의 명칭에도 왕의 이름자를 사용할 수 없게 하였다. 이러한 피휘법에 일반인의 폐해가 많았으므로 이를 줄이기 위해, 국왕이나 태자의 이름은 하나의 글자(외자)로 짓고, 또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글자[僻字(벽자)]로 지었다.
또 공자의 휘 구(丘)를 피하기 위하여, 원래의 지명인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바꾼 것도 그러한 연유다. 유교 경전이나 서적을 펴낼 때 ‘丘’ 자를 붉은 종이로 가리거나, 붉은 네모 테두리로 둘러쌌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도 유학자들은 문장에서 선현들의 이름자가 나오면, 글자 그대로 읽지 않고 ‘모(某)’라고 하는데, 이것도 다 같은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피휘에 따른 유풍으로, 이름을 불러야 할 때는 이름 대신 자(字)나 호(號)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는 써도 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는 쓰지 못하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는 반드시 호를 써야 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말할 때 ‘홍길동’이라 하지 않고 ‘홍 길자 동자’라고 조심하여 말하는 것도 피휘의 한 맥락이다.
피휘는 본래는 제왕의 전제적이고 권위적인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윗사람을 공경하고,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으로 발전했다.
또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행동은 단순히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 걸맞게 몸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깊은 뜻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피휘법은 이름값에 맞는 도덕적 행위를 실천해야 할 당위성을 지우는 촉매로 작용하였다. 이는 이름에 걸맞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동양의 정명사상(正名思想)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명사상:구성원 각자의 이름에 부여된 임무를 잘 실천할 때 사회는 안정된다는 사상.
곧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는 사상.[君君 臣臣 父父 子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