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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8월22일 토요일 [(백)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청주]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온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룻기 2,1-3.8-11; 4,13-17
+ 복음 마태오 23,1-12
1900년 무렵부터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로마 전례력의 개정에 따라,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시키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 곳은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즈의 밭이었다.
룻에게 호의를 베푼 보아즈는 룻의 요청대로 룻과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 준다. 그 집안에서 다윗이 태어나게 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은 듣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므로, 스스로
스승이나 아버지로 자신을 내세우려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낮추며
섬기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당시 지도층에 속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위선자’라는 그리스 말에는 가면을 쓴 연극배우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위선자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 앞에서도
연극하는 것처럼 위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앞의 말씀은 우리가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자위하면서 누군가를
비난할 때 흔히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특히 정치적으로든
사회적 또는 종교적으로든 권위를 지닌 사람들 아래 있는 이들이 자주
되뇌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특별히 한 구절이 새롭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행실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의 말은 권위마저 잃게 되지요. 그래서 말만 번드럽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경우, 그들의 말은 들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옳은 말을 한다면, 그가 그대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처럼 살아가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가르침에는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8월22일 토요일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 24,2-3)
다른 사람에 대한 뒷담화는 아주 재미 있습니다.
특히 내가 오르지 못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까는 뒷담화가 최고로 재미있지요.
그래서 대통령이나 정치가들은 뒷담화의 주된 안주거리입니다.
목사님, 스님, 신부님들에 대한 뒷담화는 더 신비롭기까지 하지요.ㅎㅎ
예수님 시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뒷담화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침을 주시네요.
그들은 어쨌든 모세의 자리에 있다.
대통령이고 대법관이고 국회의원이다.
성직자들이다. 그건 인정해라. 그들은 주로 말로 먹고 산다.
말은 그럴싸 하니 따라서 나쁜 말은 잘 안할 것이니
따라주어도 무방할끼다.
허나 그들이 하는 짓거리는 제발 배우지마라.
알타반의 말씀사랑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 말씀은 귀하게 받으십시오.
그러나 댓글을 저에게 달지 마시고 실천하는 것으로 대신 하십시오.
왜냐하면 저도 그렇게 다 실천 못하니까요.
저를 배우지 마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에 옮기시면 됩니다.
그리하실꺼죠? 고맙습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8월22일 토요일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23,1-12)
사랑으로 섬기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소중한 우리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소중할 수 있다는 건 소중히 섬기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섬기는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자아에 갇혀있는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건 진심으로 섬기는 사랑뿐입니다.
삶의 중심을 아직도 잡지 못하는 것은 섬기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삶과 우리의 삶이 엇갈리는 것은 섬김의 길을
우리가 놓치며 산다는 것입니다.
가장 빛나는 길은 언제나 섬김의 길입니다.
섬기는 사랑이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우리의 관계를 용서와 이해로 이끌어가는 것또한
섬기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오늘도 어머니의 기도는 섬기는 기도가 되어
위태로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십니다.
섬김의 모후이신 어머니께서는 오늘도 걱정이 아니라
기도로 우리의 시간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봉헌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섬김으로 길을 찾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 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유일한 스승
고진석 신부(왜관베네딕도수도회)<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8월22일 토요일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 마태오 복음 23장 1-12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유일한 스승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에게 호된 비판을 받았던 이유는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늘 나라의 문으로 인도해
주는 참된 스승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수단인
율법을 신성시하고 교조화하여, 율법이 제정된 본래의 정신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가르쳐야 할 스승들이 오히려 백성들의 무지몽매함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지위를 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향해 신랄한 비판을 하는 내용의
복음 말씀을 읽을 적마다 가슴이 철렁합니다.
예수님의 손가락이 저를 향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산다면서도 제 삶이 점점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치렁치렁한 수도복을 멋인 양 입고 다니고 신자들에게 대접받고
공경받기를 맛들여가는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남들 앞에 서서 지적하고 가르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서 어느덧 나 역시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앞질러 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제자다운 모습을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으려는 겸손한 제자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 제자의 도리란 무엇입니까? 스승인 예수님을 어떤 방식으로 따르고
있습니까?
- 고진석 이사악 신부(왜관 베네딕도 수도회) -
◈ [청주]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둔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8월22일 토요일 [(백)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제1독서
<주님께서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 룻기의 말씀입니다. 2,1-3.8-11; 4,13-17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둔다.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
(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
(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것이요,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심든지
정성껏 심어야 하겠습니다. 실행이 해답입니다. 무엇을 하던지 사랑으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께서 친히 겸손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지요.
2015년 8월22일 토요일 [(백)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파블로 피카소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 생각납니다. 그는 입체파 화가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를 않지요. 그래서 한 남자가 피카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사람들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습니까?”
이에 피카소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남자는 자신의 지갑에서 아내의 사진을 꺼내 피카소에게 내밀면서
“이렇게 보이지요.”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사진을 들여다본 피카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청나게 작네요. 그리고 납작하고요. 그렇죠?”
피카소는 사진 속의 인물을 그대로 이야기한 것이지요. 납작한 평면으로
이루어진 작은 사진으로 말입니다. 피카소가 제대로 보지 않는 것일까요?
피카소는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그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간직하고 있는 주관적인 인식에 의해서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이 사람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 주관적인 인식을 배제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판단 역시 이러한 주관적인 인식을 배제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분명히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그 시각을 사용할 수 있으며, 주님과 더욱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쌓여
있어서, 객관적인 인식만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이 아닌, 미움과 다툼이 만연한 삶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16년 전,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가졌던 마음들이 문득 떠올려집니다.
사제단과 신자들이 바치는 성인호칭기도를 들으며 서품식장 바닥에
엎드렸을 때, 이 모습처럼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섬김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했었지요. 그러나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 섬김의 삶보다는 심김을
받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과분하게 받고 있으면서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는 너무
자주 판단과 단죄를 반복했었습니다. 이 모습이 과거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셨고 꾸짖으셨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었지요.
자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만 하고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 인사 받고
자신이 원하는 말만 듣기를 원하는 사람.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꾸짖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었고, 어쩌면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우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꾸짖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겸손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지요. 그래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취해 이 땅에 오셨고, 또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끝이 아니었지요. 부활의 영광을 통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증명해주셨습니다.
다시금 낮은 자의 모습을 마음에 담아 봅니다. 그리고 나를 드러내려는
그릇된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주님께 간절히 청해봅니다.
과녁에 꽂힌 화살의 개수는 쏜 화살보다 결코 많을 수 없다. 승리의
횟수는 도전의 횟수보다 결코 많을 수 없다(김은주).
사랑의 실천을 위해
누군가 그럽니다. 이 세상 살아가려면 이 정도는 봐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요즘에 인기 있는 드라마와 개그 프로그램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봤다는 영화는 꼭 보라고
합니다. 인기 드라마를 시간에 맞춰서 틀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10분
만에 잠들고 말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개그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역시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제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13년 국민독서 실태조사’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한국 국민 독서율(1년 동안
정기 간행물, 만화, 잡지 등을 제외한 일반 도서를 1권이라도 읽은 사람
비율)은 71.4%였습니다. 매우 높은 것 같지요?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참으로 초라합니다. 글쎄 성인 1인당 연평균 독서시간은 9.2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1년 365일 동안에 책 읽는 시간이 9시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 거의 읽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답이겠지요.
영상매체에 익숙하다보니 활자화된 책을 읽기가 힘든 것이겠지요. 그런
측면에서 저는 영상매체가 아닌 활자화된 책에 익숙한가 봅니다. 그래도
꾸준히 책을 보고 있으며,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일주일에 한 권 이상의
책은 읽으니까 말입니다.
모든 취향은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매체를 좋아하든, 활자화된
책을 좋아하든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지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을
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주관적인 취향일 뿐인 것으로 이를 당연하게
서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처럼만 보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그 모든 다름을 함께 하지 못할 이유로 찾고 있는 사회 안에서
과연 다양성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작은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은
과연 가능이나 할까요?
주님을 바라보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 지가 보여요.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동정 마리아의 모후 기념일
2015년 8월22일 토요일 [(백)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제1독서
<주님께서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 룻기의 말씀입니다. 2,1-3.8-11; 4,13-17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교우 분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시면 많이 아쉬웠습니다. 형제님은 남성 총구역장을 하셨고,
자매님은 성물방 봉사를 하셨습니다. 구역 활성화를 위해서 헌신하시던
형제님의 빈자리는 크게 보였습니다.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옆 본당에서
한 가족이 이사를 오셨습니다. 따님이 4명인 부부였습니다. 사업을
하시다가, 형편이 어려워져서 이사를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부부에게는 신앙이 사업보다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형제님은 레지오에
입단하셨고, 구역장으로 봉사를 하셨습니다. 차량 운행 봉사도 기꺼이
맡아 주셨습니다. 자매님은 반장 일을 맡아 주셨고, 동네에서는
재할용품을 모아서 판매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일 미사 후에 점심
봉사를 할 때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예쁜 딸들도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복사를 해 주었습니다. 마치 ‘호박이 덩굴째 들어온’
느낌이었습니다.
때로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말을 잘하고, 활동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늘 문제의 중심에 있는 분입니다. 특히 금전적으로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를 하기 때문에 믿고 돈을
빌려주었다가 마음까지 상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신앙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장식’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24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많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과연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어떤 향기가 났을까? 생선을
담았던 종이에는 생선비린내가 나고, 꽃을 담았던 종이에는 꽃향기가
난다고 합니다. 내가 머물면서 담았던 것들이 복음이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었다면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났을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머물면서 담았던 것들이 나의 욕심과 아집이었다면 악취가 났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각에만 머무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생각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직접 사랑을 해야 하고, 희생을 말하는 사람은
직접 희생을 해야 하고, 나눔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직접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남을 섬기는 사람, 타인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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