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문화 유적이 살아 숨 쉬는 곳. 그러면서도 자연미가 온전히 살아남아 트래킹 코스로 주목받는 세계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할 때 유네스코는 '동양과 서양의 기술과 문화가 집약된 성곽 건축물'이라고 기록했다.
동·서양 문화 집약된 성곽 건축물
세계문화유산 등록 '한국의 자랑'
장안문, 국보 1호 숭례문보다 웅장
화성행궁·화홍문·방화수류정 볼거리
성곽길 따라 즐기는 역사데이트
하지만 이는 수원화성을 엄청나게 과소평가하는 말이다. 수원화성은 단순한 성곽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신도시였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은 미국의 워싱턴(1800년)보다 4년 앞선 조선 정조 (1796년) 때 지어진 세계 최초의 계획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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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성벽 길. |
수원화성 성곽 길 걷기는 수원역에서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는 팔달문에서 시작하는 것도 좋다. 수원의 구도심 중심부 격인 팔달문 인근에는 못골시장이 있다. 부산 서면시장을 연상케 할 만큼 만두나 찐빵 등 먹거리가 풍부한 시장이다.
오른편으로 불과 2분 거리에서 가파른 계단길이 시작된다. 부산 용두산 공원 계단과 비슷한 언덕길에 오르면 화성 열차가 기다린다. 팔달문~화서문~장안문~연무대를 30분 간격으로 오가는 관광열차다. 편도 1천 500원.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예술혼의 극치 하지만 수원화성을 꼼꼼히 살펴보고 싶은 사람은 성곽 길을 직접 걸어보는 것이 최고다. 건강에도 좋다는 사실을 빼고하는 말이다. 성곽 길에는 개나리와 진달래 등 봄꽃들이 다투어 인사한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했던가. 봄이 짧아서 아쉽다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 수원화성이다.
수원 시가지를 눈 아래로 감상하며 걷다 보면 화성행궁이 보인다. 정조가 임시궁궐로 사용했다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그 터의 일부를 학교 용지로 사용하는 등 훼손된 부분이 많지만 대체로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은 장안문이다. 본래 서울을 뜻하는 이름인 장안문은 국보 1호인 숭례문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를 두고 정조가 화성 천도를 꿈꾸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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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천 수문을 겸했던 화홍문. |
장안문 오른쪽에는 수원화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연이어 나온다. 화홍문은 수원천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수원천이 범람하는 것을 막아주는 수문 역할을 하도록 설계된 문이다. 수원천을 건너려면 화홍문을 지나야 하기에 돌다리로 사용됐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화홍문은 돌로 만든 홍예문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돌다리라는 말이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니다.
화홍문 위쪽 구릉에는 방화수류정이 세워져 있다. 방화수류정은 본래는 성곽을 지키는 병사들의 전망대로 사용했던 공간이지만 그 아래 조성된 인공 연못과 수양버들이 어우러져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송나라 때 시인 정명도의 시에서 그 이름을 따왔을 만큼 정취가 뛰어나다. 밤이 되면 화홍문에 걸린 조명과 더불어 감흥을 더한다. 지난해 수원문화재단주최로 '달빛 음악회'가 열렸던 곳이다.
하지만 수원화성의 참모습은 이 같은 예술적 가치에다 개혁군주 정조의 통치철학이 어우러질 때 빛을 발한다.
수원화성은 개혁 군주 정조가 양주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현 화성시)로 옮기기 위해 건설한 신도시다. 사도세자의 무덤이 '현릉'으로 격상되면서 수원부 10리 권 내에 살던 백성들은 집단 이주를 떠나야 했다. 그들을 위해 새로 조성한 '정책 이주촌'이 수원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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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정조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는 융릉·건릉 문화관. |
■개혁군주 정조의 철학이 담긴 문화유산
하지만 정조가 수원화성을 조성한 한 것은 단순히 효심 차원이 아니었다. 동·서양 도시의 장점을 접목하기 위해 서양의 도시를 소개하는 서적을 두루 섭렵한 실학자 정약용의 머리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정조는 수원화성 건설 비용을 모두 왕실 재산으로 조달하고 현장에 동원된 사람들에겐 임금을 후하게 지급했다. 신도시 내에는 만석거(일왕 저수지)과 같은 대규모 저수지들을 만들어 생산적 기반시설로 활용했다. 건설 현장에 투입되는 자재는 수레로 운반했다. 이를 위해 도로 확장부터 서둘렀다. 왕실 재산으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해 상공업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무엇보다 정조는 수원화성 건설 사업을 탕평책으로 연결했다. 총책임자로 개혁 세력의 총수격인 채제공을 임명하고 실무진으로는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 젊은 실학자를 대거 기용했다. 개혁파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집권 노론 세력을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깔린 포석이었다.
그 결과 정조는 애초 10년으로 잡았던 공사 기간을 2년 6개월로 단축하면서 정치적으로는 탕평책까지 펼치는 결실을 거두었다. 수원화성을 개혁군주 정조의 철학이 응축된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하는 배경이다.
탕평책의 하나로 조성된 세계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화성. 성곽 길을 걷는 도심 트래킹이 끝날 무렵이면 어느새 개혁군주 정조의 열렬한 팬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글·사진=정순형 선임기자 juns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