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긍극적인 목표를 묻는다면 대답은 제 각각이겠지만 그 답들이 맞을 수 있을까. 삶은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자연에서 얻은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목표를 정하는 삶이라면 사람이 아닌 기계이며 누군가의 조종에 움직이는 로봇에 불가할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슨 힘으로 사는가. 아이러니 하게도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산다. 태어나는 섭리를 배반하는 행위다. 이것은 사람에게 생각하는 힘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보도 듣고 느끼고 그것을 실행하는 의지력이 사람을 자연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자연이면서 자연이 아닌 반 기계적인 동물로 만들었다. 이것을 문명이라고 하지만 이기적인 생각이다. 자연으로서는 하찮은 존재가 사람이므로 실로 우습기 짝이 없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이어져 왔으며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래도 가장 자연적인 현상과 이룸을 볼 수가 있는데 사랑이다. 우주를 지배하듯 문명이 발달하여도 자연 현상으로 이뤄지는 사랑만큼은 그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다. 이태순 시인은 사랑과 이별이라는 가장 무거운 삶의 과정을 그려 읽는 독자들의 감탄을 낳게 한다. 영영 사랑하기까지 생의 이력으로 묻어둘 사랑의 언어는 물엿처럼 달콤하지만 영영 잊혀질 때까지 지녀야 할 이별의 아픔을 표현하는 슬픈 언어에 젖어 그렁거리는 이유는 뭘까.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며 이별은 받기만 하는 고뇌의 절벽을 만들기 때문이다. 보인다면 덜하지만 보이지도 않고 말하지도 못하는 아픔이 삶에 주는 상처는 크다. 그러나 가장 숭고한 사랑으로 얻은 아픔이므로 견뎌야 한다. 그것이 자연을 떠난 사람의 숙명이며 아무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표현한 시인은 사랑의 대변자다. [이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