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내의 마지막 결심/문보근
평생을 같이 살아도,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마음이 대쪽 같기에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런 말을 아예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한마디 말도 없이
목 고개 빳빳하게 들었던 남편
그런 남편이 요즘은 바람 빠진 풍선같이
침대에 축 늘어져 지금껏 하지 않았던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런 말을, 말 배우는 아이처럼
요즘 들어와 연신 꺼내는 남편,
남자는 근엄해야 한다고,
남자는 눈물도 흔하게 흘리면 안 된다고
더더욱 웃음이라 하더라도 자중해야 한다고
그것이 남자의 삶이라고 믿고 살아온 남편
그랬던 남편이
지금은 녹음기 틀어놓는 것처럼
미안해 라는 말이 입을 열면 술술 나온다
그 말을 안 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지금은 그말이 자연스레 나오는 남편
전날엔 그말이 듣고 싶었지만
지금 그런 말을 아내는 듣기가 싫다
남편으로부터 다정한 말 한마디는 포기했지만
장수부부란 꿈 마져 포기한것이 아닌
어느 날이었다
대낮이 까매지고
깜은 밤이 하얘지는 청천벽력과 같은
결정 앞에서 석고상처럼
굳어져야 하는 일이 두부부에게 생겼다
가끔은 잔기침을 했지만
괜찮겠지 하며 별스럽게 여기며 지냈는데
점점 기침이 잦아지고
급기야 음식을 넘기는 것조차 힘들어지자
찾은 병원 검사 결과가
연하장애 증이란 병에 걸렸다는 것
연하장애란
식도와 기도 사이에 문제가 생겨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무서운 병
초기에는 쉽게 고칠 수 있지만
때를 놓치면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
불행하게도 남편은
조기 치료 시기를 놓친 치료 불가능한
환자라는 의사의 말,
이제는 남은 여생을 더 이상
음식을 스스로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목을 뚫어 만들어진 관을 통하여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귀를 후벼파고 또 후벼도
청각엔 이상이 없고 청각에 이상이 없으니
조금 전 들은 의사의 말이 잘못 들을 일 없어
아연실색에 빠지는 아내,
때 이른 눈발이 가슴에 펑펑 내리는 것 같지만
원망과 슬픔에만 젖어 있을 수만 없는 일
아내는 가슴에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웃음으로 닦으며 남편을 바라본다
툭 떨어진 낙엽처럼
전깃줄이 끊어진 전구처럼 캄캄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남편의 모습,
아내는 이를 앙 깨문다
병이야 물렀거라, 내가 있다
절망아, 우리 한판 겨루어 보자
아내는 무언으로 의사에게 물었다
"언제까지인가요?""
의사도 무언으로 대답했다
"두세 달쯤이요"
그런 의사의 진단을 아내는
오진이길 바랐지만 요즘 의학 기술은
신의 능력 가까이 와 있어
두세 달쯤이란 의사의 말이 정말이었고
따라서 남편의 불꽃도 가늘게 가늘게
가늘어져 가고만 있다
어느 경전에서 떨어져 나온 페이지인가
"믿는 자에겐 절망은 없다"
어느 시인의 시인가
"절망은 절망을 인정하는 사람에 것이다"
어느 때에는
이런 말을 동아줄 잡듯 기적을 잡아 당겼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을
쓰레질한지가 아내는 오래다
이제는
더 이상 병원에서 환자에게 해줄 것이 없다는
의사의 마지막 통보에
요양병원으로 보내라는 주변 말도 있었지만
아내는 무거운 결심을 한다
검불같이 말라 바짝 가벼워진 남편을
아내는 번쩍 들어 집으로 옮겼다
남편도 집에 돌아온 것이 좋았는지
그믐달같이 어두웠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친구들이 전화로
왜 쌩 고생하냐며 환자 입장으로 보아도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 시설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조언을 해줬지만
아내는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고생을 각오한 아내이지만
간호사가 해준 일을 집적해야 하는 아내에겐
넘기 힘든 벽을 타는 일이었다
대소변 처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깡마른 남편이지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목욕시키는 일,
환자 몸에서 나는 특이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침대 커버를
갈아줘야 했고
수시로 옷도 갈아입혀 청결을 유지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에 가래는 더 심하게 생겨 한번 기침을
시작하면 몇 시간도 계속하는 남편,
그런 남편을 끌어안고 함께 우는 아내
그날이 다가올수록 남편 목에서는
한없이 괴이는 핏덩이, 고름 덩이,
그럴 때마다 금방 숨이 멎을 듯이
자지러지는 남편의 고통,
아내는 마지막으로 치닫는 남편에게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어 슬펐다
문득
옛날 허준이란 티브이 프로에서
고름을 빠는 의원의 모습을 떠올랐다
그래 그것이 사랑이야 하고 생각한 아내는
마지믹 결심을 한다
그 결정은 아내 자신에게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남편 목에 끼어있는 관을 빼고
빠진 관 자리에서 흘러넘치는 핏덩이와
고름 덩이를 자신의 입으로 빨기 시작한다
마지막 키스처럼....
그 순간 심장 고동 소리가 흐려지는 남편
그리고 차마 울지도 못하는 아내,
이 부부에게
옛적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날
주례사가 읊어 주던
한편에 시가 밤이 돼도 어둡지 않는
아름다운 별빛으로
부부가 꼬옥 잡은 두손 위에 내려앉는다
앞으로/문보근
이제 두 사람은
앞으로 돌이 보석이 되는 길로
걸어가리라
이제 두 사람은
앞으로 가시가 꽃이 되는 길로
걸어가리라
이제 두 사람은
앞으로 두 개가 하나 되는 길로
걸어가리라
이제 두 사람은
앞으로 떠오르는 태양만 보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이침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앞으로 움트는 새싹만 보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텃밭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앞으로 노래만 부르며 살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리듬이 되어 줄 테니까
그대들이여
이제 힘차게 힘차게 발돋움하라
그리고
그대들이 함께 할 그곳으로
씩씩하게 들어가라
그곳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넘치게
행복하리라
< 문보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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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내의 마지막 결심(감동실화 수필)/문보근
하늘 바래기
추천 1
조회 215
23.10.03 06:5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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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인의 헌신적인사랑에
가슴이 억먹하네요.
그대들이여
이제 힘차게 힘차게 발돋움하라.
그리그대들이 함께 할 그곳으로
씩씩하게 들어가라.
마지막 남은 것입니다.
같이 가는 길,
그 길을 찾았습니다.
이런글을 읽을 때면 앞으로 잘하자 하면서도 잘 안됩디다 뭔 심사인지...
건강하십시오 ~^^
감동 좋은 글 감사합니다.